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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30일 월요일

[책과 출판의 문화사] 근대 과학혁명의 원동력이 된 인쇄술 /전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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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출판의 문화사]  
근대 과학혁명의 원동력이 된 인쇄술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까지 유럽의 과학 논문은 종교 서적과 달리 시장이 형성돼 있지 못했다. 그러나 인쇄술의 도입으로 과학지식을 전파하는 방법에도 결정적인 변화가 생겼다. 사진술이 발명되기 전이었지만 알브레히트 뒤러처럼 뛰어난 판화가들은 동판화를 통해 지도는 물론 동식물의 모습, 해부도 등을 보다 정교하고 세밀하게 재현할 수 있었다. 이전에 사용됐던 목판은 인쇄를 거듭할수록 그림의 질이 떨어졌으나 금속판에 새겨진 삽화들은 더 정확한 시각 정보를 제공했다. 인쇄술을 통해 학술 서적이 유통되자 연구자들은 고대의 기록들을 좀 더 자유롭게 참고하고, 연구결과를 동료들과 서로 비교할 수 있게 됐다.  

예를 들어 16세기 덴마크의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는 코펜하겐의 서점에서 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의 책을 구할 수 있었다. 선배 연구자들의 책을 접한 덕분에 그는 처음부터 혼자 출발해야 하는 어려움을 덜 수 있었고, 그들의 성과 위에서 새로운 연구를 시작할 수 있었다. 브라헤의 제자 요하네스 케플러는 뒤를 이어 궁정 수학자가 되어 천체의 운동궤도가 원형이 아니라 타원형이라는 사실을 최초로 밝힌 과학자가 됐다. 하지만 왕족 혹은 귀족의 후원을 받아야 했던 시절의 천문학자였던 그는 당시엔 별점을 잘 쳐주는 점성술사로 더 높이 평가받았다. 

파도바대학교 수학과 교수였던 갈릴레이 갈릴레오 역시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에 의탁하고 있었다. 그는 1608년경 네덜란드에서 망원경이 발명됐다는 풍문을 듣고 1609년 스스로 당대 최고 배율의 망원경을 제작했다. 그는 반복적인 관측을 통해 예술가들이 상상했던 것처럼 달 표면이 실제로는 매끄럽지도, 평평하지도 않으며 정확한 원구 형태도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갈릴레오는 피렌체 예술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됐을 만큼 소묘에도 재능이 있었는데, 그는 뛰어난 그림 솜씨를 이용해 자신이 관찰한 달의 돌출 부위와 함몰 부위를 명암법으로 표현했다. 

명암법은 원근법과 함께 르네상스 미술의 대표적인 성과이자 당대의 최신 기법이었다. 그 시절엔 성당 제단화로 성모의 원죄 없는 잉태를 묘사하는 무염시태(無染始胎) 같은 작품들이 반복적으로 그려졌는데 이런 부류의 작품에서는 흔히 도상학적으로 달 위에 성모 마리아가 서 있는 모습으로 묘사됐다. 스페인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거장 벨라스케스가 1618년에 그린 <무염시태>에는 달 표면이 매끄럽게 묘사돼 있지만, 갈릴레오의 친구였던 루도비코 치골리가 1612년에 그린 <무염시태>(로마 산타마리아 마조레 파울 교회 천장 벽화)에서 성모 마리아가 딛고 서 있는 달 표면은 울퉁불퉁하게 묘사됐다. 

16세기에서 17세기로 이어지는 서구의 근대과학혁명은 인쇄술에 의해 사실적이고 실증적인 시각적 이미지를 획득하게 됐고, 인쇄술을 통해 이런 이미지들을 접하게 된 사람들은 더 이상 종교의 눈이 아니라 과학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됐다. 그것이 바로 근대의 서막이었다. 비록 갈릴레이 갈릴레오가 천체를 관측해 펴낸 책 <별의 전령(Sidereus Nuncius)>에 수록된 달 표면 이미지는 그만 인쇄업자의 실수로 달 표면의 앞뒤가 거꾸로 인쇄되긴 했지만 말이다.

/전성원 계간 황해문화 편집장·성공회대 교양학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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