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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17일 화요일

오무라 마스오 인터뷰/ 백승찬, 소명출판의 오무라 마스오 저작집 시리즈


오무라 마스오 와세다대 명예교수(84)가 연구하는 한국문학은 한국에만 있지 않다. 그의 한국문학은 한국은 물론 북한, 중국 옌볜, 일본에도 있다. 오무라 스스로 붙인 이름은 ‘조선문학’. 동아시아 곳곳에 이산한 한국어 사용자들이 펼치는 삶과 글의 풍경이 오무라의 연구과제다. 넓지 않은 한반도 남부의 문학에 국한한 한국문학 연구자들에게 오무라의 선구적이고 넓은 지평은 신선한 충격을 준다. 
일본의 대표적인 한국문학 연구자 오무라 마스오의 저작집이 소명출판에서 나오고 있다. 지난해 윤동주 삶에 대한 <윤동주와 한국 근대문학>, 일제강점기 시인 김용제를 다룬 <사랑하는 대륙이여>가 나왔고, 최근 3~5권에 해당하는 <식민주의와 문학> <한국문학의 동아시아적 지평> <한일 상호이해의 길>이 출간됐다. 조만간 <오무라 마스오 문학 연구 앨범>이 나오면 전 6권 시리즈가 마무리된다. 평생을 조선문학 연구에 바친 오무라를 e메일로 만났다.
“나는 픽션보다는 실록에, 작품보다는 그 사람의 사는 길에 직접적인 관심이 있습니다. 작품은 그 사람을 아는 하나의 계기라고 생각합니다.” 
오무라가 눈길을 준 작가들은 작품 못지 않게 곡절한 삶을 살았다. 대표적인 이가 김용제다. 일제강점기 네 번 체포되고 4년간 옥살이한 프롤레타리아 시인 김용제는 어느 순간 일제에 투항해 적극적인 친일의 길을 걸었다. 사회주의와 친일이라는 두 가지 꼬리표를 붙인 김용제는 해방 이후 1994년 타계까지 한국에서 백안시된 인물이었다. 오무라는 “김용제는 대열 맨 앞에 서서 일본인들과 싸운 시인이었다”며 “전향했다 하더라도 그 공적을 지울 수는 없다”고 말했다. 오무라는 생전 김용제와 인터뷰하고 200통 이상의 서신을 교환해 그의 생애를 연구했다.
김용제가 식민지 시기 한국문학의 그림자라면, 윤동주는 빛이었다. 옌볜에서 돌보는 이 없이 방치됐던 윤동주의 묘를 다시 세상에 알린 이가 오무라다. 오무라는 유족이 갖고 있던 윤동주 친필 원고를 연구자 중 처음으로 보았으나, “한국인 학자가 발표할 때까지 기다려달라”는 유족의 요청을 이의없이 받아들였다. 옌볜 체류 시절 중국혁명가이자 조선족문학의 대가인 김학철과 교류하며 농밀한 녹취록을 만든 것도 그였다. 펑더화이, 김일성, 박헌영, 이태준, 한설야, 임화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김학철의 녹취록이 없었다면, 중국내 한인들의 투쟁사와 당시의 동아시아 정세에는 한 층의 안개가 더 덮였을 것이다. 그는 “조선문학을 제대로 하려면 한국문학만이 아니라 북한문학, 옌볜문학, 그리고 재일조선인문학까지를 포함하는 시야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조선문학에 대한 오무라의 관심은 어찌 보면 ‘비문학적’이었다. 대학원에서 중국문학을 전공했던 그는 청말 사상가 양계초의 일본 체류 시절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다. 양계초는 일본의 정치인이자 소설가인 도카이 산시의 정치소설 <가인의 기우>를 번역하다가 도중에 작업을 그만두었다. 양계초는 조선이 중국의 것이라 생각했는데, 도카이는 일본 것이라 했다는 이유다. 오무라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중국과 일본 사상가가 언급하지 않은 조선 사람의 생각은 무엇인가.
오무라가 연구를 시작한 1950년대 후반엔 일한사전조차 없었다. 그는 재일 조선인 유학생 동맹을 찾아 조선어를 배우자고 청했다가 문전박대를 당하기도 했다. 한영사전으로 간접적으로 한국어를 배워야했다. 조선문학은 중국문학에 비해 연구자가 적고 연구를 한다해도 책을 내줄 곳이 없었다. 그래도 오무라는 굴하지 않았다. 그는 “한국문학은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흥미로웠다”고 말했다.
1973년 처음 한국을 방문했을 때 오무라는 “내 조국이라 부를 수 없지만 사랑하는 대지”라고 말했다. 아무리 전공이라지만 미묘한 관계의 타국에 대해 이렇게 말할 ‘용기’는 어디서 났을까. 오무라는 “용기는 없었다. 솔직한 마음일 뿐”이라고 답했다. 
일본인 한국문학 연구자는 한국에서는 의심스러운 시선을, 일본에서는 냉소를 받았다. 남한과 북한 정부의 알력 때문에 연구가 연구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못한 적도 있었다. 일본 NHK에서 개설할 강좌 명칭을 ‘한국어 강좌’로 할지 ‘조선어 강좌’로 할지를 두고 남북을 대리하는 일본내 한인 단체가 일대 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문화운동과 학술활동은 정치에 휩쓸려 쉽게 뒤틀리곤 했다.

하지만 오무라는 “생각이 다른 사람과도 함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며 “남의 평가나 비판은 이후에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는 오무라가 일본의 한국문학 연구자라는 ‘극소수파’로서 얻은 긍정적이고 강인한 삶의 태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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