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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3일 목요일

아무도 아닌 자의 장미/ 조한욱

파울 첼란은 동유럽 부코비나 지방의 체르노비츠에서 태어났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루마니아령이 된 직후였기에 그는 여러 문화와 언어를 접하며 성장했다. 교양 높은 어머니는 아들의 표준 독일어 교육에 공을 들였다. 좋은 직업으로 유복한 삶을 살길 바라서였다. 독일어가 모어(母語)가 되었으나 그의 부모는 2차 대전 중 아우슈비츠에서 처형되었다.

살아남은 자의 지옥을 겪은 첼란은 그 현실을 견디기 위해 독일어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적의 언어로 시를 쓴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그는 “모어를 통해서만 나의 진실을 말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언어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시인이기에 언어로 인한 내적 갈등은 더욱 첨예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견디시겠어요, 어머니, 아 언젠가, 집에서처럼,/ 이 나직한, 이 독일어의, 이 고통스러운 운(韻)을?”

첼란은 그 고통에서 멈추지 않음으로써 그 상처받은 언어를 살려놓는다. “말로 나는 당신을 다시 데려온다, 당신은 이제 여기에 있다./ 모든 것이 진실이고 진실의 기다림인 것이다.” 그는 자신의 시가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가닿으리라는 희망과 기대 속에 바다로 띄워 보내는 ‘유리병 편지’라고 했다. 그의 시는 진실을 싣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향해 가는 도중에 있다. 아무도 아닌 것으로서.

시집 <아무도 아닌 자의 장미>는 그 정서를 반영한다. “아무것도 아니었다네 우리는,/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남으리니, 활짝 피어서./ 아무것도 아닌 것의, 아무도 아닌 자의 장미.” 상처 입힌 언어를 바로 그 언어로 승화시켰듯, 첼란은 수용소에서 땅을 파며 ‘아무도 아닌 자’가 된 사람들을 아무도 아니었다는 바로 그 이유로 찬미한다.

그의 시는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라는 테어도어 아도르노의 비관에 대해 시인은 더욱 현실을 직시하고 정제된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는 대답이었다.

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05527.html#csidx339d9bc25956b93ba894d14d280644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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