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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2일 화요일

『위장 취업자에서 늙은 노동자로 어언 30년』 이범연

20대 청춘이 ‘하고 싶은 일’ 대신 ‘해야 될 일’을 선택하기란 쉽지 않다. 남들이 가고 싶어 하는 대학에 들어간 후 달달한 낭만, 개인적 성취를 위한 공부 대신 좋은 세상 만들겠다는 꿈을 품고 공장 들어가서 기름밥 먹는 걸 선택하는 거라면 더 쉽지 않다.
이 책 저자 이범연은 1962년 태어나 1981년에 대학에 들어갔다. 전형적인 386세대다. 하지만 이 책에는 386세대라는 표현이 한 번도 안 나온다. 그가 대학을 졸업한 청춘들의 통상적 선택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80년대 학번’은 그에게 의미가 없다.
얼마 전 술자리에서 현장의 한 후배 노동자가 내게 물었다.“형은 서울대 나와서 왜 공장 일을 해요?”입사 후부터 정말 지겹도록 들어온 말이다. 나는 벌컥 화를 냈다.“야, 서울대는 졸업도 못하고 겨우 3년 다니고, 노동자로 30년이나 살았는데, 아직도 그놈의 서울대 타령을 듣고 살아야 하냐?” – 본문 중에서

저자는 마찌꼬바(작은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고, 이후 대우자동차(현 한국GM)에 입사한 지 어언 30년이 됐다. 두 번 해고되고 두 번 구속됐다. 노동조합 간부 일도 몇 차례 했다. 이제 정년을 몇 년 앞둔 ‘늙은 노동자’가 된 그는 “회한은 많지만 자신의 선택에 후회는 없다.”고 말한다.
대기업 노동조합은 세상을 좋게 바꾸는 든든한 진지라는 믿음을 가지고 30년을 살아 온 그가 지금 눈앞에 바라보고 있는 현실은 과거의 전망과 많이 다르다. 노동조합은 취업 비리 등 각종 비리에 노출돼 주요 간부들이 해고되고 구속됐고, 단기 경제적 이익 확보에 매몰됐고, 노동자들은 사회의 진보적 발전이라는 노동조합 운동의 근간이 흔들릴 정도로 보수화됐다. 또 정파는 무리한 경쟁에 찌들어서 노조 활동가들은 멀리 길게 보는 방법을 잃어버린 ‘구조적 근시안’이 됐다.
저자는 평론가적 입장이 아니라 ‘내부자’의 시선으로 대기업 정규직 노조를 정조준한다. 하지만 그의 비판은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한 노력의 다른 측면이다. 현 단계 대기업(대공장) 정규직 노동조합 실상을 자세하게 들여다보고 다양한 문제점과 문제점이 발생하는 원인을 심층적으로, 날카롭게 드러낸다. 이와 함께 노조운동의 위기적 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활동가’의 역할을 강조한다.
‘배제된 노동’을 새로운 주체로 세워야
저자가 이 책에서 강조하는 것은 대기업 정규직 노동운동의 혁신과 함께, ‘배제된 노동’과 ‘만남의 조직학’이라는 개념이다. 배제된 노동은 비정규직 노동자를 포괄하면서 더 넓은 의미로 사용된다.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범주만으로는 중소기업, 여성, 청년, 외국인 노동자들이 겪는 차별과 모순을 담아내지 못한다. 물론 중소기업 노동자, 여성 노동자, 청년 노동자, 외국인 노동자들이 대부분 비정규직 노동자이거나 비정규직과 다를 바 없는 노동조건에서 있다고 반문할지 모른다. 하지만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차별과 모순 못지않게, 남성과 여성, 대기업과 중소기업, 기성세대와 청년세대, 내국인과 외국인 간의 차별과 모순도 심각하다. – 본문 중에서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한국 노동운동의 주역으로 등장했던 대공장 남성 노동자들의 역할은 한계에 봉착했으며 새로운 노동운동의 주체 형성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저자는 배제된 노동자들과 함께할 수 있는 다양한 실천 방안을 제안한다.
조직 방식도 과거 공장 중심, 노동자 밀집 지역 중심이 아니라 생활공간으로서의 지역과 인터넷 같은 사이버상의 다양한 공간을 활용하는 방식을 말하고 있다. 연봉이 높은 대공장 정규직과 가난한 수많은 배제된 노동자들이 현실의 차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다양한 만남의 공간을 만들어서 그곳에서 현실의 모순과 차별을 극복하자는 제안이다.
여기서 만남은 공간적 차원과 함께 시간적 차원도 함축하고 있다. 기존 노조운동과 미래 노동자들의 공간인 대학 간의 만남도 ‘만남의 조직학’에서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저자는 현장 경험과 고민을 토대로 해 이에 대한 다양하고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저자는 이 책에서 대공장 노조에 대한 비판적 성찰, 새로운 노동운동 주체로서의 ‘배제된 노동자’들과 이들과 함께 하기 위한 ‘만남의 조직학’에 대한 내용과 함께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의식과 행태를 분석한 결과를 흥미롭게 서술하고 있다.
아파트 값이 올라갈 것 같아서 박근혜를 찍는 노동자들, 높은 수준의 연봉이지만 행복하지 못한 노동자들, 돈과 삶의 질의 ‘부등가 교환’ 현장, 가족으로부터도 소외되고 자기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지 못한 채, 설령 그런 공간이 있다 하더라도 견디기 어려워하는 정규직 대공장 노동자들의 실상을 다양한 사례를 통해 실감나게 설명하고 있다.
회사 동료 노동자들과 술을 마시면서 진솔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이런 대화가 오갔다.“세상 참 살기 퍽퍽한데 우리는 대기업 정규직이어서 참 다행이야.”그때 한 동료가 이렇게 말했다.“돈은 받을 만큼 받는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사는 게 힘들지?”그 순간 잠시 대화가 끊겼다.아마도 모두의 머릿속에는 ‘과연 나는 행복한가’라는 의문이 강하게 솟아오른 것이리라.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해방’, ‘인간다운 삶’을 외쳐왔던 노동자들의 꿈은 실현되었나? – 본문 중에서
돈 버는 맛도 중요하지만 ‘노는 맛, 쉬는 법’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저자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 보다 ‘이기적’이 되고, 사회의 진보적 발전을 위해 대공장 정규직 중심성을 극복해 ‘진보적’이 돼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이 책에서 내 나름의 멋진 꿈을 꾸었다.“혼자 꾸는 꿈은 단지 꿈일 뿐이지만 함께 꿈을 꾸면 현실이 된다.”함께 꿈을 꾸었으면 좋겠다. 지금은 꿈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꿈을 향해 정면으로 돌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 – 본문 중에서

출처 http://www.redian.org/archive/117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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엥겔스의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라는 책이 있다. 1800년대 중반 영국 노동자계급의 노동조건과 생활상을 분석하고 운동 방향을 제시한 책이다. 그로부터 100년이 흐른 유럽에서 더는 노동운동 지표로 활용되지 않았다. 노동자계급의 처지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논리체계가 구축되기 시작하던 1980년대 한국 노동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한국 노동자계급의 상태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80년대 한국 노동자계급 다수는 재산이 없는 무산계급이었다.

그로부터 한국 노동운동에는 30년이 축적됐다. 민주노조운동이 꽃피고 자본·정권에 맞서 치열하게 싸웠다. 노동자계급의 임금·복지·노동조건은 향상됐다. 그 결과 한국 노동자계급의 상태가 바뀌었다. 착취의 쇠사슬밖에 잃을 것이 없던 무산계급에서 음식물 쓰레기를 남기는 처지로 안정됐다. 중심부 노동자는 이 체제에서 지킬 것이 더 많은 집단으로 계층 상승했다.

그러나 노동운동은 한국 노동자계급의 바뀐 상태를 분석하지 않았다. 계급·계층의 상태에 근거하지 않다 보니, 노동운동의 주장과 투쟁은 갈수록 메아리 없는 아우성이 됐다. 노동자계급 처지가 바뀌었으면 거기에 적합한 실천대안을 내놓아야 하는데, 노동운동은 운동이 출발할 때, 그러니까 노동자계급의 과거 상태를 근거로 시종일관 주장하고 투쟁했다. 바뀐 처지의 노동자계급에게 먹힐 턱이 없었다. 아직도 그러고 있다.

한국 노동자계급의 바뀐 현재 상태를 분석한 글이 왜 없을까 답답했다. 그런 작업을 할 수 있을 만한 몇몇에게 제안도 해 봤다. 노동자계급의 상태에 근거해야 노동운동 실천이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세상을 들었다 놓을 만큼 위세 떨치던 민주노총 투쟁력이 후퇴하는 근저에 무엇이 있을까, 알고 싶었다.

오랫동안 답답증에 시달리던 상황에서 반가운 책이 나왔다. 받아드는 순간 가슴이 뛰었다. 학생운동을 거쳐 노동해방의 꿈을 품고 공장에 들어가 두 번이나 감옥에 갔던 운동가, 필시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를 읽으며 노동해방의 꿈을 키웠을 이범연이 현장의 생생한 상황을 엮었다. <위장취업자에서 늙은 노동자로 어언 30년>이다. 부제는 "내부자 눈으로 본 대기업 정규직노조 & 노동자"다. 한국지엠 현장의 조합원과 노조 상태를 다룬 책인데, 다른 중심부 사업장 노동자 상태나 노동조합 모습도 다르지 않으리라. 그래도 한국지엠의 노조·조합원은 대우자동차 시절부터 투쟁 중심에 섰던 단위다.

민주노총의 지금까지와 같은 방식의 투쟁이 왜 현장에서 먹히지 않는지, 최근에 공공부문에서 일부 정규직이 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반대하는지에 대한 단서가 이 책에 있다. 한 꼭지 소개한다.

『나는 몇 번의 선거를 겪으면서 정치적으로 보수적 흐름과 진보적 흐름의 중간에 투기적 욕망에 뿌리를 둔 이해관계에 따라 투표하는 흐름이 있다는 것을 느꼈고, 이 흐름이 선거 결과를 좌우한다고 확신하게 됐다. (…) 오래전에 같은 서구에 사는 조합원들과 술 한잔 할 기회가 있었다. 누군가 말했다. “나는 집값 때문에 박근혜 찍었어.” “솔직히 나도 박근혜 찍었어.” 예상보다 많은 조합원들이 박근혜를 찍었다고 했다. 투기적 욕망은 현 지배체제를 정당화시키고 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부자들의 욕망에 가난한 자들의 욕망이 포획되고, 그 앞에 줄을 세우기 때문이다. 반면에 가난에 대한 공감은 사회를 바꾸는 힘으로 작동한다. (…) 문제는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에게 그런 공감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 소유로부터 초월해야 하는 운동가로서 이범연은 자신의 흐트러짐을 드러내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솔직하게 고백한다. 경의를 표한다.

『한국 사회에서 집의 의미는 남다르다. 집은 재산과 동의어이고 대부분 사람들에게 재산을 유지하고 증식시키는 유일한 수단이기도 하다. 나 역시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나는 30년 동안 열심히 집을 키워 왔다. 운도 따르고 해서 전세 1천만원짜리 반지하방에서 시작해서 34평 아파트까지 키웠다. 그런데도 아내와 나는 “그때 돈 좀 있어서 그 집을 샀으면 좀 벌었을 텐데…”라며 아쉬워하곤 한다.』

이범연의 고백은 중심부 사업장 노조활동가들의 평균상태일 것이다. 아니 노조 바깥의 노동운동가 다수도 실제로는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런 처지의 활동가에게 과거 방식의 논리체계가 먹힐 수 있겠는가.

노동현장에서 제2, 제3의 이범연이 이어지기를 바란다. 이런 솔직하고 생생한 글이 계속 나와야 한다. 그래야 노동운동이 제대로 방향을 잡을 수 있다. 정신적으로 게을러터진 한국 노동운동 풍토에서 많이 팔리지는 않겠지만, 누군가에게 운동의 소중한 자산이 될 것이다.

노동운동 현 상태가 답답하다면 꼭 읽어 보시라. 노동운동 전환을 고민한다면 반드시 읽어 보시라. 이론서가 아니라서 술술 넘어가는 책이다. 그러면서 진한 여운을 남기는 책이다. 현 시기 활동가의 필독서다.

노동운동가 (jshan8964@gmail.com)  
한석호 labortoday
출처 http://m.labor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8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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