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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15일 일요일

[민병희가 만난 사람 3] 홍천여고 서현숙·허보영 교사, 그리고 100개의 동아리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ss_pg.aspx?CNTN_CD=A0002367827&PAGE_CD=N0002&CMPT_CD=M0142
얼마 전 업무협약 때문에 만난 한 출판사 사장이 말을 건넨다. "강원도 고등학교에서 독서교육이 아주 잘 이루어진다고 들었습니다." 짐짓 기분이 좋았다가 무슨 이야기인가 자세히 알아봤더니 홍천여고가 그 주인공이었다.
2년 전, 책을 좋아하고 이야기를 좋아하는 두 선생님이 한 학교에서 만나 손을 잡았다. 이제는 학교 어디서든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학생들이 넘쳐난다. 누구 하나 책 읽으라고 강요하는 사람은 없지만, 점심시간이면 학교 도서관은 학생들로 붐빈다. 만나는 아이들마다 밝고 자신감이 넘친다. 홍천여고에서 쉽게 만나는 풍경이다.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선생님들은 참 많지만 우리나라 고등학교에 독서의 즐거움을 느끼는 학생들은 드문 것이 현실이다. 이 상황에서 만난 홍천여고의 특별함, 그 비결을 알고 싶었다.


자율 독서동아리가 100개?

선생님을 꿈꾸는 친구들이 모인 '쌤쌤', 학교에서 쉼의 시간을 만들어보자며 뭉친 '쉼표', 공연예술 분야 진로를 희망하는 친구들끼리 인생의 장면을 채워나가자며 만든 '씬넘버'......
각각의 개성으로 뭉친 학생들의 동아리 소개를 듣는데 모두가 책 읽고 토론하는 독서동아리라는 사실이 흥미롭다. 홍천여고에는 이렇게 4~6명의 학생들이 모여 자발적으로 만든 독서동아리가 100개가 넘는다. 

"동아리를 만든 이유도 가지각색이예요. 그냥 친해서, 수다 떨다 마음이 맞아서, 좋아하는 것이 같아서, 하고 싶은 일이 비슷해서... 함께 읽고 싶은 책을 정하고, 책 읽고 만날 약속을 정하고,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죠. 함께 나눈 이야기는 때로는 글이 되고, 그림이 되고, 영상이 되고, 사진이 돼요." (서현숙 선생님)


홍천여고의 독서프로그램은 동아리뿐만이 아니다.
선생님 1명과 학생 4명이 짝을 이뤄 원하는 주제 도서를 읽고 추억을 쌓는 5인의 책 친구, 책을 읽고 파티 하듯 토론하는 인문학독서토론카페, 더 깊이 읽고 싶은 친구들을 위한 심화프로젝트 독서토론과정, 언니가 동생들을 이끄는 독서토론리더과정, 함께 낭독하며 감동을 느끼는 낭독이 있는 저녁, 선배들이 후배들을 위해 마련한 언니들의 북토크...

이 모든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서현숙, 허보영 선생님은 하나의 원칙을 강조한다.
"홍천여고의 모든 독서 프로그램과 교육과정은 '함께 읽기'와 '독서 토론'이라는 철학에 따라 일관되게 진행해요. 그것이 저희가 지켜온 원칙이죠."


'함께 읽기'와 '독서 토론' 원칙 아래 돌아가는 세 바퀴

홍천여고의 독서교육이 더욱 의미 있는 이유는 교육과정과 연계해 전교생 모두가  참여하고, 더 나아가 함께 '즐기는' 문화로 자리매김 했다는 것이다.

"우리 학교 독서교육에는 세 바퀴가 있어요. 첫 번째 바퀴는 국어수업 시간에 돌아가요. 책을 같이 읽는 방법, 그리고 같이 읽는 즐거움을 전교생이 모두 수업시간에 배웁니다. 두 번째 바퀴는 배운 것을 가지고 놀 수 있는 다양한 '놀이판'에서 돌아갑니다. 독서동아리는 그 중 하나죠. 학교에서 진행하는 독서프로그램은 모두 저희가 깔아주는 놀이판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놀이판이 많으면,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친구들과 함께 놀게 됩니다. 비유를 하자면, 화투의 원리를 가르쳐주고 나서, 고스톱도 치고, 민화투도 치고, 패도 띌 수 있는 판을 다양하게 만들어주는 거죠. (웃음)"


독서교육에 열정 넘치는 선생님이 있더라도, 특정 수업에서 머물거나 동아리 중심의 행사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보면 원래 책 읽기 좋아하는 소수 학생 중심으로만 교육이 이루어져 아쉽게 느껴진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전교생이 참여하게 만드는 홍천여고 독서교육의 마지막 세 번째 바퀴는 무얼까?

"마지막 세 번째 바퀴는 사람(사이의 관계)에서 돌아가요. 관심사가 같은 친구들과 어떤 책을 읽을지 상의하고, 선배들의 동아리 운영 경험을 들으며 자신감과 아이디어를 얻죠. 선생님과 선배들이 이끌어주고, 친구들과 함께 즐기다 보면 그 관계 속에서 독서에 대한 사랑이 샘솟게 되는 것 같아요. 독서교육을 하기에 학교만큼 좋은 곳이 또 있을까요?"


내실 있고 지속적인 독서교육을 위한 '독서교육부'

각자 다른 학교에서 열정적인 독서교육을 펼쳤던 서현숙, 허보영 선생님은 2년 전, 그동안 하고 싶었던 것을 미친 듯 해보자며 홍천여고에서 만났다.

"그때 정말 열렬한 마음이었어요. 전입교사라고 상황을 지켜볼 여유가 없었죠. 오자마자 수업 시간 독서토론을 가르치고 동아리를 홍보하고... 당시 교감 선생님께서 저희가 너무 특이했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1년이 지나서야 저희가 미친 듯이 하는 일의 의미를 알고 이해하게 되셨다면서요. (웃음)"

일 년 동안 책을 갖고 놀 수 있는 다양한 놀이판을 만들었더니, 학교는 독서교육 담당자를 두 명으로 늘려주었다. 그리고 올해는 아예 '독서교육부'가 만들어졌다.


"올해는 정말 뜻 깊은 해입니다. 처음으로 1학년에서 3학년까지 국어시간에 모두 독서토론 수업을 진행했거든요. 국어 선생님들이 뜻을 모으고 독서교육부가 생긴 것이 큰 힘이 되었어요. 학생들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독서교육의 중요성과 의미를 함께 깨닫게 되는 것 같아요."

"사실 독서교육을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학교 현장에서는 곁다리 업무 정도로 여기는 경우가 많잖아요. 남다른 사명감이나 애정을 가진 선생님들도 이런 상황에서는 슈퍼맨이 아닌 이상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죠. 학교에서 독서를 중요한 업무로 존중해주는 풍토가 만들어지면 좋겠어요."

기적의 비결, "즐기면서 재미있게 하기"

세상에 아무리 많아도 지나침이 없는 중 하나가 도서관이라고 했다. 특히, 홍천여고처럼 책이 좋아서, 이야기가 좋아서, 사람이 좋아서 찾는 도서관이 많아지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2년 전까지 홍천여고 도서관도, 여느 학교처럼 점심시간 학습실 역할에 머물렀을 뿐이다. 학교 도서관을 이렇게까지 변화시킨 두 선생님의 힘이 궁금했다.

"재밌어요. 저희들 스스로도 재밌고, 학생들도 재밌어하고, 또 하면 할수록 그 재미를 더 느끼게 되는 것, 그것이 원동력이 아닐까요? 싫은데 억지로 한다면 힘들겠죠. 싫은데 억지로 하는 학생들 보세요. 보는 것도 힘들잖아요.(웃음)"


"저 역시 힘들었다고 기억되는 시간은 없어요. 늘 즐겁고 신나게 했어요. 혼자가 아니라서 가능했던 것 같아요. 저희는 업무 협의와 사적인 이야기의 구분이 없고 늘 함께 놀듯 일하고, 농담하듯 회의해요. 무엇보다 저희 둘 다 10년 이상 교사 독서 동아리 모임을 하면서 스스로 독서토론의 즐거움을 체험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아이들이 좋아할 것이다'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 같아요."

공부의 재미를 깨우쳐준 친구들과의 독서토론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책 읽는 즐거움을 알게 됐다는 아이들. 일반계 고등학교 3년의 시간이 대학 진학을 준비하는 과정으로만 인식되는 현실 속에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아이들에게 책 읽는 즐거움, 책을 통한 발견과 새로운 만남을 선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예전에는 책 읽고 난 후 독후활동에 대한 부담감이 컸어요. 평가를 받아야 하는 압박감도 있었고요. 하지만 이제는 자유로워요. 우리가 읽고 싶은 책을 선정하고, 우리가 어떤 독후활동을 할지 정하죠."

"언제부턴가 모든 선택 기준 자체가 '대학 가는데 도움이 되는가'로 정해졌어요. 책도 대학 가는데 유리한 책을 판단하고 읽어야 하죠. 하지만 책을 읽고 자기 생각을 친구들과 나누는 기쁨을 알게 되면, 단순히 생기부에 써야겠다는 목표로 책을 읽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어요."


독서는 누구나 즐길 수 있고, 무엇보다 자신들을 성장시킨다고 믿는 학생들. 독서로 치열한 토론과 따뜻한 위로를 함께 나누며 세상에 대해 배운다는 아이들. 홍천여고 학생들이 말하는 '독서의 필요성'으로 이번 뜻깊은 만남을 마무리한다. 

"한 페이지를 갖고 친구들과 몇 시간씩 이야기할 때도 있어요. 제 생각과 친구들의 생각이 쌓여서 다양하고 깊이 있는 생각을 할 수 있어요."

"생활 속에 너무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편견들을 깨닫게 됐죠.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힘도 얻을 수 있어요."

"인터넷이나 SNS와는 달리 쉽게 잊어버리지 않아요.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고 무엇보다 오래오래 남아있어요."

* 추신 : 서현숙 선생님은, '우리학교 학생들이 얼마나 책읽기를 즐거워하는가?'라는 질문을 학교 독서교육의 평가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많은 학교가 참고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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