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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10일 일요일

진태원의 다시, 변혁을 꿈꾸다-정치적인 것의 사상사3--“소비에트 역시 맹목적인 ‘경제적 사고’에 빠졌다”

http://www.hani.co.kr/arti/SERIES/548/624359.html


카를 슈미트는 독일 바이마르공화국 시절 극심한 혼란을 극복하기 위한 이념적 대안으로 가톨릭주의를 제시한다. 당시 초인플레이션으로 돈의 가치가 극도로 떨어지자, 아이들이 지폐로 탑을 쌓으며 놀고 있는 모습.
진태원의 다시, 변혁을 꿈꾸다-정치적인 것의 사상사
1부. 러시아 혁명의 반향
1. 막스 베버: 근대성에 갇힌 러시아 혁명
2. 죄르지 루카치: 베버를 넘어-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
3. 카를 슈미트: 사회주의 혁명에 맞선 보수주의 선언
위르겐 하버마스는 사회과학 방법론 논쟁이 한창이던 1964년 제15차 독일 사회학 대회 연설에서 카를 슈미트(1888~1985)를 막스 베버의 “정당한 제자”라고 불렀다. 그때 그의 동료 학자 하나가 정당한 제자라기보다는 “사생아”라고 부르는 게 좋을 것이라고 제안했고, 하버마스는 이를 받아들였다.
슈미트는 베버의 정당한 제자일까, 사생아일까? 이것은 베버만이 아니라 슈미트의 위상을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상이하게 답변할 수 있는 문제일 것이다.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아마도 이단적인 제자라고 하는 것이 더 나을 것으로 보인다. 죄르지 루카치와 마찬가지로 슈미트는 베버 사상에 내재하는 한 경향을 물려받았지만, 그것을 스승에 맞서 발전시켰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슈미트는 저서 여러 곳에서 베버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고 있다. 그는 베버의 1919년 1월 ‘직업 및 소명으로서의 정치’ 강연 당시 청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그의 대표작 중 한 권인 <정치신학>(1922)의 처음 세 장은 원래 베버 기념 논문집에 기고된 글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존경심은 늘 유보와 이견, 비판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베버에 대한, 더 나아가 당대의 정치적·지적 상황에 대한 슈미트의 견해가 가장 포괄적이고 솔직하게 표명되고 있는 저작은 1923년에 출간된 <로마 가톨릭주의와 정치 형태>라는 짧은 책이다. <헌법이론>(1928)과 <대지의 노모스>(1950) 같은 대작이나 <정치신학>, <정치적인 것의 개념>(1927) 같은 강령적인 저술에 비하면 이 책은 슈미트 연구자들이나 일반 대중에게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고 있지만, 베버와 슈미트의 관계 및 1920년대 초 슈미트의 지적·정치적 입장을 이해하는 데 한가지 열쇠를 제공해주는 책이다. <로마 가톨릭주의…>는 베버의 핵심적인 사회학 테제, 곧 근대 사회의 합리화에 관한 테제를 승인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정치적 가톨릭주의의 관점에서 변용하려고 시도한다.
슈미트는 베버를 좇아 <로마 가톨릭주의…>에서 “자연과학적·기술적 사고방식이 오늘날의 사상을 깊이 지배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근대 사회를 지배하는 경제적 사고의 문제점은 그것이 ‘즉물적’이라는 점, 곧 기술적 수단의 합리성에 주목할 뿐 그러한 수단이 봉사하는 목적 자체의 합리성에는 맹목적이라는 점이다. “경제적 사고는 기술적 수단을 제공하면 모든 것과 조화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의 세계상은 기업가의 세계상과 쌍둥이다. 양자 모두 산업적으로 발전되고 기술적으로 자동화된 사회를 이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슈미트는 가톨릭주의에서 자본주의적·자유주의적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다. 도구적 합리성에 맞설 수 있는 다른 합리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더욱이 슈미트에 따르면 10월혁명을 통해 수립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역시 그것이 주장하는 바와 달리 자본주의를 변혁하기는커녕 자본주의 사회를 지배하는 경제적 사고에 매여 있다. “프롤레타리아의 세계상은 기업가의 세계상과 쌍둥이의 한쪽과 다른 쪽처럼 비슷하게 닮아 있”으며, “위대한 자본가는 레닌과 결코 다른 이념을 갖고 있지 않다.”(<로마 가톨릭주의…>) 이는 양자 모두 철저하게 경제적 사고를 위해 투쟁하며, 양자 모두 “전화(電化)된 사회”, 곧 산업적으로 발전되고 기술적으로 자동화된 사회를 이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카를 슈미트.
프롤레타리아의 세계상은
기업가의 세계상과 쌍둥이다
양자 모두 산업적으로 발전되고
기술적으로 자동화된 사회를
이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또한 베버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에서 자본주의 정신의 기원을 발견함으로써 근대의 세속화되고 합리화된 문명에 내재한 종교적 뿌리를 드러냈던 것처럼, 슈미트 역시 근대 사회가 탈종교적이고 세속적인 외양을 띠고 있지만, 여전히 철저하게 신학적인 기반을 지니고 있음을 강조한다. 단 베버에게는 자본주의적인 합리성의 역사적 기원을 밝히는 것이 문제였다면, 슈미트에게는 근대 국가 및 정치의 신학적 모체를 드러내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다. “현대 국가론의 중요 개념은 모두 세속화된 신학 개념들이다.”(<정치신학>)
이러한 차이점은 당대의 정치적·지적 정세에 대한 슈미트의 인식에서 비롯된다. 슈미트는 당시의 유럽 사회를 지배하던 기술적·경제적 사유를 극복하는 데 자유주의적 관점은 근원적으로 무기력하다고 간주했다. 이러한 기술적·경제적 사유 양식은 근대 문명에 일종의 세속화된 종교, 곧 ‘사적인 것의 종교’를 산출했는데, 자유주의는 바로 이러한 사적인 것의 종교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베버가 이야기한 각각의 개인들이 섬기는 신이란 이러한 사적인 것의 종교의 이론적인 표현일 뿐, 근대 자본주의의 합리화 경향을 극복하기 위한 길이 될 수는 없다. 실제로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고 난 후 독일에서 설립된 바이마르 공화국이 지속적인 혼란에 빠져 있었고, 베버를 비롯한 자유주의 정치 세력이 이러한 혼란을 극복하는 데 거의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슈미트가 자유주의 관점을 불신한 것은 나름대로 근거가 있는 셈이다.
오히려 슈미트는 가톨릭주의에서 자본주의적·자유주의적 한계를 넘어설 가능성을 발견한다. 그것은 가톨릭교회야말로 현대의 자본주의적 기업 형태와 양립 불가능한 어떤 것이며, 경제적 사유에 고유한 도구적 합리성에 맞설 수 있는 또 다른 합리성의 형태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때 슈미트가 제안하는 가톨릭주의는 매우 특이한 형태의 가톨릭주의라는 점, 곧 법적이고 제도적인 형식을 본질로 삼는 가톨릭주의라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가톨릭주의는 “경제의 절대적인 물질성과는 대조적으로 탁월하게 정치적”인 것이다. 그 이유는 정치적인 것은 권위에 기반을 두고 있고 권위는 이념에 대한 파토스(열정)을 요구하는데, 가톨릭주의야말로 당대의 자본주의나 사회주의에 결여되어 있는 이념들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념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대표’라는 이념이다.
슈미트가 이해하는 대표는 자유주의적 의미의 대표 개념인 대리(Vertretung), 곧 개개의 선거인에 대한 대리와는 구별되는 개념이다. 오히려 대표는 “전체 인민에 대한 대표”를 뜻하며, 이로 인해 선거인에 대하여 독자적인 위엄을 갖게 된다. 이러한 위엄은 “개개의 선거민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민에게서 나오는 것”(<로마 가톨릭주의…>)이다. 오직 이러한 대표 개념에 입각할 경우에만 “다종다양한 이해와 당파를 통일하는” 진정한 통일체, 곧 “모순적인 것들의 복합체”를 사고하는 것이 가능하며, 진정한 의미의 주권적 결정이 가능하게 된다. 반면 자유주의는 “예수냐 바라바냐는 물음에 대해 회의의 연장을 발의하거나 조사위원회를 설치하자는 제안”(<정치신학>)을 하는 데 그친다.
그런데 현대의 대중 민주주의의 발전은 토론과 공개성에 입각한 자유주의적 의회주의의 기반 자체를 무너뜨렸다. 대중 민주주의에서는 토론보다는 사회적 또는 경제적인 권력 집단으로서 서로 대립하는 파당들이 중요하며, “정당들 사이의 협상에서 이익들과 권력 획득을 둘러싼 목적의식적인 계산”(<현대 의회주의의 정신사적 상황>)이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의 노동평의회 역시 대표자들은 “명령적 위임”(mandat imp<00E9>ratif)에 의해 생산자가 그 대표성을 취소할 수 있는 대리인이며, 생산 과정을 관리하는 사용인에 불과”하다고 본다는 점에서는 경제적·물질적 사유에 지배되고 있기는 매한가지다.
따라서 혼란에 빠진 바이마르 공화국을 구하고,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와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미하일 바쿠닌이라는 이름으로 집약되는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적 무신론의 위협으로부터 유럽의 문명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정치적인 것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다. 이를 위해 슈미트는 예외상태라는 시각에서 국가의 정당성과 주권의 본질을 다시 규정하게 된다. 한스 켈젠이 대표하던 법실증주의는 오직 정상적인 상황에서만 작동하는 법 규범에 근거를 두기 때문에, 비역사적이고 탈역사적인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법, 그리고 더 나아가 국가의 정당성은 “예외상태를 결정하는/예외상태에서 결정하는”(<정치신학>) 주권자의 결정 능력에 근거를 두고 있다. 정치적 위기와 사회적 무질서가 횡행하는 헌정 위기의 시기에는 유일한 주권자의 초법적인 결정만이 국가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이다. 슈미트의 주장은 비상사태를 선언할 수 있는 대통령의 권한을 규정한 저 유명한 바이마르 헌법 48조를 반영한 것이었는데, 1933년 바이마르 공화국이 몰락하게 된 원인 중 하나를 제공한 것도 바로 이 조항이었다.
슈미트가 대중 민주주의를 불신한 이유는 그것이 “즉각적인 이익과 격정에 의존하는 선전 기관을 통해 획득되는” 대중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베버가 프롤레타리아는 사유할 줄 모른다고 생각했듯이, 슈미트에게도 인민대중은 조작과 선전의 대상일 뿐, 정치적 주체는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역사의 주체로 칭송받고 다른 한편으로는 조작의 대상으로 불신받는 인민대중의 문제를 진지하게 사유하는 과제는 이탈리아의 젊은 마르크스주의자에게 넘겨진다.
진태원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인문한국 연구교수, 사진 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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