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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일 수요일

신고리 5·6호기 공론조사, 무엇을 남겼나? /조한혜정

대통령 탄핵을 이끌어낸 시민촛불혁명 1주년을 맞아 내가 찾은 곳은 충무로에서 열린 작은 시민모임이었다. ‘세상을 바꾸는 공론장’이라는 이름 아래 열린 모임의 주제는 ‘신고리 5·6호기 공론조사, 무엇을 남겼나?’였다. 발제자인 시민환경연구소 이영희 교수는 그간 산발적으로 활동하던 탈핵운동계가 충분히 조율하고 연대할 시간을 갖지 못한 채 공론장에 뛰어들어 고전분투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공론화위원회의 활약이 눈부셨지만 판이 깨져서는 안 된다는 전제하에 자신들은 많은 것을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자원 없는 한국이 살 길은 원자력밖에 없다”는 세뇌를 줄기차게 받아온 국민을 설득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것, 거액의 돈과 인력을 갖춘 원자력계와 생계 걱정을 하며 시민운동을 하는 환경운동계의 대결은 애초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벌어진 불공정 게임이었다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 공약인 신고리 5·6호기 건설의 중단 여부를 사회적 합의를 통해 결정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공론화위원회를 출범시키고 대표 시민 500명을 뽑았을 때까지도 나는 공론화위원회가 제대로 일을 해낼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공론화위원회는 공론화 과정을 설계하는 팀인데 심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그것도 적대와 혐오가 판을 치는 상황에서 공평한 게임을 설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선발된 시민참여단 500명 중에 중도 탈락 1명을 포함한 471명이 2박3일 종합토론회와 최종 투표에 참여하였고 공평한 평가를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그들의 모습은 감동적이었다.

2박3일 종합토론회에 모더레이터로 참가한 김희경 변호사는 이 공론장의 주인공은 단연 시민참여단이었다며 전문가 패널이 인신공격으로 흐르자, 참여 시민들이 “우리에게는 상호 존중하며 토의하라고 하면서 왜 전문가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가!”라고 나무랐다고 한다. “시민참여단은 훌륭했고 전문가 패널은 미숙했다”고 잘라 말한 그는 “앞으로 우리나라에 4대강 같은 일은 생기지 않으리라는 기대가 든다”는 참가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공론화를 통한 분쟁 해결의 시대를 열어가자고 했다.

애초부터 30% 진행된 공사를 두고 건설 중단에 관한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보겠다는 시도는 무모한 것이었다. 국가의 장기적 에너지 로드맵이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논의의 틀을 짠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과제였을 것이다. 급하게 달리면서 공론화위원회는 치명적인 실수도 하였다. 예를 들어 2080년까지 가동될 원전 관련 사안이라면 미래 세대의 목소리가 당연히 반영돼야 하는데 위원회는 ‘인구 통계적 대표성’만을 고려했다. 당사자성을 제대로 규정하는 일도 생략했다. 당장 재산상 피해를 받는 원전 인근 주민들만이 ‘당사자’가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모든 국민과 앞으로 태어날 이들 모두가 생사 운명을 같이하는 당사자이다. 시민권과 재산권의 비중을 달리 두어야 한다는 말이다.

‘중립’에 대한 개념도 기계적이었다. 단순히 찬반 입장을 가진 대표들을 모으는 것은 ‘중립적’ 구성이 아니라 기존의 진영논리를 고수할 뿐이다. 논의 초반에 이상적인 배심원의 태도를 그린 <열두 명의 성난 사람들> 영화를 함께 보았다면 도움이 되었을 텐데 아쉽다(이 영화는 중국에서 2014년 <십이공민>으로 리메이크되었다). 끝으로 공론화 위원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끝없는 성장이 가능한 발전주의적 산업사회가 아니라 지구를 날려버릴 위험으로 가득한 시대라는 인식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면 좀 더 탁월한 설계를 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후기 근대의 숙의민주주의는 재난 현장에서 꽃을 피운다. 그리고 판단을 한다는 것은 생각할 시간을 충분히 갖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에서 숙의할 시간을 가진 국민이 얼마나 될까? 생업으로 바쁘고 가짜뉴스까지 판을 치는 정보홍수 속에서 허우적대기에 바쁘다. 여론조사가 아니라 공론조사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고 공론조사를 설계하고 진행한 공론화위원회의 경험이 소중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론장에서 키워진 감각과 기억은 결과와 상관없이 꾸준히 자라나 때가 오면 꽃을 피운다. 제주도 제2공항 분쟁의 장에서 공론화위원회가 좀 더 업그레이드된 설계를 가지고 출동하면 어떨까? 갖가지 재난 상황에 출동하는 새로운 시민전문가들의 등장을 기다려보려 한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16882.html#csidx1163433b11362b997c4685be5ea01e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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