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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27일 금요일

[강명관의 심심한 책읽기]조선시대의 일기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3262158195&code=990100

보수동에서 산 일기책 이야기를 하다 보니, 생각이 옛날의 일기로 번진다. 다만 현재 남아 전하는 것은 조선시대의 일기뿐이다. 그것도 조선전기의 것은 불과 3종이고 나머지는 모두 조선후기의 것이다. 그중 몇 가지 실례를 들어보자. 먼저 조선전기의 일기다. 

이문건(李文楗·1495~1567)이 1535년부터 1567년까지 쓴 <묵재일기(默齋日記)>는 달아난 노비를 잡아다 매를 친 이야기, 전답 문제로 소송한 이야기, 맹인을 불러 점을 친 이야기 등 16세기 사족의 일상을 세세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 <묵재일기>에는 노비에 관한 이야기가 퍽 많은데 이것을 모두 뽑아 정리하면 조선전기 노비에 대해 구체적이고 풍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유희춘(柳希春·1513~1577)이 1568년에서 1577년까지 쓴 <미암일기(眉巖日記)>는 개인사는 물론이고, 그가 선조의 신임을 받았던 고급관료였던 만큼 당시 조정에서 일어난 사건도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소실될 때 기본 사료들이 모두 불타고 말았기에 <미암일기>는 <선조실록>의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하였다. 

유희춘은 책을 사랑한, 책에 집착한 다독가이자 애서가였다. 그는 원하는 책이 있으면, 온갖 수단을 동원해 손에 넣었는데, 그 과정을 이 일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 그였기에 그는 <주자대전>과 <주자어류>를 모두 외울 수 있었다. 1543년 간행된 오자 많은 <주자대전(朱子大全)>의 교정도 그가 맡았다. <미암일기>에는 교정을 본 분량도 꼼꼼히 기록하고 있다.

책 정보 외에 <미암일기>에서 내가 각별히 눈여겨본 것은 일기에 나오는 물품들이다.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어느 고을의 누구에게서 어떤 물건이 왔다는 기록이 이어진다. 쌀, 포목, 꿀, 미역, 종이, 생선 등 아주 구체적인 물목과 수량이 나온다. 화폐가 유통되지 않던 시대였으니, 실물의 증여경제가 주축이었던 것이다. 이 자료를 잘 분석하면 16세기 조선사회 실물경제의 구체적인 모습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미암일기>에 이어 오희문(吳希文·1539~1613)이 쓴 <쇄미록(鎖尾錄)>도 대단히 중요한 일기다. <쇄미록>은 1591년 11월27일부터 1601년 2월27일까지 쓴 것인데, 이 기간은 임진왜란과 겹친다. 따라서 이 일기가 임진왜란을 생생하게 반영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 중요성이야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쇄미록> 이후의 일기로는 김령(1577~1641)의 <계암일록(溪巖日錄)>이 있어서 전쟁 이후 사족 사회의 일상을 엿볼 수 있다. 지나는 길에 하나 덧붙이자면, 임진왜란을 경험한 일기류는 사족들의 문집에 상당히 많이 전한다. 이것들을 공간해 번역하면 임진왜란 연구에 상당한 도움이 될 터이다.


조선후기에는 방대한 일기가 적지 않게 전한다. 대표적인 것을 꼽으라면 황윤석(黃胤錫·1729~1791)의 <이재난고>, 유만주(兪晩柱)의 <흠영(欽英)>이 있다. 전라도 고창의 선비였던 황윤석은 서울로 올라와서 당대 최고의 벌열이었던 안동김씨 가문의 김원행(金元行)의 제자가 된다. 황윤석은 1738년부터 1791년까지 일기를 썼다. 이 일기에서 각별히 중요한 것은 18세기 후반 베이징에서 수입된 서적들의 소유 현황과 유통 양상이다. 특히 베이징에서 들어온 한역(漢譯) 서양서가 어느 집안에 있는지, 누가 그 새 지식을 이해하고 있는지, 서울 사족들 사이에 지식 네트워크가 어떻게 구축되어 있는지 이 일기를 통해 소상히 알 수 있다. 

<흠영>을 쓴 유만주는 조선후기 노론 명문가인 기계유씨(杞溪兪氏)다. 유길준(兪吉濬) 역시 이 집안의 후예다.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이 명문가의 자제는 오직 책 읽기로 평생을 보냈다. 따라서 <흠영>도 독서일기다. 유만주는 문학서를 위주로 매일 어떤 책을 얼마나 읽었는지 꼼꼼하게 쓰고, 중요하고 흥미로운 대목을 발췌해 옮겨놓는가 하면, 비평도 곁들이고 있다. 정조의 시대에 경화세족 가문에서 어떤 책을 주로 읽었는가를 알려면 <흠영>을 읽지 않을 수 없다.

조선시대의 일기를 읽으면 오늘날 일기와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곧 그곳에는 개인의 내면 고백이 없다. 개인의 내면 고백이란 것은 아마도 근대의 산물일 것이다. 

생각건대, 그런 일기의 최초의 예는 윤치호(尹致昊·1865~1945)의 <윤치호일기>가 아닐까? 1883년부터 1906년, 1916년에서 1943년까지 쓴 방대한 이 일기가 한국 근대사의 중요한 사료가 됨은 물론이다. 원래 한문과 국문으로 쓰던 일기는 1889년 12월부터는 영어로 쓰인다. 영어가 아니면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윤치호는 16세에 일본에 유학하여 2년 동안 서양 학문을 배우고, 19살에 고종과 명성황후를 직접 만나 조선의 장래에 대해 건의하는 등 조선의 정치에 깊이 개입했다. 1884년 갑신정변 실패 후에는 중국 상하이로 떠나 중서서원(中書書院)에서 서양의 근대 학문을 공부하다가 감리교인이 되어 미국으로 건너가 대학을 다니며 인문학과 사회과학, 신학을 공부한다. 이쯤 되면 그의 세계관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을지 짐작할 것이다.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진 근대적 지식인 윤치호는 조선의 현실에 절망하는 한편 기독교를 통한 문명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구 문명에 대한 열등감, 그들의 인종주의에 대한 비판 등 조화를 이룰 수 없는 생각, 개신교 신자로서의 죄의식의 표백 등 근대를 경험하기 시작한 개인의 내면을 볼 수 있는 자료로 <윤치호일기>만 한 것도 없을 것이다.

사족. 최근 일기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아져 연구물이 나오고 있다. 

<이재난고로 보는 조선 지식인의 생활사>(강신항 등, 한국학중앙연구원, 2007)는 <이재난고>를, <일기를 통해 본 조선후기 사회사>(이성임 등, 새물결, 2014)는 <계암일록>을, <일기로 본 조선>(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엮음, 글항아리, 2013)은 앞서 언급한 대부분의 일기를 다룬 저작물이다. 저작들을 통해 조선시대 개인의 생활과 속내를 들여다보는 것은 너무나 흥미롭다. 관심 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한다. 앞으로 보다 많은 일기가 발굴되기를, 그리고 또 깊이 연구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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