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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9일 일요일

[남재희 칼럼] 나의 구상력은 지금

한반도에 전운이 감돌고 있는 이때 국민 모두는 구상력을 한번 마음껏 발휘해 보아야만 할 것이다. 여기 우둔한 나의 구상력을 말하여 보는 것이다. 병자호란 때의 대응전략의 차이를 말하는 이런 대구가 있다. 금일불가무 최지천 화전론(今日不可無 崔遲川和戰論) 백세불가무 삼학사 주전론(百歲不可無 三學士主戰論)

남재희/ 언론인

신문기자가 된 후 나는 줄곧 국내정치와 함께 국제정세에도 관심을 가져왔다. 아주 오래전에 헨리 키신저 교수의 안보세미나와 스탠리 호프먼 교수의 전쟁론을 한 학년 동안 수강하기도 했는데 좀 건방진 생각으로 그들의 강의에서 배운 것은 중국의 <초한지>, <삼국지>, <손자병법> 등에서 터득한 전략전술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듯했다. 사람들의 지모란 그런 것이 아닌가. 한쪽의 절대적인 안보는 상대방의 절대적인 불안정을 의미하며, 쌍방이 서로 상대적인 안보를 추구하고 유지할 때 평화가 이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천하의 지략가로 칭송되는 제갈공명도 촉·위·오의 3국 정립을 도모하여 안정을 이루려 하였지 천하통일을 기도하지는 않았다.
오늘날 가장 이름있는 국제정치의 책사 키신저 박사도 미국이 적대시하던 중국과 수교의 물꼬를 텄으며, 전 정권들이 빠져든 월남전의 진흙탕 늪에서 벗어나 미국의 체면을 어느 정도 살리는 휴전협정을 체결했을 뿐이다. 그런 것이 현실정치다. 요즈음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과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전쟁불사 위협으로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여러 사람이 비유한 바 있듯이 고슴도치와 코끼리의 대립 같기도 하다.

국제정치에 “미친 사람 이론”(Madman Theory)이라는 것이 있다. 짐짓 미친 사람 같은 전략전술을 써서 상대방을 갈피를 못 잡게 한다는 것이다. 큰 사업가로 성공한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허튼짓을 할 리는 없고 아마 이 미친 사람 이론을 따르고 있는 것 같다. 그래도 불안은 남는다. 지금의 개명된 세상에서 전쟁이 날 수는 없다. 중국 측은 계속 “쌍중단”을 말하여 왔는데 여하튼 쌍방 한발씩 물러설 수밖에 없는 일이다. 방법론상으로는 맞는 방향이다. 문정인 교수가 북한의 핵 및 미사일 실험 중단에 대한 상응조치로 미국의 군사훈련 축소를 말하였다가 일부 강경론자들의 몰매를 맞은 바 있지만 협상에는 쌍방의 양보가 없을 수 없는 것이다. 키신저 박사도 비슷한 디스인게이지먼트(disengagement, 서로가 대결을 풀고 한발씩 물러서기)를 말하지 않았는가.

내 생각으로는 북-미 간의 직접교섭이 불가피하다고 본다. 그리고 지난날에 그랬던 것처럼 6자회담의 틀이 되살려질 수밖에 없다고 본다. 우선 북의 핵과 미사일 실험 중단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거기에 상응하여 미국은 군사훈련의 감축, 중단 등의 조치를 취하여야 할 것이다. 대규모의 군사훈련은 역사적으로 볼 때 전쟁 일보 전의 위험이 있기도 한 것이다. 북과 미는 6자회담의 틀에서 논의를 더 진전시켜 중장기적으로는 북 핵 및 미사일 실험 중단의 엄격한 국제감시,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국제관리, 그리고 서서한 해체(여러 가지 가상이 가능할 것이다), 미국과 북의 평화협정(불가침협정 포함) 체결과 경제협력 등이 뒤따를 것이다.

국가 핵무장의 근본원칙부터 생각해보자. 새로운 핵무장은 안 되는가. 그러면 인도와 파키스탄의 핵무장은 어떤가. 작은 나라의 핵무장은 안 되는가. 그렇다면 왜 이스라엘의 핵무장은 묵인되는가. 핵무장을 금지한다면 응당 금지당한 국가들이 핵무기를 가진 나라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도록 보장해야만 이치에 맞지 않는가. 그런 맥락에서 보면, 북한의 핵무장을 금지하려면 핵무장을 한 국가로부터 북한의 안전을 보장해주는 조치가 병행되어야 한다는 것이 논리상 맞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한 가지 유념할 것은, 남쪽이 6·25 때 북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엄청난 희생을 치른 잊을 수 없는 트라우마가 있다면 북측은 미국의 “석기시대로 되돌릴 수 있는” 엄청난 폭격으로 잊을 수 없는 피해를 입었다는 역시 같은 트라우마가 있다. 핵과 미사일의 개발은 그런 트라우마에서 비롯됐다는 일면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남북한은 서로 비난을 계속하던 끝에 심하게는 상호 악마화에까지 이른다. 전에 아들 부시 대통령은 북을 “악의 축”이라고도 했다. 세상사와 마찬가지로 국제정치에 있어서도 천사도 없고 악마도 없다. 나이 든 세대는 경험했지만 일제 때 그들은 미국과 영국을 “귀축”(鬼畜)이라고 매도하였다. 도깨비나 짐승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어디 그렇던가. 우리는 이 악마화의 선전 굴레에서 벗어나 실상을 있는 대로 보아야 한다. 대단한 비정상은 있을지 모르겠으나 국제정치에서 당사자들은 서로 냉철한 계산하에 행동하는 것이다.

전에 한반도의 “핀란드화”가 운위된 적이 있다. 당장 통일하겠다는 것이 아니라면 맞지 않는 이야기 같다. 남북 간에 평화가 이룩된다면 남쪽은 남쪽대로 이른바 서방권에서 발전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북쪽에서는 지금 장마당이 발전하여 밑으로부터 일종의 자본주의화가 되어가고 있다는 관측도 있다. 만약에 남북 간에 평화가 확립된다면 북은 점차 지금의 중국이나 쿠바, 베트남처럼 변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반세기쯤 지나면 남북 간의 체제는 엇비슷해져 국가연합 또는 연방제의 길도 트일 것으로 본다. 그렇게 될 때 한반도의 통일된 국가는 동북아에서 당당한 독립된 중위권 국가로 독자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그동안 남쪽의 한국에서는 민주적이고 고루 풍요로운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서 노력해야만 한다. 민주적인 사회를 위해 가장 중요한 제도적인 개혁은 지금 당장은 국회에서의 비례대표 확대라고 본다. 유럽의 비례대표가 확대된 나라에서 민주주의도 잘되고 복지도 잘되었다는 조사보고가 근래 신문에 났다. 얼마 전 치러진 일본의 총선거 보도를 보면 중의원 의석 465석 중 비례대표가 176석으로 비례대표 의원 수가 전체 의원 수의 3분의 1을 웃돌고 있다. 독일처럼 지역구 반, 비례대표 반이 바람직스럽겠지만 우리나라도 우선 최소한 3분의 1 이상을 비례대표로 하여야 마땅하다고 본다.

마침 내년 지방선거 때 개헌을 하겠다고 각 당이 공약했었다. 그때 대통령제냐 내각제냐 하는 문제 등이 논의될 것으로 보이는데 거기에 대해서 미리 말해둔다면 우리나라의 현 단계에서 내각책임제는 시기상조이며 당분간 대통령중심제의 지도력이 절실하다는 점을 말해두고 싶다. 남북 간의 긴장이 완화되고 평화가 보장되며 정당정치가 한층 더 성숙한 다음에 내각책임제 전환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경제발전이나 복지모델에 있어서 흔히 유럽 모델을 말하는데 역시 그 방향이 맞을 것 같다. 복지에 있어서는 특히 스칸디나비아 나라들의 이른바 노르딕 모델을 말하는데 참고할 만하다. 한가지 강조해 두고 싶은 것은 토지의 문제다. 꼭 헨리 조지의 이론을 따르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토지는 물과 공기와 같이 인간에게 절대 필요한 자연공공재다. 따라서 토지문제에 관한 여러 법제상, 세제상의 고려는 있어야 하리라고 본다. 우리나라의 점점 심화되는 빈부격차의 원인 가운데 주먹구구로 말하여 절반쯤은 토지문제에 있다고 할 것이다. 요즈음 정계 일각에서 그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데 이 기회에 심도있는 논의가 있을 것을 기대한다.

사람의 능력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가운데서 중요한 것이 구상력(構想力)이라 할 것이다. 한반도에 전운이 감돌고 있고 국내적인 정치발전의 중요한 계기를 맞고 있는 이때 국민 모두는 그 구상력을 한번 마음껏 발휘해 보아야만 할 것이다. 여기 난국을 당하여 우둔한 나의 구상력을 말하여 보는 것이다.

병자호란 때의 대응전략의 차이를 말하는 이런 대구가 있다.
금일불가무 최지천 화전론(今日不可無 崔遲川和戰論)(지천은 최명길의 아호)
백세불가무 삼학사 주전론(百歲不可無 三學士主戰論)

오늘날에 있어서 최명길의 화전론이 없을 수 없고, 긴 세월로 볼 때 삼학사의 주전론도 없을 수 없다는 뜻이다. 백범 김구 선생이 남북 협상을 위해 북으로 떠날 때 그 심정을 이 대구로 표현했다고 전해진다. 얼마간 비슷한 상황이라 할 수도 있다. 전략전술은 때에 따라 신축자재하여야 하는 것이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19421.html#csidx4bbb43076d221a3b3ac84600f0b86e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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