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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26일 화요일

"六堂 가족사, 6·25 때 비극으로… 맏아들·딸 잃고 막내는 越北" /조선일보 최보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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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堂 최남선'의 長孫 최학주씨]

"육당이 쓴 '기미독립선언서' 현재 두 장만 남아 있고
친일파가 작성했다는 주장에 문화재 지정 무산돼"

'조국의 역사와 문화를 혼자 맡은 것처럼 걱정하고
신분 명예를 顧念 않으니 확실히 暗愚 그것이었다'

미국서 방문한 최학주(74)씨는 육당 최남선(六堂 崔南善·1890~1957)의 장손이다. 그를 만나기로 했을 때 망설임이 없지 않았다.

근대 최초의 종합 잡지 '소년(少年)' 창간과 '해(海)에게서 소년에게'로 알려진 육당의 생애는 '친일파'로 마감됐다. 또 '친일파'의 변명을 들어야 하는가 싶었다.

"육당이 정말 친일(親日)했는지 따져보자고 온 게 아닙니다. 육당이 고서 번역과 조선어사전 편찬을 위해 설립했던 '조선광문회' 건물 복원을 위해서 왔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3·1 운동 모의가 이뤄졌고 '독립선언서'가 조판됐습니다. 이는 육당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최학주씨는“조선광문회는 일제강점기에 나라를 구하려는 조선 지식인들의‘양산박’같은 곳이었다”고 말했다.
 최학주씨는“조선광문회는 일제강점기에 나라를 구하려는 조선 지식인들의‘양산박’같은 곳이었다”고 말했다. /이명원 기자
―'조선광문회'라는 명칭은 참 오랜만에 듣는군요.

"'수호지(水滸誌)'에 나오는 호걸들의 소굴인 '양산박'처럼, 일제강점기 시절 나라를 구하려는 조선 지식인들의 양산박이었습니다. 서울 청계천 광통교 앞에 위치했지요. 제가 미국으로 건너간 1967년까지도 있었어요. 목조 2층 건물이고 지붕은 약간 푸른색 도는 기와였는데 법률사무소 등이 들어서 있었어요. 그 뒤 도로 확장 공사를 하면서 허물어버렸어요."

―당초 조선광문회는 누구 소유였습니까?

"제 증조부(육당 부친)의 살림집에 딸려 있었습니다. 증조부는 중국과의 한약재 수출입과 농력(農曆·농사달력) 판매로 막대한 부(富)를 이뤘어요. 요즘으로 치면 삼성가(家)였지요. 육당이 와세다대학을 다니다 '신문화운동'을 하겠다며 중도에 돌아오자 증조부는 지금 환율로 모두 200여억원을 대줬어요. 그때 육당은 17세였습니다. 이듬해 최초의 잡지 '소년'(1908년)이 창간됐고요."

―육당이 사업을 시작한 게 17세였다고요?

"조숙했던 거죠. 일본에서 인쇄기와 기술자를 들여와 출판 사업을 했습니다. 당시 출판이 가장 앞선 미디어였던 셈이지요. 하지만 조선총독부의 검열로 육당이 냈던 잡지 '소년' '청춘' '동명'은 폐간되곤 했지요. 엄청난 빚으로 1930년대에는 집안 재산을 거의 다 날렸어요. 그 무렵 조선광문회 건물도 넘어갔을 겁니다."

―조선광문회에서 '독립선언서'가 만들어졌다는 건 솔직히 저도 몰랐습니다.

"거기서 인쇄소로 넘겨 2만여장을 찍었다고 합니다. 지금 유일하게 남은 것은 두 장입니다. 월탄 박종화 선생이 생전에 하나 갖고 있던 걸 독립기념관에 기증했고, 제가 할아버지 유품에서 한 장을 발견했어요."

 육당 최남선.
 육당 최남선.
―'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朝鮮(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언)하노라…'로 시작되는 '독립선언서'는 육당의 작품이지요?

"육당이 스물아홉 살에 쓴 것이지요. 1997년 문화재청은 '독립선언서'와 '백범일지'를 문화재로 지정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민족문제연구소 등이 '친일파가 작성한 것을 문화재로 지정할 수 없다'며 들고일어나 무산됐어요. '백범일지'만 문화재가 됐어요."

―육당은 춘원 이광수(1892~1950)와 함께 친일파의 상징적인 인물이 됐습니다. 육당의 친일(親日)은 1928년 조선총독부가 식민 사관 유포를 위해 만든 '조선사 편수위원회'에 들어간 것으로 시작되는데.

"일제 학자들이 사실(史實)을 조작하고 일방적으로 조선 역사를 꾸미려고 할 때 육당은 직접 참여해 해결하려 했던 것입니다. 일제 학자와 격한 논쟁을 벌인 기록도 나옵니다. 육당은 무엇보다 단군(檀君)을 역사적 실재 인물로 조선사에 편입하려고 했습니다."

―육당은 조선총독부 산하 자문 기구인 중추원의 참의를 맡기도 했지요?

"임명은 됐지만 한 번도 거기에 나간 적이 없었습니다. 육당이 총독부에 협조하고 거래를 한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친일의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조선의 장래에 필요로 하는 문화와 역사 연구를 위해 그렇게 선택했던 것이지요. 뒷날 육당은 '조선사편수위원, 중추원 참의 이것저것 구중중한 옷을 열 벌 갈아입었으면서도 나의 일한 실체는 일관되게 민족정신의 심토(深土), 조국역사의 건설밖에 없었다'고 진술했지요."

―누구든 자기 합리화를 할 수 있으니까요. 춘원과 비교하면 어떤가요?

"육당은 끝까지 '창씨개명'을 안 했어요. '학병(學兵) 권유 연설'을 친일의 증거로 내세우지만, 당시 그 연설을 들었던 장준하·김준엽 등의 증언이 있습니다. 육당은 '천황을 위해 죽어라'는 말을 안 했습니다. 살아서 돌아와 새 나라의 일꾼이 되라, 전쟁에 나가 군사 기술을 배우고 오라는 것이었지요."

―춘원의 후손과 만난 적은 있습니까?

"육당과 춘원은 같은 시대를 풍미했지만 후손끼리 교류는 없었어요. 2006년 뉴욕에서 이광수 소설 '무정'의 영역판 출판기념회에 초대받아 그때 처음 춘원의 아드님을 만났어요. 저를 반갑게 맞아주셨어요. 저보다는 한 세대 위이고 연배가 훨씬 높았어요."

그는 1964년 서울대 공대를 졸업하고, 3년 뒤 미국으로 건너갔다. 제약 회사에서 신약 특허와 관련된 업무를 해왔다. 그는 지금껏 미국 시민권을 갖지 않았다. "시민권을 딸 때 미국 국기 앞에서 충성 서약을 해야 하는데 거짓말을 하기 싫어서였다"는 것이다. 그는 2011년 '나의 할아버지 육당 최남선'이라는 책을 쓴 적이 있다.

"세상이 할아버지에 대해 너무 모르고, 알고 있는 내용도 터무니없었어요. 저는 육당이 돌아가실 때까지 8년간 함께 지냈어요. 그분의 장손으로서 육당이 남긴 글과 집안에서 들은 내용을 토대로 사실적인 기록을 남기고 싶었지요. 하지만 육당의 진실에 대해 가장 강력한 증거는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됐을 때 제출한 '자열서(自列書)'일 겁니다."

 '六堂 최남선'의 長孫 최학주씨(오른쪽).
―'자열서'는 피의자의 진술서 격인데, 자신의 변명에 가깝지 진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걸 평가하는 것은 우리 몫이겠지요."

나는 '자열서'를 읽어봤다. 예상 밖에 문장은 힘 있고 당당했다. 자신을 친일로 몰아가는 세상 앞에서 자조(自嘲)를 내비치기도 했다. 그 뒷부분은 이렇다.

'조국의 역사와 문화를 혼자 맡은 것처럼 걱정하여서 신분 명예의 어떻게 됨을 고념(顧念)하지 않고 그때그때의 가능한 이것저것을 하겠다고 날뛴 것이, 이미 세간 일류(一流)의 총명한 사람들의 몸을 사리고 가만히만 있음에 비하여 확실히 암우(暗愚·몹시 어리석음) 그것이었다. 그 험난한 애로를 겨우 뚫고 나오니까 기다리고 있는 것이, 내 반역의 영상을 그려내는 대명경(大明鏡·거울)일 줄을 암우한 내가 어찌 염도하였을까(念到·생각이 미쳤을까).'

육당이 감옥에 갇혔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나 있을 때 6·25가 발발했다.

―당시 춘원은 납북이 됐는데, 육당은 용케 피신했던 모양이지요?

"육당이 4남매를 뒀어요. 제게는 삼촌이지만. 이 중 막내 삼촌 최한검은 동경제대를 나온 좌파 계열 인사였습니다. 인민군들이 내려왔을 때 서울시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어요. 그 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북으로 퇴각하면서 춘원 등 사회 저명인사들을 끌고 갔습니다. 그 시점 육당은 감자 한 자루를 들고 산속으로 숨었어요. 막내 삼촌이 신호를 보냈던 것으로 봅니다."

―그 막내 삼촌은 어떻게 됐습니까?

"인민군들과 함께 북으로 올라간 뒤로 영원한 이별이 됐습니다. 북한 방송에 나왔을 정도로 거물급이었어요. 1957년 육당이 돌아가시자 그가 북한에서 전문(電文)을 보내 동경제대 일본인 친구 두 명에게 대신 조문하도록 했어요. 이들이 숙모에게 그의 편지를 건네줬어요. 6·25가 터지기 바로 두 달 전에 결혼했다가 헤어진 겁니다. 숙모가 방 윗목에 앉아 수건이 질펀하게 울던 장면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막내 삼촌의 그 뒤 소식은?

"김일성 사후(死後) 숙청돼 함경도 청진에서 살았어요. 극심한 식량난을 겪던 '고난의 대행군' 시절에 삼촌은 두만강을 건너 옌볜(延邊)으로 식량을 구하러 나오는 일이 있었고, 이때 숙모와 연락이 됐던 것 같습니다. 숙모가 옌볜으로 돈을 부쳐주곤 했지요. 그 시점 미국에 살던 나도 삼촌과 대여섯 시간 통화를 했어요. 삼촌을 구해주기 위해 가려고 하니 '올 시기와 자리가 아니다'고 거절했어요."

―육당의 맏아들인 선생의 선친은요?

"서울대 의대 교수였는데 적(赤) 치하에서 의용군으로 징집됐어요. 이 때문에 서울이 수복되자 모친이 경찰서에 붙들려가 고문을 받았어요. 선친은 전쟁 중에 36세로 병사했어요. 6·25 때 육당의 가족사는 비극으로 점철됐어요."

육당의 큰딸은 인민군에 의해 처형됐고, 사위는 납북 과정에서 행방불명됐다. 그 시절 어린 손자 하나도 잃었다.

"그뿐만 아니라 부산 피란을 갔다가 집에 돌아와 보니 17만권 장서(藏書)가 다 타버린 겁니다. 1951년 중공군이 서울에 들어왔을 때 이뤄진 미군의 대공습으로 말입니다. 육당은 '깊이 보관해둔 게 결국 화장터를 준비한 것인가'라고 통곡했어요."

그런 비극 속에서 육당은 여생을 '조선역사사전' 편찬 작업에 매달렸고 1957년 지병으로 숨졌다. 장례식에 참석한 장준하(1918~1975)는 잡지 '사상계(思想界)'에 '육당 최남선 선생을 애도함'이라는 글을 썼다.

'한때 선생의 지조에 대한 세간의 오해도 없지 않았다. 선생의 본의는 항간에 떠도는 요동부녀(妖童浮女)들의 억설과는 전면 그 궤를 달리하는 것이다. 우리는 해방된 후에도 선생에게 영광을 돌린 일이 없고 그 노고를 치하한 일도 없었을 뿐 아니라 도리어 욕된 일이 적지 아니하였다.'

일제강점기의 상황과 사실을 알려고 하지 않을 때 맹목적인 비판으로 쉽게 빠지게 된다. 육당과 춘원에 대한 평가가 대표적인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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