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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8일 월요일

창립 20돌 맞은 여성문화이론연구소/ 김은형 한겨레 기자

“집을 나와, 명륜동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에 가는 여정은 꽤 길다. 지하철을 타고 4호선 혜화역 4번 출구로 나와 시끌벅적한 대명길을 걸어, 빌딩 사이에서 간판 없는 여성문화이론연구소를 찾는다. 이정표가 되어주는 디브이디(DVD)방 표지를 겨우 찾아, ‘설마 여기에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접어둔 채 계단을 올라 마침내 문을 열면, 맨 꼭대기 다락방에 여성문화이론연구소가 있다.”(<다락방 이야기>, 김은주)

주변 수많은 간판이 바뀌는 동안 한자리를 지켜온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여이연)가 20년을 맞았다. 여이연은 1997년 임옥희 경희대 교수, 고정갑희 한신대 교수 등 학계에서 주로 활동하던 여성연구자들이 상아탑의 한계에서 빠져나와 여성 문제를 본격적으로 함께 연구하기 위해 제도권 밖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여성주의 연구 공동체다. 그 이십년 역사가 단행본 <다락방 이야기>로 나왔다.

여이연은 재정 문제를 비롯해 크고 작은 위기를 겪으면서도 쉼없이 진행해온 강좌와 세미나, 책 작업들을 통해 페미니즘 논의를 축적해왔다. 2000년대 중반에는 광범위한 현장 연구를 바탕으로 ‘성노동’의 개념을 제시해 페미니즘 진영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 화두를 던지기도 했다. 
하지만 <다락방 이야기>는 짧지 않은 시간 단단하게 쌓인 결실을 전시하는 데 집중하지 않는다. 다락방을 오갔던 회원과 비회원 11명의 소소한 추억으로 시작해 여이연의 철학과 강좌, 그간 해왔던 세미나와 출판 기획들을 각각의 장에서 간결하게 소개한다. 마지막 장에서 임옥희와 고정갑희, 문은미, 박이은실, 나임윤경, 나영 등이 나눈 20주년 기념 좌담이 흥미롭다. 

임옥희 이사장은 최근 등장한 페미니즘 물결에 대해 “자칭 영-영페미니스트들은 여자만 안고 간다는 소리를 서슴없이 한다. 그런데 저렇게 무책임하고 무모한 소리를 할 수 있는 용기가 어디서 나오나, 시원하게 저런 식의 말을 얼마든지 내뱉을 수 있는 친구들이 하는 운동이라는 것이 그 이전 세대, 뭐든 굉장히 조심스럽고 순치되고 끊임없이 남성의 시선을 내 안에 내재화하고 있는 페미니스트들하고는 다르다”는 생각을 솔직하게 피력했다. 고정갑희 교수는 “뉴페미들의 대중적 등장 속에서 (…) 그동안 축적된 페미니스트들의 고민들을 어떻게 전달하고 대중적인 만남으로 바꿀 수 있는지, 이것이 여이연의 화두가 될 수 있는 것 같다”고 전망했다. 이러한 고민은 여이연의 <여/성이론> 2017년 겨울호 기획특집 ‘페미니즘 트러블; 매체, 주체, 논쟁’에도 담겼다.

이 가운데 이른바 ‘메갈리아 논쟁’의 중심에서 커뮤니티의 명멸을 온몸으로 체험한 넷페미니스트 홍혜은의 글 ‘분절될 수 없는 것들: ‘넷페미’와 ‘꿘페미’(운동권 페미니스트)의 이항대립을 넘어서’가 특히 눈길을 끈다. 2015년부터 페이스북 그룹을 운영하는 ‘넷페미’로 활동하며 메갈리아 담론에서 파생된 소수자 혐오를 비판했다가 이른바 ‘진짜 페미니즘’ 논쟁에 휘말리며 ‘메갈’과 ‘반메갈’의 집단적 공격을 받았던 사건의 진행을 담담히 기술했다. 글쓴이는 하나의 정리된 결론을 도출하지는 않지만 온라인 공간의 가능성은 오프라인으로 확장되어야 하며 “우리는 연결될수록 강할” 것이라고 세대간, 다양한 층위간의 좀 더 강력한 소통과 연대의 희망을 밝힌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826620.html#csidx38caca958672b3498341c8be24db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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