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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9일 토요일

강남 스타일’만 주목받아야 하나요/제프리 케인 | 글로벌포스트 한국 수석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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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잘나가는 레스토랑을 여는 비결이 여기 있다. 일단, 무난한 전략은 판에 박힌 듯한 이탈리아 음식점을 여는 거다. 주위 환경과 어울리든 말든 요란하고 튀는 모습일수록 좋다. 인테리어는 강남에서 잘나가는 레스토랑과 대충 비슷하게 만들면 된다. 몇 년만 지나도 곧 흐름에 뒤처진 모양새가 될 테지만 그런 건 상관없다. 낭만적인 데이트를 하러 연인들이 찾는 곳이라 해도 정통 재즈나 잔잔한 음악을 틀어서는 안된다. 강남 스타일로 맞춘 듯 차려 입은 손님들에겐 모호하지만 뭔가 있어 보이는, 패션쇼 스탠딩 파티에서 틀어줄 법한 라운지 음악이 어울린다. 그래야 “여기는 쿨한 곳! 당신도 쿨한 사람!”임을 강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 한 가지 더. ‘셀카봉’을 충분히 휘두를 수 있을 만큼 넉넉한 공간을 제공할 것.

세련된 외관만 갖추었다면 음식의 질은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정성을 다해 요리를 준비하는 진짜 셰프를 고용하는 데 드는 비용을 줄이자. 그래서 서울에 이탈리아 레스토랑이 그토록 많아도 정통 이탈리아식 닭요리나 생선요리를 내놓는 곳은 도통 찾아볼 수가 없나보다. 괜찮다. 이탈리아 요리 중에서도 가장 쉽게 만들 수 있는 파스타랑 피자만 내놓으면 그만이다. 인터넷에 올라온 요리법만 보고도 손쉽게 만들 수 있는 메뉴이긴 하지만 어차피 옆집에서도 같은 메뉴를 팔고 있는데 뭐 어떤가. 전혀 조화가 안 맞는 토핑이 유행을 선도해 한 집 건너마다 ‘시저 샐러드 피자’ 같은 낯선 메뉴가 올라올 때도 있다. 그리고 가장 맛있는 메뉴가 아니라 가장 이득을 많이 안겨주는 메뉴 옆에 ‘베스트’ 혹은 ‘추천’이란 딱지를 붙여놓으면 된다. 편의점에서 사온 떡볶이를 전자레인지에 후딱 돌려서 1만8000원에 파는 것도 어쩌면 가능하지 않을까? 치즈를 잔뜩 얹어서 르크루제 냄비에 근사하게 담아 내기만 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찍어 먹을 수 있는 꿀도 함께 제공한다면 금상첨화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강남 정신’이다. 영혼 없는, 네 맛도 내 맛도 아닌 맛. 강남은 다양성을 집어삼키고 옹기종기 아름답던 골목길에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은 메뉴를 제공하는 이탈리아 레스토랑을, 카페를, 고만고만한 안주가 나오는 술집을 토해놓는다. 이렇게 자가증식하는 흐름을 아무도 막을 수가 없다. 유럽에 있는 자부심 높은 이탈리아 레스토랑이나 프랑스 레스토랑에선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없다. 결코 단순한 비교를 하려는 게 아니다. 내 말은, 언제나 “빨리빨리”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는 한국형 ‘맛집’에서는 영혼을 찾기가 힘들다는 얘기다. “아, 여기도 ‘강나마이제이션(Gangnamization)’ 되어버렸네!” 내가 항상 내뱉는 탄식이다. 나는 한국에 수년째 살며 모든 걸 집어삼키는 ‘강남화’의 손아귀에서 도망치려고 무던히도 애를 써왔다. 

하지만 강남화는 이제 우리 동네 해방촌까지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의 마수를 뻗쳐왔다. 젠트리피케이션이란, 저소득층이 많이 살던 장소가 소위 ‘힙스터의 성지’로 뜨면서 정작 원래 살던 주민들은 올라간 집값 때문에 동네를 떠나야 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홍대 인근, 삼청동 일대가 이 과정을 거쳤고 해방촌도 이제 그 과정 속으로 편입된 듯하다. 이제 해방촌엔 더 이상 한식을 파는 데도 없고, ‘버거 스트리트’에서 팔던 햄버거는 장인정신을 잃은 지 오래며, 레스토랑에 밴드를 불러 느긋하게 연주를 듣던 풍경도 사라졌다. 피자집 앞에 늘어선 줄은 길어져만 가고 가격은 오르는데 음식 질은 나날이 떨어진다. 그래서 나는 점심 때마다 분식집에서 김밥을 사먹는다. 그게 훨씬 만족스럽다.


물론 이런 현상이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1968년 주한 미 대사 그레고리 헨더슨은 <소용돌이의 한국정치>라는 책에서 조선시대 이후 사람들은 중앙집권체제의 중심에 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고군분투해왔다고 했다. 여기에 빗대어 문화적인 측면에서, 나는 그 중앙집권체제의 중심이 바로 ‘강남’이라고 생각한다. 강남이란 소용돌이 속으로 홍대 일대며 이태원, 그리고 해운대까지 빨려들어갔고, 마침내 이 흐름은 동네 인디문화까지 싹 다 갈아엎어버리고 말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단지 젠트리피케이션의 문제일 뿐만이 아니다. 강남화는 일종의 ‘잔머리’를 동반한다. 강남식 혁신은 오래된 것을 부수고 최신 중의 최신으로 갈아치우는 행위로 정의된다. 지역 고유의 미감과 역사적 유산, 거기에서만 나올 수 있는 영감은 가차없이 소용돌이에 휘말려 사라진다. 영혼을 느낄 수 없는 뻔한 것들만 남는다. 전 세계 어디에서든 일어나고 있는 현상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한국에서는 특히 그 양상이 극단적이다. 그래서 슬프다.

진정한 예술성은 세대를 뛰어넘어 지속된다. 사상가와 장인, 진지한 고민을 거쳐 세상에 뭔가를 내놓은 사람들의 힘으로 문화가 형성되고 이들은 서로의 작업에 영향을 주고받으며 계속해서 그 문화를 발전시켜 간다. 그런 창조성은 단지 소비하고 소비되는 데서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평범한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 그리고 외로움에서 뭔가가 탄생한다. 한국에서 내가 감동받았던 순간들은 다른 데에 있지 않다. 포장마차 아줌마가 무심하게 턱 하니 내놓은 안주가 기막히게 맛있을 때, 택시 안을 직접 만든 장식물로 주렁주렁 꾸미고 승객을 태우는, 조금 괴짜 같지만 자기 일을 사랑하는 기사 아저씨를 만났을 때, 나는 감동했다.

왜 강남 스타일에서는 그런 영혼을 느낄 수 없는 걸까? 거기에서 나온 음악과 예술, 요리는 대기업과 재벌이 만들어 이식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더욱 슬픈 것은 이런 경향이 창의성과 도전정신을 고갈시킨다는 점이다. 내가 사랑하는 한국의 친구들이 강남의 소용돌이에서 탈출해, 한국만의 문화와 역사에 자부심을 느끼고 세계에 이를 보여주는 날이 오기를 나는 진심으로 갈망한다.

<번역 | 구정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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