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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29일 일요일

공화/ 공화주의/ 共和/ res publ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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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2000년 동안 매달려 온 학술 현안을 한국의 학자가 해결했다. 갑골문자의 왕국 은나라를 멸망시킨 서주(西周)의 12왕 연대의 수수께끼에 정답을 제시했다. 

상주사(商周史)·고문자 전문가인 박대종 소장(대종언어연구소)이 중문 간자체본 ‘서주사의 절대기년(西周史之绝对纪年)’을 통해 서주사의 비밀을 밝혔다.

우리나라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천자국 은나라를 밀어내고 제후의 나라를 천자국으로 승격시킨 서주의 시조는 무왕(武王)이다. 중국의 제1 출국금지 국보급 문물인 ‘대우정(大盂鼎)’ 명문은 ‘무왕은 문왕의 뒤를 이어 나라를 세웠다(武王嗣文王乍邦)’고 기록하고 있다. 중국역사는 서주의 1대 왕을 무왕, 마지막 12대 왕을 유왕(幽王)으로 본다. 

문제는, 서주사의 11대 선왕(宣王)과 12대 유왕을 제외한 이전 1대 무왕부터 10대 려왕(厲王)까지 정확한 재위연대가 오리무중이라는 사실이다. 사마천이 중국 제1위 정사서 ‘사기(史記)’에서 11대 선왕 이전 ‘공화(共和)’의 섭정원년인 BC841까지만 구체적으로 명기했기 때문이다. 국제학술계가 중국사 연대를 BC841 이후부터 공인하고 있는 이유다. 

서주사는 가공이 아니다. 실재한 역사인데 1~10대 왕년을 모른다. 중국은 답답할 수밖에 없다. 이 세계사적 난제에 처음 도전한 이는 중국 한나라의 역법학자 류흠(劉歆·?~23)이다. 

서주 왕실은 은나라에서는 쓰지 않는 독특한 날짜 용어들을 사용했다. ‘생백(生霸)’, ‘사백(死霸)’ 따위다. 후한의 허신(許愼·58~149)이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이들 용어의 개념을 180도 바꿔 설명해 놓는 바람에 일이 크게 꼬였다. 2000년 전 류흠은 ‘사백은 朔(초하루 삭)이고 생백은 望(보름 망·15일)’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후대에 허신이 ‘생백은 월 중에서 2일 혹은 3일(霸·月始生魄然也 承大月二日 承小月三日)’이라고 잘못 해석한 탓에 숱한 학자들이 미로를 헤매게 됐다. 

당나라로 접어들어 학승 일행(一行·683~727)은 ‘대연력(大衍曆)’을 지어 류흠 저 ‘삼통력(三統曆)’의 일부 오류를 규명했다. 그 뒤 송나라를 거치면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국보급 서주 왕실 청동기가 대거 발굴됐다. 이 청동기들에는 ‘생백’과 ‘사백’이 포함된 서주 당시 날짜를 나타내는 독특한 월상 용어 4개가 새겨져 있어 서주사를 밝히려는 학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했다. 

청나라 말기 1899년 갑골문이 발견된 후 라진옥(羅振玉), 동작빈(董作賓), 곽말약(郭沫若)과 함께 ‘갑골 4당’으로 불리는 중국학자 왕국유(王國維·1877~1927)는 사서삼경과 같은 여러 고문서에 등장하는 ‘방사백(旁死霸)’, ‘방생백(旁生霸)’, ‘기방사백(既旁死霸)’ 등의 용어가 청동기 상에 나오지 않는다며 실증주의적 관점에서 무시했다. 오직 4단어만 서주 때 월상용어로 쓰였다면서 한 달을 넷으로 나눈 ‘4분1월(四分一月)’설을 주장했다. 

①초길(初吉·1~7·8일) ②기생백(既生霸·8·9~14·15일) ③기망(既望·15·16~23일) ④기사백(既死霸·23~그믐날)

동작빈이 잘못을 통렬히 비판했지만, 왕국유의 학설은 오랫동안 중국학계의 주류이론으로 인식돼 왔다. 미국의 중국학술계는 이를 표준으로 받아들여 서주사의 왕년을 연구했다. 데이비드 S 니비슨, 데이비드 W 판케니어, 에드워드 L 쇼네시가 대표적 학자들이다.

중국 정부는 수천년에 걸친 이 학술난제를 해결하고자 1996~2000년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을 했다. 이 과정에서 리학근(李學勤)을 필두로 한 중국학자 수백명이 왕국유의 4분1월설로는 답이 나오지 않자 고민 끝에 서주 청동기들에 나오는 4개 음력 월상용어의 정의를 바꿔버렸다.

①초길 1~10일 ②기생백 1~15일 ③기망 16~23일 ④기사백 16~그믐

네 용어는 본래 한 달 중 각각 어느 하루를 지칭한다. 그럼에도 범위를 크게 늘이고 용어는 잘못 해석한 셈이다. 2000년 리학근 등은 임의의 기준으로 대표 청동기 명문 60여개의 날짜를 나름대로 해석한 것을 바탕으로 서주 12왕의 왕년에 대해 발표했다.

1대 무왕(武王) BC1046~1043, 2대 성왕(成王) BC1042~1021, 3대 강왕(康王) BC1020~996, 4대 소왕(昭王) BC995~977, 5대 목왕(穆王) BC976~922, 6대 공왕(共王) BC922~900, 7대 의왕(懿王) BC899~892, 8대 효왕(孝王) BC892~886, 9대 이왕(夷王) BC885~878, 10대 려왕(厲王) BC877~841, 공화(共和) BC841~828, 11대 선왕(宣王) BC827~782, 12대 유왕(幽王) BC781~771

그러자 니비슨 교수와 쇼네시 교수는 물론, 중국에서도 학자들이 반발했다. 세계적으로 부정적 여론이 들끓었다. 이후 하상주단대공정에 참여한 학자들을 숙연케 만든 주공묘 서주갑골문, 제신홍도관(帝辛紅陶罐), 준궤(畯簋) 명문 같은 새로운 증거유물이 속속 발견됐다.

2009년 3월14일, 주무왕의 동생 주공(周公)의 묘에서 발굴된 서주갑골문 관련 좌담회가 베이징대학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 풍시(馮時)는 “이번에 ‘방생백(旁生霸)’이 새로 발견됐다. 이것은 출토문헌 중 새로 보이는 월상명이다”, 리령(李零)은 “주공묘 갑골을 통해 역사문헌들에서 말하는 월상기일법이 실증됐다”고 했다. 하상주단대공정의 수석과학자이자 최고책임자인 리학근은 “여기에서 출토된 월상 단어는 기타 출토문헌과 마찬가지로 어느 고정된 하루를 나타낸다”고 운을 뗀 다음 “다만 서주 후기로 오면서 고정되지 않은 날짜를 나타내는 것으로 변형됐는데 이는 연구할 필요가 있는 문제”라고 짚었다. 

하상주단대공정 책임자들의 공개발언은 결국 서주에서 사용된 월상 단어들이 ‘초길, 기생백, 기망, 기사백’ 넷만이 아님을 인정한 것이다. 잘못된 판단과 기준으로 결론 지어진 하상주단대공정 중의 서주 연대는 오류여서 전면 재검토 수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중국 정부 차원의 고백이다. 

잘못된 것을 계속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건만, 중국정부 차원의 수정된 결론은 현재까지 나오지 않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 소장의 ‘오성취방과 제신점성도문에 의거한 무왕극상일(从五星聚房與帝辛占星陶文看武王克商日, 公元前1018年2月22日)’ 논문이 2014년 국제학술지 ‘은도학간(殷都學刊)’에 수위로 게재되며 주목받았다. 천문학과 출토문헌 등을 통해 서주사의 시작점, 곧 무왕의 건국원년이 BC1028임을 밝혀 천년의 학술현안에 기준점을 제시했다는데 의미가 있는 논문이다. 중국고교계열(中国高校系列) 전문학술지 ‘구역문화연구’ 2014년 3기에도 실렸다. 중국학계가 공식 인정한 것이다. 

‘서주사의 절대기년’은 ‘오성취방과 제신점성도문에 의거한 무왕극상일’의 후속편이다. 박 소장은 서주의 월상 명사 가운데 핵심어인 ‘霸(백)’에서 月(달 월)을 뺀 䨣(격)자를 “雨(비 우)와 革(가죽 혁)자로 이뤄져 ‘변형’을 뜻한다. 비에 가죽제품이 젖으면 가죽은 쉽게 변형되기 때문이다”로 최초로 정해했다. 이를 근간으로 서주의 여러 월상 명사의 고정 날짜를 복원했다. 나아가 고서들에 기록된 천문현상과 청동기들에 기록된 날짜들을 재해석, 서주 12왕년의 정확한 절대연대를 세계 최초로 규명했다. 

1대 무왕(武王) BC1028~1012, 2대 성왕(成王) BC1011~985, 3대 강왕(康王) BC984~971, 4대 소왕(昭王) BC970~951, 5대 목왕(穆王) BC950~926, 6대 공왕(共王) BC925~903, 7대 의왕(懿王) BC902~893, 8대 효왕(孝王) BC892~887, 9대 이왕(夷王) BC886~879, 10대 려왕(厲王) BC878~842, 공화(共和) BC841~828, 11대 선왕(宣王) BC827~782, 12대 유왕(幽王) BC781~771

천자국 서주의 기점은 무왕 원년인 BC1028, 종점은 유왕 말년인 BC771으로 간격은 257년이 된다. 제2대 성왕 원년 BC1011과 제3대 강왕 말년 BC971의 간격은 40년, 제1대 무왕 원년 BC1028과 제5대 목왕 말년 BC926의 사이는 102년이다. 이 연대는 중국 서주사와 관련해 가장 신뢰받는 고서인 고본 ‘죽서기년(竹書紀年)’의 기록 “自武王至幽王二百五十七年”, “成 康之際 天下安寧 刑措四十年不用”, “自周受命至穆王百年 非穆王壽百歲也”와 서로 일치한다. 제10대 려왕 재위 37년(BC878~842)은 사기 주본기의 기록 “三十四年 王益嚴…三年 厲王出奔於彘”와 서로 완전 일치한다.

박 소장은 또 주나라의 제후국인 노나라 1대왕 백금(伯禽)의 원년은 주나라 성왕 원년과 같은 BC1011년, ‘대우정’은 즉위년을 기준으로 목왕 23년(BC929)에 제작된 것 등을 밝혔다. 하상주단대공정에서 다룬 서주금문역보(西周金文曆譜)의 66개 문헌 혹은 기명 전체에 대한 날짜는 물론, 그 후 발굴된 신자료들의 정확한 연월일을 완벽하게 입증했다. 

박대종 소장은 “서주사 연대가 정확히 밝혀져야 그와 연관된 기자조선 연대도 정확히 드러나게 된다. 나아가 단군조선의 개국연도 또한 모호함을 벗고 밝혀지게 될 것이니 이 연구결과는 중국에만 국한되지 않는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강조했다.

reap@newsis.com

출처 http://news.joins.com/article/21693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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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주(西周)의 10대 왕이었던 려왕(厲王·재위 기원전 877~841 / 생몰 기원전 ?~828)은 부패하고 사치를 일삼는 왕이었다. 그의 성은 희(姬)였고, 이름은 호(胡)였으며, 아버지인 이왕(夷王)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그가 왕위에 오르기 약 170년 전 건국된 주나라는 초기의 무왕과 성왕의 강력하고도 건전한 통치로 중국 대륙의 제후국들을 거느리면서 천하의 중심이 된 나라였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전제왕정이 계속되다 보니 국가의 기강이 문란해 진 상태였다.

◆ 주나라 10대 려왕, 일하기 싫어하고 주색잡기에만 골몰

려왕의 아버지였던 이왕만 하더라도 제(齊)나라의 애공(哀公)이 그에게 반대한다는 이유만으로 제후를 끓는 솥에 넣어 삶아 죽여 버릴 만큼 포악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려왕은 이런 포악성은 없었지만 일하기를 싫어하는 군주였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따르면 그는 국인(國人·주나라의 제후)에게 나눠주어야 할 토지와 산림, 소택지 등의 관리권을 빼앗아 그 이익을 독점하여 자신의 사치생활에 탕진했다. 또한 그는 일체의 언로(言路)를 막고 전제정치를 일삼았다. 이에 따라 사람들은 서로를 믿지 못해 말도 함부로 하지 못하고 길에서도 눈짓만으로 생각을 나눌 만큼 숨 막히는 사회가 됐다. 누구라도 자기가 듣기 싫은 말을 하면 극형에 처했기에 제후들도 왕을 알현(謁見)하러 오지 않아 려왕은 점점 궁궐 속에서 혼자 지내며 술과 여색만을 가까이 했다. 뿐만 아니라 위(韋)나라의 무당을 궁중에까지 끌어들여 백성들을 감시하고 반대세력은 모두 잡아 죽이기까지 했다.

보다 못한 소목공(召穆公)이 직언을 했지만 려왕은 이를 가벼이 흘려들었다. 소목공은 “백성의 말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강물을 막는 것만큼이나 위험합니다. 물을 다스리려면 필히 소통하는 물길이 있어야 물이 바다로 흘러갑니다. 국가를 통치하는 것도 이와 같아 백성들이 마음껏 말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합니다”라고 간언했지만 려왕은 귀담아 듣기는커녕 오히려 소목공을 축출해 버렸다.

◆ 민심 폭발, 폭동에 왕위에서 쫓겨나 평생 숨어 살아

민심은 부글부글 끓었고 마침내 폭동이 일어나서 려왕은 쫓겨나 도읍인 호경(鎬京·지금의 산시(陝西) 성 시안(西安) 부근)에서 도망쳐 체(彘·지금의 산시(山西) 성 곽주(霍州) 부근)에 숨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실상 여왕은 자신이 직접 폭정을 휘둘렀다기보다는 영(榮)나라의 이공 (夷公)을 측근에 두어 경사(卿士) 벼슬을 주고 그에게 국정의 전반을 맡겨 버리고 자기는 그저 주색잡기에만 열중한 것이었다.

◆ 주 왕실 후손, 제상 협치, 꽃 피운 14년 공화정치

려왕이 도망친 직후 사람들이 왕궁에 갔지만 국왕을 찾을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사람들이 후환을 없애려 왕자를 찾고 있을 때 소목공이 나타나서 대신들과 상의한 후 잠정적으로 천자를 대신할 권한을 직권을 손에 쥐게 되었다. 이 때가 기원전 841년이었는데 소목공은 왕이 없는 상태에서 주(周)나라의 정공(定公) 및 여러 재상들과 공동으로 화합해서 국가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중국 역사는 이 시기를 공화(共和) 또는 주소공화(周召共和)라 부른다. 핵심이 되었던 두 사람 중 정공은 주나라 왕실의 일원으로 상징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소목공은 개혁세력의 대표로 인식되었다. 두 사람의 정치적 입장이 다를 수 있었지만 혼란에 빠진 국가의 안정과 사태수습을 위해 언제나 협의하면서 정사를 이끌어 나갔다.

사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지만 죽서기년(竹書紀年·하은주부터 위나라 양왕까지의 편년체 중국 역사서)과 여씨춘추(呂氏春秋·진나라 재상 여불위가 편찬한 역사서)에는 이 내용이 약간 다르게 기술되어 있다. ‘공(共)나라의 제후였던 화(和)가 천자를 대신해서 정치를 하였으므로 공화라는 말이 생겼다’라고 하고 있기도 하다.

◆ 최고 권력자 없었지만 협치로 정국 수습

아무튼 이 시기 원톱 시스템으로서의 천자는 사라지고 여러 세력들이 힘을 합하여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서로 견제하면서 국가를 함께 경영해 나갔다. 이 시기는 기원전 841년부터 기원전 828년까지 14년 동안 지속되다가 려왕이 유폐지에서 죽자 려왕의 아들인 정(靜)이 선왕(宣王)으로 즉위하면서 막을 내리고 주나라의 왕실은 겨우 회복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주나라 왕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진 후였고, 그 이후 주나라의 국세는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서양에서 공화제(republic)가 도입된 뒤 일본의 란가쿠(蘭學)시대에 이 단어의 번역에 골몰하던 일본학자들은 중국고전에서 비슷한 사례를 찾아내어 이를 ‘공화제’라고 번역해서 지금까지 일본은 물론 동아시아 전역에서 쓰는 단어가 됐다. ,republic은 개인적인 것에 대비해 공공의 사물이라는 res publica에서 나온 말이다.

◆ 왕의 무능, 측근의 국정농간 3000년 전의 역사 데자뷰
역사가 되풀이된다는 말은 자주 하고 있지만 지금부터 무려 3000년 전 중국에서 있었던 일과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일은 단순히 데자뷰(deja vu)라는 말로만 설명하기에는 너무 유사한 점이 많다. 왕의 정치적 무능과 외부로부터 굴러들어온 1인에 의한 국정농간, 그리고 소통의 부재와 직언을 할 수 있는 신하의 부재 등이 그렇다. 데자뷰란 최초의 경험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본 적이 있거나 경험한 적이 있다는 이상한 느낌이나 환상을 뜻하는 프랑스어로 ‘이미 보았다’는 의미다. 영어로는 ‘already seen’에 해당한다.

국회의 탄핵소추안이 가결되고 이제 공은 헌법재판소로 넘어갔다.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이 어떤 식으로 결정될지는 결론이 나야 알 수 있다. 하지만 당분간 우리는 대통령의 권한이 정지된 상황을 맞이해야 한다.

◆ 협치, 공화 잘 하면 ‘최고지도자 부재 시기’ 더 평가할 수도
이럴 때일수록 기원전 9세기 주나라에서 있었던 일을 상기하면서, 서로가 힘을 합쳐(共) 어우러지는(和) 결론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수백 년 또는 수천 년 뒤 후손들이 오늘의 우리를 얘기하면서 공화(共和)의 의미를 다시 되새길 수 있길 기대한다.
당장 눈앞에 있는 이익보다 역사는 협치를 더 가치 있게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치권이 깨닫기 바란다.

출처 http://china.donga.com/List/3/all/43/8005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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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주나라 여왕 때 왕을 쫓아내고, 소공과 주공 두 재상이 협의해서 정사를 봤다. 쫓겨난 왕이 죽을 때까지 14년간 이어진 이 시기의 정치를 ‘공화’(共和)라 했다고 사마천은 <사기>에 기록했다. 물론 이와 달리 ‘공백화’가 왕위를 찬탈했다고 쓴 사서도 여럿 있다.이 공화라는 단어를 Republic의 번역어로 처음 쓴 것은 일본인들이다. 19세기 지리학자인 미쓰쿠리 쇼고가 ‘Republic=군주가 없는 나라’를 어떻게 번역하면 좋을지 고민하다가, 유학자 오쓰키 반케이한테 사기에 기록된 이야기를 설명 듣고 ‘공화정치’라고 번역했다고 한다.대만 독립운동세력은 1895년 독립 대만의 국호를 대만민주국이라 하고, 영문으로 ‘Republic of Taiwan’이라고 썼다. 우리도 제헌헌법 때부터 나라의 정체를 ‘민주공화국’이라 하고, 국호에 리퍼블릭을 쓴다. 하지만 헌법학자들은 공화국을 ‘왕정이 아니다’라는 의미 정도로만 해석한다. 진보정치세력도 ‘공화주의’에 큰 의미를 둔 적이 없다.유승민 의원이 지난해 7월8일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사퇴하면서 “정치생명을 걸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우리 헌법 1조 1항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다”고 하더니, 지난달 31일 성균관대 강연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공화주의 실현’을 강조했다. 그의 설명대로 공화주의는 “공공선을 담보하는 법의 지배 안에서, 시민들이 다른 시민들에게 예속되지 않고 자유를 누리며, 시민적 덕성을 실천하는 정치 질서”다.서양 정치사에서 공화제는 군주제에 대한 저항의 논리였다. 유 의원이 이 나라를 ‘선거로 왕을 뽑는 체제’라고 보고 있다면 의미심장하다. 새누리당에 복당한 그가 단지 박근혜 대통령과 차별화를 위해 공화주의를 수사로만 사용하고 말 것인지, ‘공화주의 운동’을 벌일지 궁금하다.

정남구 논설위원 jeje@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48965.html#csidxe6db1ae0d78b5c4ac8e7b2b2ca1c79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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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국체(國體)이면서도 그 말뜻을 두고 각각의 해석이 다른 게 '공화'다.

헌법 1조 1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하여, 민주주의와 함께 공화주의를 지향해야 할 이념으로 규정했지만 공화주의의 의미는 여전히 다양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공화를 표방하고 유신독재를 낳은 과거 민주공화당도 공화를 내세웠지만, 공화주의에는 전혀 부합하지 않아 이를 논외로 함에도 말이다.


◇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공화가 뭔데? 

우리나라에 공화주의를 진지하게 소개한 이는 홍세화 현 협동조합 '가장자리' 이사장인 듯하다. 
프랑스 거주 뒤 '세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나눈다' 책을 썼던 그는 공화주의의 나라, 공화국을 "자유로운 시민들이 공익을 목표로 하는 사회로서 법의 권위가 지배하는 국가"로 정의한 바 있다. 

공화주의의 연관 개념으로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있는데,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 공화주의라는 두 가치의 결합"이라고 밝혔다. 민주주의를 이루는 한 구성 요소가 공화주의라는 설명이다. 

반면 프랑스의 석학 레지스 드브레는 "모든 공화정은 민주주의적이지만 모든 민주주의가 반드시 공화주의적인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오히려 민주주의가 공화주의의 한 구성 요소라는 것이다.

◇ 분분한 '공화주의', 유승민에겐 '혁명'의 이념

김호기 연세대 교수는 "공동의 법과 이익에 의해 결속된 공동체로서의 국가가 공화국"이라고 정의하면서도 "공화주의는 시대에 따라 그 의미가 변화되어 왔다"고 말했다.  

이런 다양한 해석들 속에 현실 정치인 유승민 의원이 나름의 정의를 추가했다. 유 의원은 1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공화주의 철학에 기초한 보수혁명을 해야 희망을 만들 수 있다"고 쓰며 전날 성균관대에서 했던 강의 영상을 첨부했다. 강의에서 그는 공화주의에 대해 "공공선을 담보하는 법의 지배 안에서 시민들이 다른 시민들에게 예속되지 않고 자유를 누리며 시민적 덕성을 실천하는 정치 질서"라고 정의했다.  또 "투표에서 이기면 멋대로 다 하는 민주주의를 벗어나 공화주의로 가야 한다"면서 두 이념 사이에 적지 않은 차이가 있음을 나타내기도 했다. 



◇ 왕 축출 뒤 찾아온 '공화', 유승민의 공화는?

이렇듯 의미가 혼돈되면 그 연원을 떠올리는 법이다. 공화주의나 공화국은 라틴어 'res publica'에서 유래했는데 '공적인 일', '여럿의 화합'을 뜻한다.  이를 동양에서 '공화'로 번역한 건 근대 일본학자들로, 이들은 중국 주나라 여왕(厲王)이 쫓겨난 뒤 찾아온 제후들의 공동집권 시기 연호를 따왔다. 사기(史記)에 따르면 여왕은 포악하고 교만했으며 자신을 비판하는 백성들을 탄압하고 목숨을 빼앗았다. 강요된 침묵에 참다못한 제후와 백성들은 마침내 반란을 일으켜 여왕을 축출했고 주정공(周定公)과 소목공(召穆公)이 천자(天子)를 대신해 정치를 함께 했다. 그때의 연호 '공화'가 바로 현대의 공화주의로 이어진 것이다.

집권여당으로부터 탄압받은 유승민 의원이 이러한 유래를 떠올렸는지 알 길은 없다. 하지만 공화주의에 보수혁명을 연관한 점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원문보기: 
http://www.nocutnews.co.kr/news/4602146#csidx8dd9255a0000735928e31d8bf2fd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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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재해와 가렴주구가 들끓으면 여지 없이 민초들은 지도자를 찾고 깃발을 들어 항거했다. 비록 실패할지언정 비굴하게 살지 않았던 민란의 역사, 파란만장했던 이야기를 담아보려 한다. 비록 중국 민란이지만 우리의 현실이, 미래가 암울하니 혹시나 '성공하는 민란'의 힌트 하나라도 된다면 기쁘겠다. 타임머신을 타고 갈 수 없는 역사라 당시 '인민'의 고통과 함께 하긴 어렵겠지만 적어도 '세월호'와 '메르스'로 상징된 나라의 국민과 '대동소이'라는 심정이다. '민란'의 깃발을 높이 들면 '인민은 춤추게 된다'는 역사의 진실을 조금이나마 전달하고 싶다. - 기자 말

200년 도읍지 호경(鎬京)의 새벽이 갑자기 수상하다. 남정네들의 실루엣이 햇살을 머금자 점점 정체가 확연해지고 적막하던 거리는 순간 거친 호흡으로 뒤범벅이다. 제각각 몽둥이와 농기구, 삽이나 식칼을 들고 나선 이들은 별다른 신호도 없고 따로 명령을 내리는 사람도 없지만 일사불란, 모두 목숨을 건 모습이다. 

돼지 잡듯 개 패듯왕성으로 돌진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사면의 열기는 하늘을 찌르고 팔방마다 칼날이 춤추는 가운데 처절한 고함은 끊임없이 웅장하게 하늘을 향해 울려퍼지고 있다. 때는 바야흐로 기원전 841년.


"희호를 죽이자! 놈을죽여라!" 

희호(姬胡)는 누군가? 기원전 1046년 주무왕(周武王)이 강태공과 함께 군사를일으켜 상주왕(商紂王)을 토벌한 후 중원의 패자로 자리를 잡고, 소위 역사에서 '잘 나가던' 주나라의 10번째 군주 주려왕(周厲王)의 성과 이름이다. 그의 조상은 상나라 서쪽 2천 리나 떨어진 주원(周原, 섬서 기산岐山 현)에서 농업으로 생산성을 끊임없이 혁신하며 힘을 기른 부족으로 성(姓)을 희라 했다. 

중국 고대 신화에 출몰하는 삼황오제 중 황제(黄帝)의 성이며 그의 후손이 주나라를 창건했다. 황제는 지금의 서안 서쪽 4백 리 부근의 희수(姬水)에서 오래 거주했다고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는 기록한다. 호경은 주나라의 도읍으로지금의 서안(西安) 서쪽 일대이다.

주나라는 패권을 잡자고심 끝에 중원 천하를 분봉(分封)했다. 공전(公田)을 중심에 둔 정전제(井田制)를 전격 채용했으며 토지와 경작할 인민들을 통치하도록 예약(禮樂)을 통일하고 왕족, 공신, 귀족에게 크고 작은 작위(爵位)를 내렸다. 고대에 다리가 셋 달린 술잔으로 다양한 문양을 새겨 신분을 나타내던 작(爵)은 통치계급 내부의 등급 서열을 나누는 법률제도의 규정을 상징하듯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으로 하사됐다. 장자인 대종의 세습과 소종의 분화로상징되는 종법(宗法)제도도 왕을 본받아 세습했다.

<사기> '주본기(周本紀)'에 따르면 불멸의 '씨족국가'를 염원한 주공(周公)의 창조적이며 주도 면밀한 설계를 칭찬하고 있다. 주공은 강태공, 소공과 함께 주 건국의 일등공신으로 형인 무왕이 일찍 죽자 어린 성왕을 섭정하며 천 년 왕업의 기틀을 쌓았다. 주공이 하사 받은 봉토인 노(鲁)나라 출신 공자(孔子)는 평생 우상이자 이상적인 정치인으로 숭배했다.


진나라의 뛰어난 상인이자 정치가인 여불위(呂不韋)가 자본의 힘으로 편찬한 <여씨춘추呂氏春秋>를 봐도 "주나라 봉토는 4백여 곳이고 아래 복종하는 나라는 8백여 곳에 이른다"고 했고 춘추시대 8개 나라의 역사를 모아놓은 역사 서적인 <국어國語> '주어(周語)' 편에 "(주나라) 선왕에게 천하가 있었는데 사방천 리 이내에 전복(甸服, 직접 왕이 관리하는 영토)을 세우고 그바깥 지역은 나누어 작위를 주고 각각 녕우(寧宇, 안정적인 구역이자 지정된 영토)를 세웠다"고 했다.

공자의 이상 국가 주나라도 세월이 흘렀던가? 2백여 년이 흘러 중원의 패자, 대왕을 죽이자고 벌떼처럼 들고 일어난 것은 아무리 봐도 좀 심한 과장이 아닐까? 농기구 등으로 맨손으로 폭동을 일으킨사람들은 결국 왕을 몰아냈다. 역사에서는 이를 '국인(國人)의 반란'이라 부른다. 

나라 국(國)은 허신(許愼)의 한자 사전 <설문說文>에 따르면 곧 방(邦)이라 주석하는데 고대에는 봉국(封國) 또는 영역(领域)을 말했다. 성역은 흙으로 쌓아 만들었으며 사방을 꽉 둘러싼 담장인 성城과 담장 안의 공간인 역域으로 나눈다. 역(域)은 <설문>에 곧 역(或)이라 했으며, 영토의 경계를 의미하는 방형으로 둘러싸인 곳이 나라 국國이다. 그래서 성곽 안에 사는 사람을 국인, 성곽밖에 사는 사람은 야인(野人)이라 구분해 불렀다. 

'창소욕언' VS '치약망문' 

주나라는 점차 사회모순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국고는 공전과 제후국의 공물이 원천이었으나 점점 사전 개발이 늘면서 공전의 수익도 줄고 제후의 수입도 감소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봉록이 줄자 관리들도 갈수록 부익부 빈익빈에 시달리며 하향 계급화했고 농업이나 수공업, 상업으로 연명하던 국인들은 성 안과 밖의 산림이나 강가, 연못을 찾아 새로운 생산물을 수확해 경제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주려왕은 제후국 영나라 군주인 영이공(榮夷公)을 등용해 국인들의 소득원천이던 산림천택(山林川澤)을 국가가 직접 통제하는, 일종의 국유화 정책인 '전리(專利)' 제도를 전격적으로 실시했다. 서민들의 경제기반을 강탈하기 위한 술수이자 상위 고관의 봉록과뇌물을 늘리기 위한 '영공노믹스(榮公)nomics'인 셈이다. 삶의 기반을 송두리째 빼앗긴 국인들은 사방에서 항의하고 원성이 잦았으며 갈수록 사회적 불만이 팽배해졌다. 양심적인 관리들도 '전리' 제도를비판했으나 주려왕은 나랏일에 대한 토론금지, 위반하는 자는 살육하는 더욱 고압적인 정책으로 밀어붙였다. 

땔감 마련이나 수렵은 물론 강이나 연못에서 물고기를 잡는 행위를 전면 금지했으며 자원이 되는 모든 자연을 봉쇄했다. 주나라 개국공신으로 세습해 온 대신 가문의 소공은 참다못해 "백성들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죽을 지경입니다"고 간언했지만 주려왕은 오히려 불만의 소리를 감시하기위해 첩자를 거리 곳곳에 배치해 말을 섞거나 심지어 눈빛만 교환해도 연행해 혹독한 고문과 구금, 사형으로 다스렸다. 나중에는 아무런 증거도 없이 일벌백계 한답시고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신하들 앞에서 모든 비방을 잠재웠다고 자랑하고 다녔으니 독재치고는 야비했다. 


이렇듯 강압적인 방법으로 서민들의 입을 틀어막는 것은 잘못입니다. 이렇게 사람의 입을 막는 것은 흐르는 강을 틀어막는 것과 같습니다. 강을 막던 제방이 일단 터지면 멸정지재滅顶之災의 엄청난재난이 생길 것은 자명합니다. 사람의 입을 막으면 다가올 위험은 강물보다 더 치명적입니다. 치수治水는 채용소도采用疏導이니 막힌 수로를 통하게 하는 것이고, 치민治民은 창소욕언暢所欲言이니 천하의 모든 사람이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고 싶은 말을 누구나 하게 하면,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나 모두 나타나게 되니 좋은 일은 격려하고 나쁜 일은 대비할 수 있습니다. 국민들이 걱정하는 바를 입 밖으로낼 때는 여러 번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어렵게 하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국민들의 입을 막는다면 나라가 얼마나 오래가겠습니까?

소공 소백호召伯虎는 군림하지 않으며 물 흐르듯 민심이 소통하는 나라의 지도자를 갈구했으나 주려왕은 '치약망문置若罔聞'했다. 쉽게 보면 '못 들은 체하다' 정도일지 모르나 그보다는 훨씬 강렬하다. 직언이나 비평, 하소연, 권고나항의에도 불구하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는 뜻이니 망국의 독재자에게 흔한 증상일지도 모르겠다. 

주나라 수도 호경의 국인들이 들고 일어나 왕성을 쳐부수고 돌파해 나갔다. 주려왕은 폭도들을 진압하라 명령했으나 성을 지키던 관리들은 함성에 놀라 이미 도망갔다. 결국, 왕은 황하를 넘어 대부(大夫)가 다스리는 작은 영지인 체읍彘邑(산서 곽주霍州)으로 도망갔다. '체'는 돼지라는 뜻으로 '국인의 민란'을 다르게 부르면, 체 나라로 왕을 쫓아냈다고 '체지란彘之乱'이라 부르기도 한다.

공화 원년은 역사의 실마리

왕을 몰아낸 반란 주동자들은 서둘러 주려왕의 아들 태자 정静을 죽여 근원의 싹을 제거하기 위해 그를 보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소공의 집을 포위했다. 소공은 왕에게 간언했던 사실을 알리면서도 군주의 신하로서 해야 할 도리를 읍소했다. 소공은 자기 아들을 태자를 대신해 내주었고 태자는 어렵사리 도망해 목숨을 부지했다.

왕과 태자가 사라지자 소공과 주 나라를 설계한 주공의 후예인 주정공(周定公)과 함께 두 사람이 주 나라의 정무와 행정을 주재하는 공화정을 펼치는데 이를 '주소공화周召共和'라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재상두 사람이 왕을 대신해 국가를 경영한 기간은 14년이었다. 공화 14년, 주려왕이 14년만에 죽자 도망갔던 태자를 불러 주선왕(宣王)에 옹립했다. 재상의 정치를 편 두 제후는 나름대로 내치와 외교국방에 힘 썼으나 북방민족 견융의 침입에 속수무책으로 한 여름의 멍멍이 신세로 전락한다. 

기원전 841년, 공화 원년은 사마천의 <사기>에서 매우 의미 있는 연도이다. 이때부터 역사서의 편년체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130편에 이르는 <사기>의 '본기(本紀)' 및 '세가(世家)' 편 곳곳에 연대의 표시와 함께 '주려왕이 체로 도망(周厲王奔于彘)'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사마천은 '공화' 원년을기준으로 역사의 흐트러진 시간대를 맞춘 것이다. 
주선왕은 재위 39년 견융정벌에 나섰으나 대패했으며 재위 46년 만에 사망하고 문제의 인물인 주유왕幽王이 승계했다. 나라가 망하는 징조는 여러 군데에서 나타나지만 가장 불명예는여자 때문에 망했다는 홍안화수(紅颜祸水)의 오명이 아닐까? 경국지색과 놀다가 망했다는 치욕은 망국의 군주가 각오해야 할 숙명인지도 모르겠다. 

후대의 왕조는 멸망 주체로서의 명분을 잘 포장하기 위해 이 잡듯 패악을찾아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夏나라의 걸왕(桀王)과 매희(妹喜), 상나라 주왕과 달기(妲己)에 이어 불쌍한 '마지막' 군주, 서주 시대를 마감한 주유왕과 포사(褒姒)다. 


포사는 유왕의 총애를 받자 태자를 폐하고 자신이 낳은 아들을 태자로삼는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황후였던 신후(申后)는 태자를 데리고 급히 외가로 떠났다. 신후의 아버지는 주변국과 연합하고멀리 견융족(犬戎族)을 끌어들여 수도 호경을 침공했다. 웃지 않는 전술로 유왕을 꼬드기던 포사로 인해 실제로 적이 침공해 왔을 때 봉화가 올라도 지원군이 오지 않았다는 '봉화희제후(烽火戲諸侯)'는 '정치적 교훈'으로 많이 알려진 이야기다. 

서주가 멸망하자 후대의 사가들은 포사에게 100% 책임을 묻기 위한공작에 들어간 듯 보인다. 거의 7백 년이나 지난 후 기록된 <사기>에 갑자기 신화 같은 이야기가 등장한다. 하나라의 마지막 군주 걸왕 말년에 뜬금없이 등장하는 두 마리 용은 포사의 고향 '포나라의 두 왕'이라고 선언하고 타액을 뱉어놓고 사라지자 궤 속에 밀봉해 마치 국새처럼 왕조를 이어 승계한다.

상나라도 지나고 주나라까지 보관됐던 궤 속에서 한줄기 빛이나와 천년 만에 빛을 발한다. 국인민란으로 쫓겨간 군주 주려왕 앞에 갑자기 등장하더니 실수로 용의 타액이 쏟아지고 어느새 뱀으로 변해 도망가다가 우연히 마주친 소녀의 은밀한 몸 속으로 사라졌는데 태기가 생기고 40년만에 여자 아이가 태어났고 강물에 버린다. 

스토리라인이 어딘가 익숙해 보이지 않는가? 천년 전 하나라 망국의 교훈, 백성에서 쫓겨간 군주가 등장하고 용의 정기를 받았으나 징그럽고 교활한 뱀의 상징처럼 이상한 결말이 날 아이가 태어난다. 이 아이를 포나라 출신의 포사와 연결하면 작가적 상상력은 앞뒤 아귀가 맞는다. 이제 포사와 유왕을 연결해 줄 실마리만 찾으면 된다.

'염호기복檿弧箕服'이란 참어讖語가 노래로 유행하기 시작한다. 산뽕나무로 만든 활과 화살을 등에 지는 통이란 말인데 활과 화살이 잘 맞지 않고 반만 들어차는 모양새를 뜻하는것으로 주나라의 멸망을 예언한다. 어느 시골 활 장수 부부가 사정도 모른 채 도성에 들어왔다가 체포돼 부인은 사형 당하고 남편은 가까스로 도망친 후 강 가에서 비관 자살하려다가 강물에 버려진 '문제의 아이'와 조우한다. 

갓난 애를 기를 엄두가 나지 않자 포나라로 도주해 낯선 사람에게 맡긴다.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 용모가 아주 예쁜 아가씨 포사로 성장한다. 마침 포나라는 주 왕실에 죄를 짓게 되고 면죄부로 포사를 바치게 된다. 주유왕과 포사의 극적 상봉이다. 

참어의 등장과 망국의 논리는 평범한 작가의 일반적 시나리오다. 만화 같은 신화를 기술하는 방식으로 후세의 정치인들은 작가들을 고용해 '공자님말씀'같은 교훈을 남기고 싶었다. 포사는 억울할지 몰라도'용의 딸'이 될 정도로 미모는 남았으니 서운할 일은 아니다.

국인을 현대 세계로 치환하면 시민이자 국민이다. 2800여 년이 지났음에도 사회 모순의 심화, 부의 불균등 분배에 따른 불만으로 사회적 갈등과 지배계급에 대한 저항이 낯설지 않다. <사기>가 축약과 상징으로 기록한 기원전 민란은 장편소설 같은 진면목을 파악하는 데 미흡하지만 대다수 국민의 꿈과 희망을 열어주지 못하고 억압하고 소통을 가로막고 언론조차 통제한다면 결국 민란에 버금가는 돌파구, 그 교훈을 말해주고 있다. 기원전 841년 국인이 보여주고 있고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출처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22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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