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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29일 금요일

황현산 “다르게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주간경향 박상미 문화평론가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505261843511&code=116


‘현명한 어른’으로 나이 먹으려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가. 첫 만남에서 가장 여쭈어보고 싶었던 질문에 대해 황현산 선생은 ‘꼰대’가 되지 않는 방법을 간단히 정리해 주셨다. “늘 책을 읽고 다른 사람 말을 듣는 연습을 하라. 결국은 삶의 태도가 민주적이어야 한다. 나이라는 권력으로 쇠한 것을 메우려고 하면 안 된다. 나이가 들수록 듣는 연습을 해야 하고, 토론을 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그게 바로 노망든 것이다. 좀 다르게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배우기를 그치지 말고 참신하게 생각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다르게 사는 법을 배우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합니까.
“가장 중요한 게 책을 읽는 것입니다. 내가 금년에 칠십인데, 요즘은 책을 잡으면 그 책의 저자는 거의 나보다 젊은이들입니다. 고전작가라 하더라도 그가 나보다 젊었을 때 쓴 글이지요. 제가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선언’을 번역했을 때, 육순 노인이 왜 20대 젊은 애의 글을 번역했느냐는 질문을 받았어요. 브르통이 살아 있다면 지금 100살도 넘었죠. 어떤 아름다움, 어떤 진실이 늙건 젊건 한 지성을 통해 생성되고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나보다 어린 애들이 쓴 글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문제가 시작됩니다.”

책을 읽지 않기 때문에 많은 문제가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책을 많이 읽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오래 전에 손에서 책을 놓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면서 여전히 지식인 행세를 하지요. 지금 야권이 힘을 못 쓰는 원인의 하나도 거기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서점에 가보면, 고전이나 인문학 책은 인기가 없고 자기계발서들이 베스트셀러 가판대를 점거하고 있습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이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고전이라고 하는 것은 인류문명이 자리를 잡기 시작할 때 나온 책들이거든요, 고전은 생산성이 굉장히 높습니다. 인생 전반에 관한, 세계 전반에 관한 문제를 고전은 다루고 있기 때문에 깊이 있고 폭넓게 생각할 수 있게 하고, 창조적인 능력을 길러준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자기계발서는 그 당시 사회가 요구하는 사안들, 오직 눈앞에 있는 문제, 눈앞에 놓여 있는 욕망, 눈앞에 있는 사회의 요구와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까. 고전이라는 것은 인간 자체가 자유롭게 되기 위해서 읽는 것이고, 계발서는 대개의 경우 인생의 노예가 되기 위해서 읽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꼭 읽어야 할 책을 권해 주십시오.
“제가 꼭 읽으라고 권하는 책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입니다. 살아 있는 자기를 어떻게 성찰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그 책 속에 가장 잘 드러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국의 방랑 학자 패트릭 리 퍼머가 쓴 펠로폰네소스 남쪽 오지의 답사기 <그리스의 끝, 마니>도 추천합니다. 발칸반도의 역사, 문명, 문화를 정말 치밀하게 쓴 책입니다. 저도 서양학을 공부한 사람인데, 내가 서양에 대해 아는 게 무엇이었던가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최근에 나온 클라우디오 마그리스의 <다뉴브>도 좋습니다. 이 책들은 피상적인 지식에 머물지 않고 현상을 깊이 들여다보는 책들입니다.”

인문학 책은 안 팔리는데, ‘인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인 토크쇼, 콘서트에는 사람들이 몰립니다.
“모든 학문과 생각 체계는 자기들의 삶의 전통과 삶의 과정 속에서 만들어집니다. 식민지 경험 때문에 한국인들에겐 모든 게 강제적으로 주입되었습니다. 이게 실제로 우리에게 아주 큰 상처이지요. 가장 중요한 건 근대화를 자주적으로 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식민지를 통해서 근대화된 게 아주 큰 비극입니다. 자주적으로 자기 삶을 개선할 기회를 빼앗겼습니다. 밖으로부터 온 것이기에 어떤 충격만 받으면 옛날로 돌아가려는 성향이 있어요. 민주화 운동 하는 사람이 족보 따지고, 진보적인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학연·지연 따지는 모습을 저는 너무 많이 봐 왔습니다. 자유·평등의 개념이 내 삶 속에서 성장한 것이 아니니까 헛것으로 떠돌 뿐입니다. 인문학 열풍도 마찬가집니다. 지젝이 한마디 하면 다 그리로 쏠려가고…, 간단한 외부적 충격만 있어도 갈피를 못 잡고 휩쓸려 갑니다. 자기 경험을 통해서 이해하는 게 중요합니다. 이를테면 지젝의 이론을 공부했으면 그 이론을 자기 경험 속에서 이해하고 그 이해를 넓혀 또 다른 자기 사고로 확장시켜야 합니다.”

자기 경험 속에서 이해하고 이해를 넓혀야만 나의 학문, 나의 생각이 되는 것이군요. 천천히 읽고 자주적으로 깊이 생각해야겠습니다. 그렇다면 공부하는 사람은 어떤 마음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우리가 부품 같은 걸 맞출 때 딸그락 소리가 나면서 아귀가 맞지 않습니까? 시를 번역하고 해석할 때도 잘 번역하면 그런 소리가 납니다. 그렇지 못하면 뭔가 이상하고 불안하죠. 모든 학문이 그럴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읽는 게 맞느냐? 이해가 안 되면 마음에 걸려야 하는데, 자기합리화하고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게 버릇이 되면 안 되지요, 늘 민감해야 합니다. 마음에 걸리면 항상 다시 찾아서 공부하는 성실함, 부지런함이 필요합니다.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기는 어렵습니다. 위험한 자기합리화에 맞서려면 엄중한 자기검열을 해야 합니다. 자기검열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용감해져야 하고, 이런 자질을 연마해야 합니다. 공부하거나 글을 쓰거나 그런 자세로 해야 합니다. 모든 분야가 다 똑같아요.”

아폴리네르를 주제로 석사 논문을 쓰면서 5년 동안 그의 전집을 읽고 논문을 쓰셨다고 들었습니다. 학문하는 사람으로서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공부하는 사람 개인의 자세가 가장 문제이지만, 공부를 하고 싶어도 사회에서 낙오되는 것이 두려워서 빨리 논문을 쓰고 졸업을 서둘러야 합니다. 학자들은 논문을 많이 써야만 하는 대학의 평가구조 때문에 좋은 논문을 쓰기 어렵습니다.
“제가 석사학위 논문을 쓰는 데 5년이 걸린 것은 그의 전집을 읽지 않고 논문을 쓴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서 5년 동안 그의 글들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능력이 모자라니 시간이 오래 걸린 것입니다. 하지만 많이 읽으면 생각할 시간이 많아지는 장점이 있습니다. 요즘 젊은 연구자들을 보면 정열도 많고 공부도 열심히 합니다. 다만, 대학의 제도가 문제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학위에 대한 개념도 옛날과 달라졌고, 논문에 대한 인식도 달라진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석사건 박사건 일정한 능력을 갖추고 논문을 합격하면 독립된 연구자로 인정했는데, 요즘은 학위 논문이 졸업장과 같고, 논문을 쓰는 것이 졸업절차가 돼버렸지요. 또한 한국의 연구실적 평가는 양적 평가에 치중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연구자가 자기 학문의 신념을 가지는 것이 예전보다 어렵습니다. 학문할 용기를 내기가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철학과, 독문과, 불문과에 이어서 국문과, 문예창작학과가 없어지거나 콘텐츠, 미디어 등의 이름을 조합해서 인문학 계열학과들을 통·폐합하고 있습니다. 대학의 이런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것은 고등학교의 직업교육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과에서 무엇을 배우는지 모르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선 콘텐츠니 뭐니 영어로 이름을 붙이면 학생들이 지원을 많이 합니다. 대학은 기업이 요구하는 인재를 양성한다고 그러는데, 기업이 요구하는 인재가 인문학과에는 없다고 생각하고, 기업이 요구하는 인재는 왜 경영과나 경제과를 나와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기업가나 정부나 권력자들이 가지고 있는 인식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대학이 기업화되면서 이런 문제들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고등학생들만 대학에서 무엇을 배우는지 모르는 게 아니라, 대학총장마저도 대학의 인문학과에서 무엇을 배우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은 게 문제인 것 같습니다.”

대학은 취업학원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일까요.
“모든 게 깊이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대학에서 깊이 있게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을 배워야 하는데, 교수도 학생도 그걸 피해온 것입니다. 공부를 안 하고 현상에만 머물러 있지 말고 내공을 쌓고 공을 들여야 합니다.”

깊게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치지 못하는 대학의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노인뿐만 아니라, 대학생들 중에도 세월호 이야기가 지겹다고 말한 학생이 40%가 넘는다고 합니다. 4·19 정신, 5·18 민주화 항쟁에 관한 내용을 수업에서 다루어도 예전과 같은 관심이 없습니다. 심지어 일베 활동을 하는 대학생들도 꽤 있습니다.
“사물의 현상 밑으로 내려가서 탐구할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되면 모든 게 다 지겨워집니다. 어떤 사태의 깊이를 파악하는 건 힘이 드는데 일베가 되면 그 힘이 면제됩니다. 일베는 젊은 날의 덫이 되기 쉽습니다. 그들을 가만히 보면, 사람들에게 싸움을 시킴으로써 정말로 지탄받아야 될 사람들이 피해가는 문화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어떤 이념 속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데, 그것이 엉성한 이념일수록 더 매혹적입니다. 생각하기 싫어하는 사람들, 생각을 겁내는 사람들은 말도 안 되는 생각 하나를 붙들고 무슨 짓이든 하려고 하는데 그 사람들이 바로 일베인 것 같습니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자신감이 없고 비열하기 때문에, 여자와 같은 약자들을 학대하는 데서 가장 손쉬운 패악질을 발견합니다. 패거리 의식은 이 약자 괴롭히기를 이데올로기로 만들고, 옆에서 부추겨주는 사람이 있으면 급기야 애국질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떤 패악질도 두려워하지 않지만, 혼자 남으면 자괴감에 빠집니다.”

왼쪽부터 황현산 선생과 딸 황은후씨, 아들 황일우씨.

우리가 일본을 대할 때에도 논리적인 대응을 못하고 ‘애국심’이라는 명분하에 감정적인 대응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과 일본의 과거사 문제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 얘기해보고 싶습니다.
“며칠 전 아들과 삼청공원에 산보를 갔다 오다가 택시를 탔는데, 네팔 지진 얘기가 나오니까 기사님이 일본이 저렇게 망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조금만 합리적으로 생각해보면 일본이 망해서 우리에게 도움되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감정적인 문제가 너무 많이 결부되어 있어요. 이것은 일본인, 한국인 모두에게 해롭습니다. 과거를 정확하게 기술해야 합니다. 일본인들 입장에 서서 한국문제뿐 아니라 2차대전 때 열강과 일본의 관계도 생각해 보아야죠. 미국, 러시아와 같은 열강과의 관계에 대해서 일본도 할 말이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일본 입장에서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객관화를 안 시키니까 그렇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과거라는 게 무엇입니까. 과거에 대한 현재의 일본은 과거의 일본에 대한 주체이기도 하고, 과거를 딛고 일어선 타자이기도 하죠. 주체이면서 동시에 타자인 것이 과거입니다. 타자로서 객관화시켜 보면 많은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러나 일본과 한국은 그걸 못했습니다. 이런 문제를 잘못 말하면 친일파로 몰립니다. 양국이 과거를 객관화시킬 줄 알아야 하는데, 우리와 동양인들 대부분이 과거를 객관화시키는 데 서툽니다. 이것은 과학적 사고능력의 부재 때문입니다. 모든 문제에 선입관과 감정이 앞서면 토론이 불가능합니다. 과거의 문제로 일본의 사과를 요구할 필요가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사실을 인정하기만 하면 됩니다. 국가와 민족을 떠나, 순전하게 사람의 입장에서 그 죄를 객관화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죄악의 객관화에 한국보다도 오히려 일본 미래의 행·불행이 달려 있습니다.”

국민과 소통하지 못하는 대통령의 말하기 방식을 두고 ‘유체이탈화법’이라고들 합니다. 지도자의 화법은 어떠해야 하고, 어떤 수련을 해야 합니까.
“지도자의 말하기 방식은 논리적으로 문법에 맞아야 합니다. 그게 가장 중요합니다. 또한 그 말에는 진심이 담겨야 합니다. 그 두 가지가 안 되면 유체이탈화법이 되는 것입니다. 논리적인 문법으로 정확하게 말하면 국민들은 알아듣습니다. 무슨 소린지 모를 말을 우물거리고는 못 알아듣는다고 타박해서는 안 됩니다. 그건 남의 말, 남의 글을 듣지도 읽지도 않고 자기 말만 하는 사람의 전형적인 증상입니다. 권력자는 가장 저열한 한국어를 뱉어놓고 어디서 얻어들은 조각 지식으로 선생질을 하려 듭니다. 권력을 갖게 된 게 현명해서 가진 게 아닙니다. 대개 권력 가진 사람은 자기가 똑똑하다고 속는 경우 많습니다. 그러면 본인과 다른 사람들 모두가 불행해집니다.”

논리적으로 문법에 맞게 말하고, 글을 잘 쓰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합니까.
“먼저 상투어를 안 쓰면 글을 잘 쓰게 됩니다. 상투어를 안 써야만 상투적 문장형식, 상투적 표현방식을 피할 수 있지요. 번역도 글쓰기입니다. 단어나 문장을 보고 ‘이것은 상투적인 말’이라고 판별할 수 있으면 번역도 잘하고 글도 잘 쓰게 됩니다. 예를 들어 ‘달이 떴다’라는 문장에서 ‘달이 휘영청 떴다’ 이렇게 번역하는 번역자들이 있어요. 이것은 감각이 부족한 것이죠. 글을 많이 쓰지만 잘 쓰지는 못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글을 못 쓴다는 자각이 없습니다. 습관에 젖어 있기 때문이지요. 글의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는 말을 성찰한다는 것입니다.”

글을 잘 쓰면 번역을 하라고 말씀하신 글을 읽었습니다.
“번역을 하다 보면 상투적인 것에 대한 판별력이 늘어납니다. 자기한테 주어진 모국어, 언어를 최대한으로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고 훈련이 됩니다. 번역은 외국어에 서툰 사람을 위해 대체 텍스트 만들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한국어로 셰익스피어를 번역한다는 것은 한국어로 셰익스피어를 읽게 하는 일이기 전에, 한국어 ‘안’에 셰익스피어가 있게 하는 일이지요. 셰익스피어를 번역하기 전과 후의 한국어는 다릅니다. 저는 제자들에게 글을 쓰거나 번역을 할 때, 단어 하나하나를 엄격하고 자유롭게 쓰라고 말합니다. ‘엄격하게’는 그 뜻과 용법에 맞게라는 뜻이고, ‘자유롭게’는 인습적 문맥을 벗어나 새로운 문맥, 새로운 문장 환경에서 그 뜻이 완벽하게 발휘되게 하라는 뜻입니다. 자기 안에 있는 모국어를 최대한으로 활용하는 글쓰기가 번역입니다.”

초현실주의가 전공이신데, 현대문학에 미친 초현실주의의 영향은 무엇일까요. 또 그것을 잘 보여주는 한국 작가는 누구인가요.
“초현실주의는 1950년대에 사망선고를 받은 문예사조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초현실적인 성질을 가진 것은 문학과 특히 미술에서 계속 살아남았죠. 문학에서는, 특히 시의 경우에 있어서는 초현실적이라는 말과 시적이라는 말이 거의 같은 말로 쓰이다시피 합니다. 이 초현실주의가 가지고 있는 상상력 원칙은 문학·회화에서 여전히 살아남아 있고, 굉장히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젊은 시인들이 대개 거기에 속한다고 생각을 하구요, 남자들은 대부분 사회적으로 주어진 이데올로기에 충실합니다. 여자들의 경우는 사회에 길들지 않고 그걸 뛰어넘는 어떤 것이 있습니다. 특히 한국의 여성 시인들 시에 초현실주의적인 경향이 나타나 있습니다.”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선언>, 스테판 말라르메의 <시집>, 기욤 아폴리네르의 <알코올>, 드니 디드로의 <라모의 조카>를 번역하는 대작업을 끝내셨는데요, 신문 칼럼도 쓰셔야 하고, <잃어버린 장갑> 동화도 완성하셔야 하니 무척 바쁘실 것 같습니다. 앞으로는 어떤 작업을 하실 계획이신가요.
“보들레르 <악의 꽃>, 랭보 전집과 로트레아몽 전집, 말라르메 전집 등을 번역하는 데 시간을 쓸 것입니다. 동화는 그 한 편만 완성할 것이고, 신문 연재도 올해로 끝낼 것입니다. 저만이 할 수 있고 저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책들을 번역하는 데 집중해야만 합니다.”

담도암 수술을 받은 후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 선생 곁에는 도예가 아내와 아버지를 무척 닮은 아들과 딸이 있었다. 아버지와 작은아버지(문학평론가 황정산)처럼 문학을 전공했으리라고 예상했으나 아들은 경제학자가, 딸은 연극배우가 되었다. 아들 황일우씨(미국 마이애미대학교 경제학과 교수)에게 아버지 황현산 선생에 대해서 물었다.

“학자로서의 아버지는 ‘무리하지 않되, 꾸준히 공부하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항상 강조하세요. 학교에서 늦게까지 회식이 있어도 집에 오셔서는 꼭 한두 시간은 책상 앞에 앉아 공부하신 후 주무시는 모습을 보면서 컸습니다. 현실세계를 명확하게 분석하면서, 동시에 더 나은 세상에 대한 믿음을 가지는 철학을 몸소 보여주셨죠. 저는 마음속에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이 항상 있었어요. 아마 무의식적으로 제 글을 아버지의 글에 비교하게 되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덜 무서운 이과를 택하게 된 것 같아요. 아버지는 항상 젊고 유연한 태도를 유지하시고, 식구끼리는 항상 농담을 주고받습니다. 말이 잘 통하는 좋은 선배 같아요.(웃음) 최근엔 맥북에어 사용법을 익히시느라 열심이십니다. 충고보다는 직접 당신의 삶의 태도를 통해 가르치는 분이십니다.”

딸 황은후씨는 대학로 나온씨어터에서 5월 말까지 공연하는 <그리스의 연인들> 3부작에서 마지막 작품인 ‘페드라’의 주연인 페드라 역을 맡아 열연 중이다. 라신느 원작의 ‘페드라’를 재미있게 재창작하는 데 성공한 작품으로 입소문을 타고 있다. 식구들은 은후씨의 공연을 다녀왔지만 선생은 오랜 시간 앉아서 공연을 관람할 자신이 없어서 가보지 못했다고 하셨다. 아쉬움과 미안함이 얼굴에 드리워졌다. 오늘 은후씨의 공연을 보고, 진솔하고 생생한 감상을 써서 보여드리겠다고 약속했다.

황현산 선생을 만나고 깨달은 게 있다. 자기 검열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감한 자세를 가져야 하고, 공부는 수도승이 수련하는 것처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선생은 공부도 글쓰기도 수도승의 마음으로 하는 사람이었다. 학자의 깊은 사유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서 읽는 이의 다층적 사고를 유도하는 그의 문체는 수도승과 같은 마음가짐으로 공부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수도하는 마음으로 학문에 평생을 바친 사람은 정직하고 겸손했다. 녹음해 온 선생의 목소리를 글로 옮길 때 나도 모르게 의자 위에서 무릎을 꿇게 된 이유다.

<박상미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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