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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6일 목요일

동아의 젊은 후배들에게 / 박종만

지금부터 정확히 50년 전인 1967년 11월 16일, <동아일보>에 22명의 젊은 기자가 입사했다. 동아일보 수습기자 10기생들이다. 이 가운데 2명 조기 퇴사했고 남은 20명 가운데 17명이 1975년 동아투위 사태때 쫓겨났고, 남아있던 3명도 80년도에 모두 해직됐다. 이처럼 동기생 모두가 쫓겨난 것은 한국 언론사뿐 아니라, 세계 언론사에서도 드문 일이다. 

그 가운데 2명은 긴급조치로 구속돼 고초를 치러야 했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취업 방해 등으로 고생했다. 90년대 들어서는 동기생들 가운데 5명이 언론사 발행인을 했다(한겨레 2명, 연합뉴스 1명, 국민일보 1명, 서울신문 1명). 이것도 드문 일이다. 이들은 16일 오전 11시 동아일보사(일민미술관) 앞에 모여 기념사진도 찍고 자축파티도 열 계획이다.

이들 중 박정희 정권때 두차례 구속이 돼 옥고를 치러야 했던 박종만 동아투위 위원이 '동아의 젊은 후배들에게' 보내는 글을 보내왔다. 동아일보 후배뿐 아니라 전 언론계 후배들에게 보내는 선배의 고언이다. 다음은 글 전문. 

동아의 젊은 후배들에게

후배 여러분도 알다시피 지난날 민주화를 위한 수많은 사람들의 피땀 어린 투쟁으로 우리 언론은 적어도 권력의 속박에서는 벗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니, 그저 벗어난 정도가 아니라 우리 역사상 한 번도 누려보지 못했던 거의 무한에 가까운 자유를 누리게 되었지요.

그런데, 그토록 애타게 바라던 ‘언론의 자유’를 만끽하게 되었는데, 유감스럽게도 언론이 민주사회를 올바르게 이끄는 방향타 구실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무책임한 보도로 국민을 오도하고 있다는 비판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특히 ‘조중동’이라는 신조어까지 파생시킬 만큼 언제나 한 묶음으로 똑같은 곡조를 읊어대는, 이른바 메이저 보수언론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조중동’, 이제는 초중등학생들의 입에까지 오르내릴 정도로 유행(?)하는 말이니 여러분도 물론 많이 들어본 말이겠지요. 긍적적 표현보다는 부정적, 비판적 표현으로 더 많이 쓰이는, 때로는 나라를 말아먹는 언론권력의 무리라는 의미로도 쓰이는 ‘조중동’이라는 말을 들을 때 여러분의 기분은 어떻습니까? 찬란하다면 찬란하다 할 수 있는 동아의 옛 모습은 오간데 없고, 한 무리 ‘조폭 언론’ 중에서도 후미로 처진 처량한 꼴이 됐다는 혹독한 비판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해본 일이 있는지요?

“우리는 그따위 말 아닌 말은 듣지도 않고, 말 같지 않은 말을 하는 사람들은 보지도 않는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요?

나에게도 동아일보 기자인 것이 자랑일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취업난 때문에 야단이지만, 60년대 후반에도 취업난이 극심했습니다. 그런 시절에 높은 경쟁률의 어려운 관문을 뚫고 대한민국 최고의 신문사에 들어갔으니 자랑스러울 만도 했지요.

그러나 멋모르고 우쭐대던 올챙이 시절이 지나고 세월이 가면서 자랑스러움은 점차 부끄러움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70년대 들어 박정희 정권의 철권통치가 한층 강화되면서
언론의 대 권력관계는 ‘갈등’에서 ‘굴종’ 또는 ‘유착’으로 변해 가고, 그에 따라 지면 또한 하루가 다르게 변질되어 갔습니다. 이 무렵부터 학생들의 시위 현장에선 “취재해 봤자 나가지도 않을 걸 뭐하려고 취재하느냐”는 욕설, “집에 가서 애나 보라”는 야유, 심지어 “몇 사람 맞아 죽어야 정신 차린다”는 폭언까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71년 어느 봄날엔 서울대학교 학생들이 “민중의 소리 외면한 죄 무엇으로 갚을 텐가”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동아일보사 앞에서 언론화형식까지 했습니다. 

그들은 그 날 “선배 투사의 한 서린 해골 위에 눌러앉아 대중을 우민화하고 오도하여 얻은 허울 좋은 대가로 안일과 축재를 일삼는 자들”이라고 기자들을 질타했습니다. 그들은 또 신문과 기자들을 향해 “사자의 위용은 어디 가고 도적 앞에 꼬리 흔드는 강아지 꼴이 되었느냐”고 야유하면서 “그 자리 그 건물이건만 민주투사는 간 곳 없고 잡귀들만 들끓는다”고 힐난했습니다. 

그 때 비교적 때가 덜 묻고 혈기방장하던 젊은 기자들은 모두 부끄러움으로 몸을 떨었습니다.

“수오지심(羞惡之心)은 의지단(義之端)”이라 했던가요. 그렇습니다. 70년대 자유언론실천운동이 민주주의와 자유언론의 숭고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벌인 의로운 투쟁이었다면, 그 출발점은 다름 아닌 ‘부끄러움’이었습니다.

내가 동아일보사에 입사한 것은 1967년 11월 16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이 입사 5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그 날 우리(동아일보 수습기자 10기)는 22명이 사령장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17명이 75년도에 자유언론수호투쟁을 하다가 해고됐고, 80년도엔 회사에 남아 있던 3명마저 해고되는 아픈 경험을 했습니다.(2명은 조기 퇴사) 그 후 우리는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를 결성하여 비록 펜과 마이크는 빼앗겼을지라도 자유언론을 위한 투쟁을 계속했고, 그 때문에 우리는 감시받고 연행되고 구속되고…그렇게 시대의 불의에 맞서 많은 고초를 겪었습니다. 상당히 오랜 기간 우리는 취업도 안 되고 해외여행도 안 되는 일종의 ‘공민권 제한 대상자’로 살았습니다. 험난한 세월이었지요.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언론계에서 우리처럼 그렇게 많은 동기생들이 독재권력에 의해 해고되고, 70대 중반을 넘은 나이에 이르기까지 함께 자유언론을 위한 투쟁의 대열에 미력이나마 보태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 모든 것의 출발은 바로 부끄러움이었습니다.

70년대 대학가 시위 현장에서 학생들이 기자들을 향해 퍼부어대던 야유와 폭언, 71년 동아일보 앞에서 서울대학교 학생들이 언론화형식을 하며 언론과 언론인들을 향해 쏟아낸 질타의 목소리는, 지난 겨울 광화문 광장을 달궜던 촛불들이 ‘기레기’들을 향해 쏟아낸 비판의 소리와, 그리고 지금 ‘조중동’에 던져지는 질타의 목소리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똑같은 것이었습니다. 

맹자는 “무수오지심(無羞惡之心)은 비인야(非人也)”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자는 기자이기 이전에 인간이 돼야 하고, 인간이 되려면 부끄러움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많은 국민들은 당신들을 향해 부끄러움을 배우라고 외쳐대고 있습니다.

동아의 88년은 영욕의 세월이었습니다. 참회해야 할 과오, 버려야 할 유산도 많지만 자랑스러운 업적 또한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조중동’ 무리의 후미만 열심히 지키고 있으면, 머지않아 동아는 ‘찬란했던 옛 기억’의 그림자마저 모두 사라지고 문자 그대로 삼류신문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 틀림없습니다.

동아를 떠난 지 42년이 지났어도 아직도 남아 있는 동아에 대한 한 가닥 미련과 애정 때문에 말합니다. 동아가 살아나려면 참회와 변화의 바람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주역은 바로 당신들, 젊은 기자들이어야 합니다.

누구나 변화의 주역이 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역사는 그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일어서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박종만
출처 http://www.viewsnnews.com/article?q=15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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