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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4일 금요일

웅크린 말들/ 이문영 기자의 르포르타주/ 김지훈 한겨레 기자

웅크린 말들
-말해지지 않는 말들의 한恨국어사전
이문영 지음/후마니타스·2만원


‘10을 취재해서 1을 쓰라’는 말이 언론계에서 금언처럼 전해진다. 가장 강력하게 세상을 뒤흔들 사실을, 가장 경제적으로, 빠르게 전달하는 것이 좋은 기사라고 생각하는 저널리즘에서 나온 말이다. 하지만 취재수첩에 적혔다 버려지는 9에는 어떤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웅크린 말들>은 이문영 한겨레 기자가 2013~2014년 <한겨레21>에 연재한 ‘이문영의 한恨국어사전’의 기사들과 이후 <한겨레> 토요판에 백남기 농민, 세월호, 제주 강정 해군기지 등을 기사로 쓰며 취재한 내용을 토대로 대부분 전면적으로 새롭게 쓴 글로 묶은 책이다. 폐광 광부, 구로공단 노동자, 에어컨 수리 기사, 알바생, 성소수자 등 스스로 자신의 삶을 말하지 못하는 이들의 전압 높은 문체로 쓴 르포르타주라는 점은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78)과 <침묵의 뿌리>(1985)를 떠올리게 한다. 작가 조세희는 추천사에서 “‘난쏘공’의 난장이들이 자기 시대에 다 죽지 못하고 그때 그 모습으로 이문영의 글에 살고 있다”고 썼다. 문학평론가 권성우(숙명여대 교수)도 이렇게 적었다. “이문영의 기사(글쓰기)는 김훈, 고종석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문학적 기사 쓰기의 계보를 창의적으로 일구어 나가고 있다. (…) 이 책은 이 시대 문학과 예술이 충분히 조명하지 못한 한국 사회의 가장 밑바닥 인생, 가장 낮은 곳의 실존, 가장 짙은 그늘을 단아한 문장으로 담담하게 응시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2017년판 <난쏘공>이라 할 수 있겠다.”

지은이는 각 장의 제목도 공들여 깎아 만들었다. 제목들은 물, 밀, 전기, 석탄, 시멘트처럼 일상을 구성하는 요소들로 지어졌다. 제목을 이렇게 지은 연유는 책 전체에서 취재의 대상이 된 이들을 관성적으로 부르는 ‘소외된 사람’ ‘사회의 어두운 곳’과 같은 말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것과 닿아 있는데, 이들이 다수의 일상으로부터 동떨어져 있는 이들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책은 강원도 사북에서 시작한다. 조세희가 <침묵의 뿌리>에서 사북의 탄광을 찾아 글과 사진으로 광부들의 삶을 다뤘지만, 지은이가 이곳을 찾아갔을 때는 2004년 폐광된 이후다. 방송 뉴스에선 동원탄광 광부와 직원, 가족들이 살았던 동원아파트는 물과 전기가 끊긴 채로 버려져 ‘카지노 거지’들의 노숙 장소이자 청소년들의 탈선 장소가 됐다고 보도한다. 술에 취한 알코올중독자가 돌아다니는 폐허 속에서 중학교 3학년 딸을 데리고 아슬하게 살아가는 전직 동원탄좌 광부 송양수(가명, 당시 55살)가 아파트 주차장에서 몸을 씻는 모습은 지은이의 눈을 뚫고 들어와 이런 문장을 쓰게 했다. “폐허는 폐허에서 살 수 없는 생명들을 밖으로 밀어냈지만, 폐허이기에 찾아 깃드는 생명들에겐 최후의 품을 내줬다.”

한겨레 이문영 기자의 르포르타주
전직 광부, 구로공단 노동자 등
말해지지 않는 자들의 이야기
“김훈 고종석 계보 잇는 문학적 기사”


지은이는 외부에 있는 사람들이 모르는 의미를 담은 은어, 속어, 조어를 수집해서 ‘한恨국어사전’을 만든다. ‘한恨국어사전’에 수록된 말들은 ‘한韓국어사전’에는 실리지 않는 “대한韓민국이 누락한 대한恨민국”, “우리에 끼지 못한 우리”를 보여준다. ‘한恨국어사전’에 수록된 ‘쫄딱구덩이’는 ‘작은 구멍’이란 뜻으로 영세 또는 하청 탄광을 일컫는다. 전이출(가명, 당시 56살)은 쫄딱구덩이를 거쳐 겨우 국내 최대 민영 탄광인 동원탄좌의 정규직 광부가 됐지만, 폐광 이후 물탱크 청소, 도로 공사 인부, 태백의 쫄딱구덩이를 전전하다 자살을 시도하고 카드회사의 압류장에 시달리는 신세가 됐다. 그리고 다시 사북으로 돌아와 강원랜드 하청업체에서 일자리를 구한다. “강원랜드 하청 신세는 쫄딱구덩이를 벗어나려 필사적이었던 그를 다시 가둬 버린 쫄딱구덩이였다. 동원탄좌 폐광 광부(734명)의 3분의 1이 쫄딱구덩이에 빠졌다.”
구로공단 여공들의 삶은 나선형으로 추락한다. 구로공단을 나왔다가 들어오기를 반복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일거리의 질은 하강한다. 1958년 전남 영광 법성포에서 태어난 순덕의 이름은 긴 변천사를 겪는다. 취업 알선 학원의 집단숙소인 ‘벌집’에 사는 ‘벌’. 학원에서 열여덟이 안 되는 순덕을 취직시키기 위해 바꾼 인적사항 1956년 광주에서 태어난 ‘김필순’. 그 이름은 ‘버스 안내양’, ‘식당 아줌마’, ‘공장 아줌마’를 거쳐 ‘청소 할머니’에 이른다.

구로공단 여공들의 삶은 1993년 연변에서 태어난 조선족 최이경에게 이어진다. 취업이 허용되지 않는 C3(단기방문) 비자를 받아서 몰래 인쇄공장에서 일하는 이경은 ‘가리베가스’를 지나 출근한다. 누추한 가리봉동조차도 고향과 비교해선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라스베가스(라스베이거스)로 보이는 조선족의 현실이 굴절시킨 한恨국어다. “‘여공들’이 벌들이 되어 살았던 집에서 이경과 이경의 부모가 살았다. 한국인 여공들이 떠난 벌집에서 40년 뒤 중국 교포 ‘최이경들’이 들어와 벌이 됐다. (…) 김필순으로부터 최이경까지 40년이 흘렀지만 그들의 방은 40년 전에 멈춰 있었다. (…) 숯검정 굴뚝이 철거되고 반짝이는 유리벽이 솟아도 대한민국이 노동을 다루는 문법은 바뀌지 않았다. 여공, 여자, 그 이름들만 가느다란 실처럼 얽혀 구로에 묶여 있었다.”

기자인 그의 문장들은 왜 기사보단 문학을 향해 가는 것일까. 기사는 확실함을 지향하지만, 문학은 불확실함 덕분에 존재한다. 인간의 삶이 불확실하고, 이렇게도 저렇게도 볼 수 있는 것, 또는 잘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면 문학엔 몇 권의 책밖엔 필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잘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기 위해선 이야기의 힘이 필요하다. 이문영은 “말해지지 않는 자의 저널리즘은 이야기였다”고 말한다. “(이 책은) 말해지지 않을 위험이 있는 존재들과, 그 존재들의 삶과, 그 존재들이 처한 사실을 이야기에 얹어 말의 길을 내려 한 무능한 실험이다. 이야기하기 위해 차용한 형식들은 어떻게 불려도 상관없다. 다큐여도 좋고, 문학이어도 좋다. 기사여도 좋고, 르포여도 좋고, 논픽션이어도 좋고, 소설이어도 좋다. (…) 말해져야 할 것들이 말해지도록 ‘빈 곳을 메우는 일’로, 다만 그렇게 읽힐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820464.html#csidx33c90211d9c7fe19e2f24176fc8b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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