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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0일 수요일

인문학자들을 위한 집과 밥을 짓자 / 천정환 성균관대 국문학 교수

얼마 전 인문학을 공부하는 후배들과 함께 저녁밥을 먹다 화제가 어둡고 답답한 데로 흘렀다. 누군가에겐 이제 별로 신선하지도 설득력 있지 않을지도 모를, 한국 인문학자들의 고용불안과 가난 문제였다. 
모 대학 연구교수로 있다가 국책 사업이 종료된 후 이번 가을부터 본격적으로 실업자 신세가 된 후배는 이제 40대 중반이다. 그는, ‘퇴직금 덕분에 통장 잔액이 오랜만에 몇 백 만원이라 기쁘다’(?)면서, 이제 인생을 완전히 리셋해야 할지 모른다는 사실을 두렵게 깨닫고 있다 했다.
내가 아는 그는 성실하고 재능 있는 학자로서 독보적인 연구업적도 많이 쌓아왔다. 그러나 그가 연구하고 글 쓸 자리는 오늘날 한국 대학에는 없다. 동석한 다른 30대 연구자들도 아직은 공부하고 아이들을 가르치며 살아갈 희망을 포기하진 않았지만, ‘무슨 일이든 한다’는 각오를 갖고 있다 했다.
그래서 이미 다른 길을 가고 있는 인문학자들 이야기도 자연스레 화제가 되었다. 대리 운전기사를 하고 있는 박사수료생,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한다는 박사, 동네에 구멍가게를 열었던 모 교수 등.
아마 앞으로 우리는, ‘인구절벽’이 수도권 대학에도 들이닥친다는 몇 년 사이에, 인문학 석·박사 출신의 대리기사·일용직 노동자·서비스 노동자·영세 자영업자들을 흔하게 보게 될 것이다. 이미 ‘알바’로는 많은 젊은 인문학자가 험한 일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물론 그런 일들을 ‘인문학 하기’에 대비시키려거나 폄하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연구자나 석·박사 학위 소지자라 해서 육체노동에 종사하지 말라는 법이 없고, 그들도 세상의 평범한 사람들처럼 가진 몸뚱이와 재주를 다 활용하여 어떤 일이라도 해서 먹고살아야 한다.
그럼에도 대규모 대학 구조조정을 겪고 있는 우리 사회는 이들이 가진 능력이나 쌓은 많은 지식이 어떻게 쓰이는 게 사회적으로 더 의미 있는지를 다시 물어야 할 때를 만났다. 어떤 생계를 택하는 것은 개인적 차원의 일이지만, 개인들이 가진 능력을 효과적으로 배치하는 것은 사회 전체의 문제다. 
이 나라는 여전히 낮고 부족한 인문·사회과학 수준을 올리고, 사회적으로 필요한 앎을 생산하는 일이 필요하지 않은가? 신자유주의 양극화와 디지털 문화의 고도화가 야기하는 새로운 인간 소외에 대처하여, 아이들이 ‘일베’가 되지 않도록 ‘마음’이라는 것에 대해 가르치고, 나이 든 어른들은 ‘태극기부대’를 멀리하도록 하는 일은 중요하지 않은가? 세계적이라는 한국의 문학·음악·영화 산업을 근저에서 더 단단하게 만들고, 더 좋고 많은 외국의 책과 이론을 번역하는 일들은 누가 어떻게 해야 할까? 
세상 전반에 대한 지식과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진 인재는 어떤 학문 분야와 기관에서 길러낼 수 있는가? 여전히 개혁과 ‘인간 안보’가 절실한 이 한반도에서 필요한 담론과 철학은 어디서 생산되어야 할까? 
인문학적 능력은 한 사회의 근본적인 자유·평등의 수준, 즉 민주주의와 품격에 관련된다. 기술과학과 자본주의의 ‘고삐 없는’ 발전에 대처할 개별자들의 실존과 사회적 힘도 인문학에서 나올 터이다.
그런 역량을 제대로 기르고 배치해서 쓰이게 하는 것은 우선은 국가와 대학이 할 일이다. 하지만 동시에 인문학 연구자들 스스로의 반성과 자기 구제 노력이 필요하다.
한국 인문학은 고답적인 주제로부터 나와 다수의 생명과 인간이 필요로 하는 새롭고 실천적인 학문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인문학자들이 반드시 대학 안에서만 가르치고 공부하란 법도 없고, 논문 쓰기에만 매몰된 태도도 고쳐야 한다. 
그러니 발상의 전환은 교육부와 대학 당국자들은 물론 모든 인문학 연구자와 연구자 조직에 필요하다. 학술지 논문을 생산하는 일 외에는 사실상 존재의미를 잃어버린 학회를 넘고, 생계와 학자로서의 자존감이 동시에 급박하게 악화되고 있는 연구자들을 위해 다양한 활동과 사업이 가능한 조직체가 필요하다. 수유+너머, 철학아카데미, 인문학협동조합 등 자율적 인문학 조직의 경험과 철학을 발전적으로 계승하여 규모 있고 안정적인 새로운 집(플랫폼)을 만들 필요가 있다.
이런 일에 그동안 큰 기득권을 누린 70·80년대 학번(특히 정규직 교수)들이 후속세대와 자기 분야 학문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나서야 한다. 교수가 된 지 오래됐을수록, 그리고 소위 주요 대학 출신들일수록 더 많은 책임이 있다. 즉 서울대, 연·고대의 70년대 학번들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고, 다음으로 80년대 초반 학번들 그 다음으로 80년대 후반 학번들 순서다. 맹성과 행동을 요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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