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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3일 수요일

1987 감상기/ 이부영 선생 페이스북에서

딸과 사위 그리고 외손자녀 5명과 1987 영화를 봤습니다. 두번쨉니다. 사위 부부는 그렇다치고 중3에서 초1 아이들 다섯과 복잡하기 이를데 없는 그 영화를 보고 설명하기란 제가 요령이 없기도 하려니와 불가능했습니다. 

초5 손녀 왈 "할아버지 뭘 잘못해서 감옥갔어요?"
 "?"
초3 손자 왈 "감옥 안에서 뭘 하고 놀아요?" 
"?"
초1 손녀 왈 "감옥 안에서 소리지르고 그러면 야단 안맞아요? 
"?"
이 아이들에게는 만화영화나 게임영화를 보여줘야지 고문이 어떻고 데모가 어떻고 그런 얘기는 씨도 안 먹힙니다. "경찰 아저씨들이 왜 대학생 형과 누나들을 막 패요?" 이런 시대를 이 아이들이 이해하기는 이미 불가능합니다.
아내와 딸은 눈물 콧물 닦으면서 봅니다. 그 시대의 아픔이 체화된 사람들이라야 공감하고 분노도 합니다. 

신입생 연희가 잘 생긴 이한열에게 호감을 가지면서도 광주항쟁 비디오를 본 뒤에 "총 가진 군인들에게 맨 손으로 대항해서 어쩌자는 거지요? 그래서 죽은 다음에 뒤에 남은 가족들은 어쩌라구요?" 이렇게 쏘아붙입니다. 이한열은 "나도 알아. 그래도 참을 수 없어서 나가는거야." 라고 맥없이 대답합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 대학생 친구들 사이에 이와 비슷한 대화가 수없이 오갔을 겁니다. 그러나 한열이가 최루탄 직격에 맞아 피흘리며 쓰러지는 신문 머릿기사 사진을 본 연희는 미친듯이 데모대를 향해서 뛰어나갑니다. 착한 심성을 가진 보통사람들이라면 권력 앞에서는 뒤로 움츠러들었다가도 마지막 인내의 한계를 넘어서면서 일어서는게 아닐까 합니다. 대다수 광주시민들도 그랬을 겁니다.
박종철 학생을 고문살해한 남영동 박처원 일당은 수사관 2명을 제물로 감옥에 던져넣고 조작은폐로 덮어버리려고 합니다. 조한경 경위가 "비록 내가 남영동에서 근무했지만 이번 사건의 주범이 아닌데 살인자의 누명을 뒤집어쓸 수는 없어요. 이 돈을 받고 고문살인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내 자식이 고문살인자의 아들 소리를 듣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라고 1억원 짜리 통장를 내미는 박처원에게 반항합니다. 고문살인자 3명이 더 있다는 '진실'이 드러나면서 이 '진실'을 감옥 밖으로 알려서 전두환 군사독재의 친인공노할 죄악을 세상에 고발하려는 은밀한 노력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진행되었습니다. 한재동 교도관은 도피자 전병용 동료를 만나기 위해 세 개의 비밀서신(비들기)을 주머니에 넣고 다녔습니다. 그 편지들을 전병용씨에게 전달했고 전병용씨는 김정남 씨에게 전달한지 이틀만에 체포되었습니다. 편지들을 소지한 채 체포되었더라면 한재동 이부영 등은 꼼짝못하고 남영동으로 끌려갔겠지요. 무엇보다도 고문조작은폐 죄상은 정말 묻혔을 겁니다.
감옥에 갇혀서 '진실'이 만천하에 드러나기를 기다리면서 분초를 세고 있던 심경, 잘못 되어 역추적당했을 경우에는 어쩔까 했던 심경도 이제 30여년 전 세월 속에 무디어져 갑니다. 편지를 전달받아 한치 어긋남없이 손질한 김정남 동지, 함세웅 신부님과 김승훈 신부님도 얼마나 5.18광주항쟁 7주년을 맞아 노심초사했을지 감사한 마음 뿐입니다. 김정남 동지는 수많은 사람들이 톱니바퀴 처럼 한치의 어긋남 없이 '진실' 하나를 밝히기 위해 움직인 모습을 하늘의 오묘한 손길이 닿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던 일이라고 썼습니다. 하늘은 정녕 정의의 편이었습니다. 

몇몇 페친들이 1987 감상기를 써달라는 요청이 있어 몇자 썼습니다.

출처 https://www.facebook.com/buyounglee21/posts/1529373123814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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