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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9일 화요일

악의 평범성 /정영인

전문 의료인을 양성하는 직업교육은 대학병원이 수행하는 핵심적인 기능의 하나다. 여기에는 전문직업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소양과 윤리 및 비판적 사유 능력의 함양이 포함된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대학병원들은 이러한 기능을 원활히 잘 수행해왔을까? 최근 언론에 공개되면서 시민사회를 경악하게 만든 한 대학병원의 폭력 사건은 일반인이 대학병원에 가졌던 이러한 기대에 심각한 회의를 느끼게 했다. 의료기술의 괄목한 성장에도 불구하고 대학병원의 조직문화는 아직도 중세시대 봉건적인 도제적 특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수직적이고 획일적인 질서에 맹목적으로 순응하고 무비판적인 조직문화에서 그렇게 읽힌다. 

우리나라에서 대학병원은 군대에 버금가는 강고한 위계질서와 폐쇄성을 특징으로 하는 조직으로 간주된다. 교수와 전공의 간에는 말할 것도 없고 전공의 사이에서도 연차에 따라 확고한 위계질서가 존재한다. 지도하고 지도를 받는 이들 간의 관계적 지위에서 위계질서는 불가피한 면이 있다. 그렇다고 공적인 업무상의 관계적 우위가 수평적 인간관계와 소통이라는 민주적 가치와 어긋나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대학병원의 조직문화는 업무적인 관계적 지위가 사적 영역까지 확대되어 공사 구분이 희미해지면서 자율적 개인은 사라지고 전체주의적인 파쇼적 행태를 많이 띤다. 실제로 대학병원에서는 권위와 권위주의를 혼동해서 수평적인 민주적 가치가 실종되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난다. 지적 수준이나 교육 수준이 무색할 정도로 조직문화가 획일적이고 체제 순응적이며 무비판적이다. 대학병원의 조직이 마치 조폭사회 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을 정도다.

중세시대부터 의사는 대학이라는 고등교육제도를 통해 양성되었다. 당시 대학에서는 철학, 신학, 법학, 그리고 의학의 네 과목만 가르쳤다. 중세 사회를 떠받치는 지식인으로서 종교인과 법률가 및 의사는 무엇보다도 기본 소양으로 철학적 교양을 요구받았다. 의사가 단순히 기술적 장인에 머물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의사들조차도 마치 의사가 도제제도라는 직업교육체제를 통해 양성되었던 것으로 오해하고 스스로 장인과 도제의 지위로 자리매김하는 경향이 있다. 작금의 독특한 대학병원의 파쇼적 조직문화는 결과적으로 도제제도의 잔재로 이해되면서 관대하게 받아들여진다. 

이번 대학병원의 폭력 사건은 특정 병원의 특정 교수에 의해서 일어난 우발적인 일탈적 행위가 아니다. 이런 행태는 폭력의 정도에서 차이가 있을지언정 많은 대학병원에서 심심찮게 반복적이며 지속해서 있었던 일이다. 사회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전문가 집단에서 일어났다는 게 도저히 믿기질 않는 폭력 행위도 따지고 보면 대학병원의 파쇼적 조직문화에서 잉태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폭력의 가해자 또한 피해자 못지않은 파쇼적 조직문화의 희생자이다. 

민주적 가치가 보편적인 현대 사회에서 아직도 전근대적인 파쇼적 권위주의가 대학병원을 지배한다는 게 무척이나 시대착오적이다. 필자 주위에는 그런 파쇼적 권위주의에 젖어 있거나 그것에 비판 없이 순응하는 동료가 적잖게 존재한다. 무비판적 순응주의는 파쇼적 권위주의를 지속해서 유지시키는 자양분이다. 그 때문에 비판적 성찰은 지식인이 갖추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소양이 되어야 한다.


20세기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반인륜적 행태를 보인 나치 부역자들이 포악한 성정을 가진 악인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하고 가정적인 사람이었다는 점에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악행에 아무런 죄의식도 느끼지 않고 상부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했을 뿐이었다. 악행은 악인이 아닌 상부의 명령에 순응한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졌다. 바로 ‘악의 평범성’이다. 그래서 아렌트는 비판적 사유가 결여된 사람들에게 “사유는 능력이 아니라 의무다”라는 경구를 남겼다. 이번 대학병원 폭력사건의 당사자도 알고 보면 지극히 평범한 의사이다. 파쇼적 집단을 벗어나면.

필자는 전공의 선발 면접시험에서 항상 던지는 질문이 있다. “당신은 당신의 상사로부터 부당한 지시를 받았을 때 어떻게 하겠느냐?” 필자가 속한 집단에는 아직도 이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는 동료들이 있다. 시민사회에서 비판적 사유는 능력이 아니라 의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산대 의전원 교수·정신과 전문의 
출처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1700&key=20171219.22030007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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