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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23일 월요일

영국--독서로 미래를 설계한다/경향신문 정원식 기자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60100&artid=201710222215005

영국 - 독서로 미래를 설계한다
‘책 읽기는 권리’로 인식 ‘독자 개발’…“매일 독서” OECD 1위
독자개발 전문가 톰 팔머(오른쪽)가 영국 클로이더로의 보랜드 하이스쿨에서 ‘풋볼 리딩 게임’을 진행하고 있다. 교사가 골키퍼를 맡고 이 학교 남학생이 키커로 나섰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할 일은 ‘풋볼 리딩 게임’이에요. 수업은 두 부분으로 나눌 거예요. 우선 질문 10개로 된 퀴즈 게임을 하고, 그 다음에는 여러분이 직접 이 앞으로 나와서 페널티 킥을 차볼 겁니다.”
‘풋볼 리딩(football reading).’ 말 그대로 축구와 독서다. 도대체 이 둘 사이에는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의문은 서서히 풀렸다. 
■ 풋볼 리딩 게임 
영국 북서부 랭커셔주의 작은 도시 클로이더로에 있는 보랜드 하이스쿨. 지난 7월 초 이곳을 방문했을 때 마침 강당에는 올해 입학한 7학년 학생 100여명이 모여 있었다. 학생들 앞에 선 이는 아동과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작품을 주로 써 온 작가 톰 팔머(49)다. 그는 6권짜리 ‘풋볼 아카데미’ 시리즈와 3권짜리 ‘럭비 아카데미’ 시리즈 등 스포츠를 소재로 한 소설을 주로 써서 특히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많다.k우선 여러분이 신문에서 즐겨보는 뉴스가 뭔지 궁금하네요. 모두 말해볼까요?” 학생들은 축구, 연예, 정치, 범죄, 만평 등 다양한 대답을 내놨다. “축구를 좋아하는 학생들이 많네요. 그럼 축구에 대한 퀴즈를 맞혀봅시다. 오늘자 신문들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최근 공격수 한 명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기사가 실렸어요. 맨유가 눈독 들이고 있다는 이 공격수는 누굴까요?”
한 남학생이 힘차게 손을 들고 말했다. “로멜루 루카쿠요.” “맞아요.” 박수가 터져나왔다. 이날 영국 매체들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프리미어리그 역사상 두 번째로 많은 이적료를 주고 벨기에 출신 공격수 루카쿠를 에버턴에서 영입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그는 탁자 위에 놓인 잡지를 집어 들었다. “저는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는 걸 좋아해요. 다른 나라 책이나 잡지에서 영감을 얻기도 하죠. 제가 손에 들고 있는 건 ‘풋볼 다이나모’라는 잡지예요. 어느 나라 잡지일까요?” 
미국, 포르투갈, 스페인, 영국이라는 대답이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심지어 중국과 한국이라고 대답한 학생도 있었다. 정답은 러시아다. 
팔머의 이야기에 흥미로운 듯 귀를 기울이던 학생들은 “제일 좋아하는 책이 무엇이냐”고 묻자 앞다퉈 큰 소리로 대답했다. <해리 포터> 시리즈부터 어린이책 작가 리즈 피숀의 <톰 게이츠> 시리즈까지 다양한 답이 나왔다. 
퀴즈가 끝나자 페널티 킥 게임이 시작됐다. 강당 앞에 미니 골대를 설치하고, 학생들이 공을 찬다. 실패하면 곧장 자리로 돌아가고,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과 골키퍼가 대결해 이기는 쪽이 트로피를 가져간다. 골키퍼는 교사가 맡고, 남녀 학생 10여명이 자원했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은 힘껏 공을 찼다. 성공할 때는 환호가, 실패할 때는 박수가 터졌다. 
팔머는 작가인 동시에 20년 경력의 독자 개발 전문가다. 청소년을 주된 대상으로 하는 그의 수업의 특징은 독서교육에 축구를 끌어들인다는 점이다. 
또 책이 아니라 신문과 잡지 같은 활자 매체 전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학생들에게 책을 읽어야 성적을 올릴 수 있다거나 책을 읽어야 좋은 인성을 기를 수 있다는 식의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즐겁게 읽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수업 내용이 흡족했는지 학생들도 적극적인 질문 공세를 이어갔다. 글을 쓸 때 어떤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는지부터 팔머 자신은 어떤 작가를 좋아하는지 물었다. 그중 한 학생은 “어떻게 작가가 됐느냐”고 질문했다. 
“제가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던 건 아니에요. 열일곱 살이 될 때까지는 책을 거의 읽지 않았죠. 작가가 된 건 어머니 덕분이에요. 어릴 때부터 축구를 정말 좋아했는데, 어머니가 축구와 관련된 신문이나 잡지를 주셨어요. 신문과 잡지에 실린 축구 관련 기사를 읽으면서 활자에서 즐거움을 얻는 법을 익혔고 그 뒤부터 책을 읽는 즐거움도 알게 됐지요.” 
팔머는 지금까지 1500곳이 넘는 학교에서 50만명 이상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진행해왔다. 지금도 일주일에 나흘 정도는 학교나 도서관 강연을 위해 전국을 돌아다닌다. 영국에는 팔머와 같은 어린이·청소년 책 작가들이 독자 개발 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다.
이 학교 도서관 사서 루스 도널드는 “영국 아이들은 초등 과정을 마치고 중등 과정에 진입한 이후부터는 책 읽기에 대한 관심이 크게 떨어진다”며 “독서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팔머를 초청했다”고 말했다. 

루크 펜들베리(왼쪽)는 체육 교사이면서 학생들을 위한 독서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다. 그가 독자개발 전문가 톰 팔머를 만나 프로그램 구상에 대해 상의하고 있다.
■ 축구로 책 읽기를 즐긴다 
루크 펜들베리는 사우스요크셔주 셰필드 소재 웨일스 하이스쿨 체육 교사다. 그는 2년 전부터 독서와 스포츠를 결합한 프로그램을 수업에 활용해 호응을 얻기 시작했다. 그가 개발한 것은 럭비를 이용한 ‘럭비 리더스 프로그램’.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학생들은 노트를 갖고 다니며 책을 읽을 때마다 간단한 내용을 기록한다. 책을 읽으면 점수를 받는다. 75점을 채우면 이 지역의 유명 럭비팀인 요크셔 카네기의 경기를 볼 수 있다. 프로그램은 정규 수업이 아니라 일종의 방과후 활동인데, 주목적은 11~13세 남학생들이 책을 읽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지난해에는 톰 팔머의 책 <오버 더 라인>(Over the Line)을 7학년 학생 수업에 활용했다. <오버 더 라인>은 제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실제 영국 축구 선수 잭 콕이 등장하는 소설이다. 펜들베리는 학생들에게 소설을 읽게 한 뒤 과제를 줬다. 책과 관련된 어떤 내용이라도 직접 표현하게 한 것이다. 전쟁을 소재로 한 시나 소설을 읽고나서 작가와의 가상 인터뷰를 작성해 발표하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트렌치코트를 입고 소설 속의 장면을 재연하기도 했다. 기대 이상으로 학생들이 열심히 참여했고 호응도 좋았던 터라 그는 축구와 독서를 접목한 또 다른 프로그램도 준비하고 있다. “남학생들이 책을 별로 읽지 않아요. 그런데 스포츠나 전쟁사 분야에 대한 글은 아주 좋아해요. 책이 따분할지 모르겠지만 거기 담긴 내용이 좋아하고 즐기는 분야라면 자연히 관심을 갖겠죠.”
남학생들이 여학생들에 비해 독서에 관심이 없는 것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영국의 경우에도 ‘PISA 2009 읽기 영역 성별 성취 조사’에서 남학생들의 점수가 여학생들의 점수보다 14점 낮았다. 영국국립독서재단은 그 원인을 학교의 독서활동이 남학생들의 성향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 남학생들이 독서를 남자답지 못한 일로 인식하고 있다는 데서 찾았다.
영국 런던의 공립 도서관 아이디어 스토어의 닐 스미스 팀장은 “9세가 넘으면 남자 아이들은 책 읽기를 그만두는 경향이 있다”며 “대신 축구를 하거나 비디오게임에 몰입한다”고 설명했다. 아이들은 대체로 20세가 되어야 다시 책을 손에 잡는다. 10년 가까운 독서 공백기가 발생하는 셈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 스포츠를 활용한 독서 교육이다. 현재 영국에서 상당히 보편화된 방식이다. 9~13세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프리미어리그 책 읽기 스타’(Premier League Reading Star)는 대표적인 인기 프로그램으로, 2003년부터 시작됐다. 프리미어리그를 대표하는 선수 20명이 각자 책을 추천하면 해당 저자들이 학교를 방문해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책 읽기 챔피언으로 선정된 학생들은 프리미어리그 경기를 관람하고 축구선수를 직접 만날 수 있다. 현재는 2000여개의 학교가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지난 2월 은퇴를 선언한 잉글랜드 축구 대표팀의 프랭크 램퍼드는 2014년 3월26일 첼시 홈구장에서 청소년 30명을 초청해 축구퀴즈 수업을 했다. 그는 아이들에게 “책 읽기는 누구에게든 즐거움이어야 하고 프리미어리그 책 읽기 스타는 아이들이 독서를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검증된 방법”이라고 말했다. 램퍼드는 축구를 소재로 한 12권짜리 아동용 모험 소설 <프랭크의 마법 축구>(Frankie’s Magic Football) 시리즈를 쓴 작가이기도 하다.
영국 축구재단과 영국 국립독서재단은 올해부터는 기존 프로그램을 확대한 프리미어리그 프라이머리 스타(프라이머리 스타)를 출범시켰다. 이는 독서만이 아니라 수학과 체육, PSHE(시민성·대인관계·건강관리·경제 등을 가르치는 시민교육 교과) 교육까지 포함시켰다.
■ ‘책읽는 권리’를 전파하는 교육  
영국은 독자 개발에서 가장 앞서 있는 국가로 평가된다. 독자 개발이란 교육을 통해 비독자를 독자로 만드는 것이다. <영국의 독서교육>을 쓴 김은하 책과교육연구소 대표는 “독서 인프라 자체는 북유럽이 더 좋지만 북유럽은 복지에 많은 돈을 쏟아붓는 사민주의 국가라는 점에서 한국과는 사정이 다르다”면서 “영국은 한정된 자원을 갖고 도서관, 학교, 지자체, 작가, 정부가 협업을 한다는 점, 그리고 그 협업의 방식이 매우 창의적이라는 점에서 참고할 만하다”고 말했다.
흥미로운 점은 책 읽기를 의무보다는 권리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 권리에는 읽지 않을 권리, 내용을 건너뛸 권리, 끝까지 읽지 않을 권리, 무엇이든 읽을 권리 등이 포함된다. 또 만화, 잡지 등 활자로 된 것도 합당한 독서로 간주된다. 책 읽기는 즐겁고 자발적인 일이어야 한다는 철학에서 이 같은 공감대가 형성됐다. 1990년대 도서관 사서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시작된 독자 개발 노력은 학교, 민간 독자 개발 단체 등으로 확산됐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2011~2012년 24개국 15만7000명(16~65세)을 대상으로 실시한 ‘국제성인역량조사’를 보면 독서 인구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는 스웨덴(85.7%)이었다. 다음으로는 에스토니아와 덴마크가 나란히 2위(84.9%)였다. 그 뒤를 핀란드(83.4%)와 노르웨이(83.2%)가 이었으며 영국, 미국, 독일이 공동으로 81.1%를 기록했다. 조사 대상 국가들의 책읽는 인구 비중은 평균 76.5%였다. 한국은 평균보다 낮은 74.4%였다. 
독서 빈도 조사에서는 영국이 다른 나라들을 앞선다. 영국은 ‘날마다 책을 읽는다’는 응답이 32.6%로 1위였다. 독서율 1위인 스웨덴의 경우 ‘날마다 책을 읽는다’는 사람의 비율은 26.1%였다. 한국은 독서율은 74.4%인 것으로 나타났지만, ‘날마다 책을 읽는다’는 사람은 조사 대상 국가 평균(20.2%)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8.4%에 불과했다. 

어린 자녀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것은 영국 젊은 아빠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영국 셰필드에 사는 제임스 클라크가 2년6개월 된 딸 로즈에게 책을 읽어주고 있다.
■ 독서는 가족의 침대에서 시작 
으깬 감자와 콩, 소시지, 당근이 차려진 식탁. 사우스요크셔주의 작은 도시 할리팍스에 있는 톰 팔머의 집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 식사를 마친 뒤 식탁을 정리하던 팔머의 아내 레베카(45)는 딸 아이리스(11)에게 “차를 좀 준비해 달라”고 부탁했다. 
아이리스가 차를 준비하는 동안 팔머는 최근에 딸이 읽고 있는 책을 가져왔다. 2014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말랄라 유사프자이의 이야기인 <말랄라>, 청소년 소설인 패트릭 네스의 <모어 댄 디스(More Than This)> 등 모두 6권이다. 레베카는 책을 넘기면서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리스가 여덟 살이 될 때까지 우리 부부는 매일 온갖 종류의 책을 읽어줬어요. 가족이 하루를 마무리하며 정서적 유대를 확인하는 시간이었죠. 맨 처음에 읽어준 건 흑백사진이 있는 그림책이었고, 다음은 고양이와 개가 나오는 그림책이었죠. 두 살 때 밤에 자동차로 어딜 가고 있었는데, 아이리스가 창밖의 달을 가리키면서 ‘달’이라고 말해서 깜짝 놀랐어요. 우리가 그 단어를 가르친 적이 없었거든요. 책을 보고 혼자 안 거죠. 정말 놀라운 경험이었어요.” 

영국 할리팍스에 거주하는 톰 팔머의 딸 아이리스가 어린 시절 읽던 책을 보며 즐거워하고 있다.
어릴 적 이야기가 나오자 이번에는 아이리스가 자신이 어릴 때 좋아했던 책 몇 권을 가져왔다. 어린이용 수학책 <마블러스 매스(Marvellous Maths)>, 동화작가 주디스 커의 고양이 책 시리즈 중 하나인 <모그 타임(Mog Time)> 등이다. 책장을 넘기는 아이리스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피었다. 7학년인 아이리스는 학교에 다니는 동안 서머 리딩 챌린지라는 프로그램에 매년 참여했다. “아주 재미있어요. 여름방학 동안 책 6권을 보면 상을 주는데, 한번은 일주일 만에 6권을 다 읽고 도서관에 책을 반납해서 왜 이렇게 빨리 읽었느나는 얘길 듣기도 했어요.” 
비영리 단체 리딩 에이전시가 전국 도서관과 학교에서 진행하는 서머 리딩 챌린지는 4~11세 사이의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독서 프로그램이다. 해마다 70만명 이상의 학생들이 참여해, 영국 내 독서 프로그램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주제는 해마다 달라진다. 올해의 주제는 동물 첩보원이었다. 홈페이지에서 선호하는 책의 종류와 자신의 나이 등을 입력하면 추천서 목록이 뜬다. 책을 한 권 읽을 때마다 동물 그림이 그려진 스티커를 받아 붙일 수 있다. 두 권을 읽으면 동메달, 네 권을 읽으면 은메달, 여섯 권을 다 읽으면 금메달을 받는다. 

영국 런던 아이디어 스토어 와트니 마켓 분관을 찾은 열아홉 살 리드완이 동생 어폰에게 책을 읽어주고 있다. 그는 동생의 미래가 책에 있다고 생각한다.
■ 아빠들이 중요하다 
영국 셰필드에 살고 있는 최향기씨(35)는 영국인 제임스 클라크와 5년 전 결혼했다. 2년6개월 된 딸 로즈와 12개월 된 아들 맥스를 두고 있다. 
최씨는 “요즘은 한국에서도 젊은 아빠들이 책 읽기를 해준다고 하지만 이곳에서는 아빠가 책을 읽어주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이른바 ‘베드타임 스토리’(bedtime story)다. 보통 오후 7시에 잠자리에 드는 아이들을 위해 자기 전 10~30분간 책을 읽어준다. 클라크는 매일 오후 6시50분부터 10분간 책을 읽어준다. 젊은 영국 아빠들은 한 세대 이전의 아빠들에 비해 육아에 적극적이다. 주말에는 아빠가 아이를 데리고 나와 주변 공원이나 도서관에서 함께 논다. 아빠 클럽 등 주말 아침 아빠들 모임이 지역마다 활성화돼 있다. 
60대인 클라크의 아버지 또래만 해도 남자들은 퇴근하면 펍에서 맥주를 마시며 축구를 보는 게 일상이었지만 지금 영국 아빠들에게 육아 참여는 ‘상식’이다. 최씨는 퇴근 후 클라크와 육아를 분담하고 주말에는 주로 클라크가 아이를 돌본다. 이 같은 환경이 형성될 수 있었던 데는 영국 직장인들의 퇴근시간이 한국보다 빠르다는 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감정평가사로 일하는 클라크는 올해 들어 오후 6시에 퇴근하고 있지만, 이전에는 오후 4시30분이면 퇴근했다.
최씨 가족은 10분 거리에 있는 토틀리 커뮤니티 센터 도서관을 자주 이용한다. 도서관에는 ‘서머 리딩 챌린지’를 비롯해 각종 독서 관련 프로그램과 모임을 안내하는 홍보 팸플릿이 빼곡하게 비치돼 있었다. 그는 “한국 도서관은 조용히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영국 도서관은 가족들이 함께 가서 노는 곳에 가깝다”고 설명했다. 

런던 리브레리아 직원 베시 포릿은 “책 읽기를 통해 다른 세상을 상상할 수 있다”고 말했다.
■ 책에서 찾는 미래 
런던 타워햄리츠구에 있는 공공도서관 아이디어 스토어 와트니마켓 분관. 어린이들이 모여 앉아 책 읽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한쪽에선 몇몇 그룹들이 책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토요일 오후마다 열리는 ‘가족 읽기 모임’ 수업이다. 한 그룹의 어린이들과 함께 있던 사서 마니샤 고시는 <아이 스파이 위드 마이 리틀 아이즈(I Spy with My Little Eyes)>라는 그림책을 펼치며 말했다. “푸른색이 있는 뭔가를 보고 있어요. 나는 지구상에서 가장 큰 동물이에요. 뭘까요?” 6살 난 자흐라가 “고래요”하고 답하자 고시는 “정말 고래인지 볼까”하며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커다란 고래 그림이 나온다. “정말 고래네! 참 잘했어요.” 고시는 “I spy with my little eyes” “Something that is blue” 등의 문장을 아이들이 반복해서 따라 읽게 했다. 발음과 문장 읽기 연습을 동시에 하는 것이다. 고시는 다른 두 권의 그림책 <어 그레이트 테디 베어(A Great Teddy Bear)>, <더 베리 헝그리 캐터필러(The Very Hungry Caterpillar)>도 같은 방식으로 읽어나갔다. 
영국 독서 교육에서 각 지역 공공 도서관은 핵심적 역할을 한다. 특히 이민자들이 많은 지역의 도서관은 지역사회 통합의 매개체 구실도 한다. 
아이디어 스토어는 도서관이라기보다는 주민을 위한 서비스센터에 가깝다. 타워햄리츠 내 5개 지역에 있는 아이디어 스토어는 연간 800개의 평생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컴퓨터 사용법, 이민자를 위한 영어 교실, 창업교실, 구직자를 위한 기술 훈련과 이력서 쓰기, 요가, 뜨개질 등 다양하다. 가장 최근인 2013년 문을 연 와트니 마켓은 주택 구입, 지방세, 주차 및 자동차 관련 문제 등 각종 민원 관련 업무를 처리하는 ‘원스톱 서비스’ 공간까지 지향한다. 
2016년 기준으로 30만4900명이 거주하는 타워햄리츠구는 2014년 기준으로 영국에서 아동 빈곤율이 가장 높은 지역이다. 방글라데시 출신 노동자들이 모여 살고 있기 때문이다. 도서관 서비스의 품질 수준 역시 런던 32개 자치구 중 최하위였다. 그러나 아이디어 스토어가 들어선 뒤 도서관 서비스 품질 수준은 런던에서 3위, 영국 전체에서 4위로 껑충 뛰어올랐다.
‘가족 읽기 모임’은 아버지를 포함해 온 가족이 책을 읽자는 취지에서 아이디어 스토어가 기획한 프로그램이다. 타워햄리츠구의 특성상 아버지의 참여는 저조하다. 방글라데시에서 온 이주민 가정의 남성들은 주로 식당이나 시장에서 임시 일용직으로 일하기 때문에 토요일이라고 해도 쉬지 않는 경우가 많다. 
자흐라의 엄마 주스나 이슬람(41)은 1960년대에 영국으로 이주한 방글라데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이주민 여성을 돕는 사회적 기업을 운영하고 있다는 그는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독서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올해 10살인 아들 이스마일은 독서광이다. 일주일에 책 8권을 읽는다. 주스나가 자랑하듯 열어 보여준 이스마일의 가방 안에는 책 6권이 들어 있었다. 주스나는 아들이 작가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역시 방글라데시 이주 가정 출신인 리드완 하크(19)는 토요일마다 이곳에 와서 4살짜리 동생 어폰에게 책을 읽어준다. 어폰은 형이 읽어주는 책 내용에 상상력을 보태 이야기를 지어낸다. 리드완이 동생에게 책을 읽어주는 이유는 그 자신이 독서의 힘을 체득했기 때문이다. 킹스칼리지에서 의학을 공부하는 그를 가르친 건 도서관과 학교다. 리드완의 아버지는 영어를 못 읽고 어머니 역시 영어를 읽는 게 능숙하지 않다. “저는 운좋게 좋은 선생님을 만났어요. 책을 많이 읽으면서 세계관을 확장할 수 있었고 여기까지 왔지요. 부모님은 여전히 바쁘시니 제가 동생에게 선생님 같은 역할을 해주고 싶습니다.” 
■ 위기를 극복하려는 노력 
2016년 발표된 영국 정부 통계에 따르면, 2016년 영국 공공도서관의 지출은 전년도의 9억4400만파운드(약 1조4500억원)에서 9억1900만파운드(약 1조4110억원)로 2.6% 감소했다. 6년간 영국 도서관 343개가 문을 닫았다. 8000개의 일자리가 사라진 것이다. 도서관 예산과 인력이 2007년 금융위기 이후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는 것은 영국 교육계에서 피부로 느끼는 위기다. 이 때문에 공공 도서관 역할을 학교가 흡수해 이어가려는 노력이 활발하다. 
스마트폰 등 디지털 첨단 기술이 점점 발달해 볼거리가 늘어나는 것도 독서를 방해하는 주된 요소로 작용한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청소년들이 스마트폰에 빠져드는 현상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런던에서도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쇼어디치에 자리잡은 독립서점 리브레리아의 시도는 그래서 화제가 됐다. 
지난해 생긴 이 서점은 스마트폰 사용 금지 등 ‘디지털 프리’를 선언했다. 정보과잉 시대에 아날로그적 문화 휴식공간을 표방한 서점 대표 로한 실바의 실험이 성공적으로 안착하면서 문화 관련 종사자들 역시 새로운 아이디어를 위해 고민하고 있다. 
리브레리아에서 일하는 베시 포릿은 “첨단 기술이 아무리 놀랍다고 해도 결국은 책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의도”라고 설명했다. 어려서부터 여러 독서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그는 “독서는 타인의 처지를 이해하고 지금과는 다른 나를 만들어주는 놀라운 경험”이라며 “이 경험에 익숙해지면 누구나 새로운 미래를 상상할 수 있다”고 말했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60100&artid=201710222215005#csidx6100d267cc223e08f18d4707cc6a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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