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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26일 화요일

'인문학, 이젠 일상이다' <상>지식 습득에서 삶의 문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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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서울시는 노숙자 대상 인문학 강좌를 개설했다. 근본적인 성찰을 통해 우리 삶을 돌아보자는 취지였다. 그렇게 시작된 ‘인문학 대중화’에 최근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관 주도에서 시민 스스로, 지식 습득에서 삶의 문제 해결로 진화하고 있다. 그 현장을 점검했다. 인문학 공부 모임의 본고장 북유럽도 다녀 왔다.

부산 남천동의 청소년 인문학 서점인 인디고 서원. 인문학 토론 청소년 모임인 ‘정세청세(정의로운 세상을 꿈꾸는 청소년, 세계와 소통하다)’의 아지트다. 지난 14일 모임에 참가한 아이들. [부산=송봉근 기자]

서울 동교동 삼거리 부근 주택가에 있는 현(玄)디자인연구소. 샛노란 대문이 인상적인 단독주택을 사용하는 이 연구소는 번듯한 상품 디자인을 제작하지 않는다. 2009년 문을 연 지 5년째, 10명 남짓한 디자이너들이 인문학 공부에 매달리고 있다. 물론 디자인 실기·이론 공부와 함께다.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의 저서, 『논어』, 동양 철학자 김용옥의 『맹자』·『중용』 해설서 등이 이들이 주로 읽는 책이다. 이런 공부를 통해 인문학의 깊이가 느껴지는 디자인, 한국 전통 문화의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디자인을 세상에 내놓는 게 연구소의 목표다.

 디자인과 인문학.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영역의 조합은 최경원(46) 소장의 반성에서 비롯됐다. 서울대 산업디자인학과 86학번인 그는 “1990년대 초반 대학원을 다닐 때 한국 디자인의 척박한 현실에 눈떴다”고 했다. 최 소장에 따르면 한국의 디자이너들은 창조적 역량을 쌓을 겨를이 없다.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제품 디자인만을 요구받기 때문이다. 겉모습만 괜찮은 디자인을 만들다 보면 정작 중요한 상상력은 차츰 고갈된다. 그러다 40대에 들어서면 퇴출이다. 최 소장은 “입학 동기 중 아직도 디자인 일을 하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다. 심지어 고깃집을 운영하는 친구도 있다”고 했다.

 최 소장은 유럽의 디자인 강국으로 눈을 돌렸다. 디자이너 양성 과정 안에 자국의 전통 문화(인문학)를 자연스럽게 습득하도록 하는 데 주목했다. 인문학 소양이 탄탄한 유럽의 디자이너들은 연륜이 쌓일수록 매력적인 디자인을 선보였다. 최 소장이 연구소의 제자·후배들과 함께 인문학 공부를 선택한 이유다.

 ‘인문학 대중화’의 지형도가 바뀌고 있다. 인문학은 팍팍한 현실을 되돌아보는 성찰의 한 방식으로 대략 2000년대 후반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외환위기가 양산한 노숙자를 위한 인문학 강좌를 서울시가 개설한 게 2008년이다. 당시 인문학 강좌는 서울시 같은 지자체나 대학 등 교육기관이 주도했다. 요즘은 다르다. 시민 스스로 인문학 공부 모임을 결성한다. 뜻맞는 사람들이 모여 관심 있는 분야의 전문 강사를 초빙한다. 단순한 지식 습득 차원에서 벗어나 각자 당면한 삶의 문제 해결에 인문학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것도 달라진 점이다. 현디자인연구소처럼 말이다.

 2007년 결성된 대전시민아카데미도 비슷한 경우다. 공동대표인 신명식(54)씨는 치과 개업의다. 그는 대학 때는 운동권, 졸업 후에는 대전 지역의 시민운동에 관여했다. “어느 순간 시민운동의 활동마저 정체되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그래서 택한 게 인문학 공부 모임이다. 세상 속에서 개인의 위치와 세계관은 물론 사회 전반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느껴서다. 신씨는 은퇴한 시민운동가, 지역 언론인 등 7명과 함께 1년 동안 준비해 아카데미를 발족했다.

 아카데미는 한 달에 5000원 내지 1만원을 내는 회원들의 회비로 굴러간다. 프랑스 소설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읽기 모임, 과학사 특강 등 한 달 평균 10개 이상의 강좌가 개설된다. 현재 회원 수는 300명 정도다. 강사 중 상당수가 강사비를 받지 않는 재능기부를 한다.

 실제 인문학 대중화의 확산 추세는 어느 정도일까. 빅데이터를 들여다 봤다. 다음소프트에 의뢰해 2008년 1월부터 2013년 6월까지 네이버 등 국내 블로그 2600만 개에 올라온 포스트 4억8000만 건을 분석한 결과 인문학에 대한 관심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었다. ‘인문학’이 언급된 블로그 글은 2008년 1월 10만 건당 18건이었다. 올해 6월에는 28건, 지난 4월에는 34건을 찍기도 했다. <그래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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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관어 순위는 더 의미심장하다. 인문학이 언급된 글 중 연관어 순위를 뽑아본 결과 2008년부터 2011년까지는 ‘지식’이 부동의 1위였다. 하지만 지난해와 올해는 ‘삶’이 1위에 올랐다. 지식은 2위로 밀렸다. 삶이 지식을 밀어낸 것이다. 인문학을 단순히 지식 습득이 아니라 삶의 문제와 관련해 받아들인다는 얘기다.

 이런 현상에 대해 표정훈 한양대 기초융합교육원 교수는 “답답한 현실을 바꾸는데 자기개발서 등이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느낀 사람들이 보다 근본적인 답을 얻기 위해 인문학에 관심을 갖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이택광 경희대 영미문화전공 교수는 “80년대 학부생, 90년대 대학원생 중심의 세미나 공부 모임이 2000년대 들어 직장인들의 인문학 공부 모임으로 바뀌고 있다”고 분석했다.

 인문학 공부는 청소년층에도 확산 중이다. 부산의 청소년 토론 모임인 ‘정세청세(정의로운 세상을 꿈꾸는 청소년, 세계와 소통하다)’는 매달 한 차례 토론모임을 연다. 입시 지옥에서 잠시 벗어나 삶의 가치나 인생의 목표 등 학교에서 좀처럼 나눌 수 없는 주제에 대해 토론한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인문학 서적을 접한다. 정세청세는 2007년 부산에서 시작됐다. 지금은 전국 20개 도시에서 동시에 토론회가 열린다. 전국적으로 수 백 명의 중·고등학생이 참가한다.

 자생적인 인문학 대중화 확산 현상은 상당 기간 지속될 전망이다. 4대 국정기조의 하나로 문화융성을 강조한 새 정부가 특히 정신문화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지난 25일 발족한 문화융성위원회는 산하에 5개 전문위원회를 둔다. 그 중 하나가 인문정신문화 전문위원회다. 현장 전문가를 끌어들여 구체적인 정책 수립에 활용할 계획이다.

 이택광 교수는 “생활여건을 개선하는 것만이 복지가 아니다. 복지의 한 분야로 인문학 공부 모임들에 대한 적절한 지원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표정훈 교수는 “자유로운 공부 모임들이 과연 얼마나 안정적으로 지속될 수 있느냐가 관건”이라고 했다.

글=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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