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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8일 월요일

6월항쟁, 그 미완성의 질곡 / 권영숙

등록 :2012-06-10 19:21

반란수괴로 대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전직 대통령이 최근 육군사관학교에서 생도들을 사열하는 장면이 공개돼 인터넷이 발칵 뒤집혔다. 6·10 항쟁을 코앞에 두고 벌어진 일이라 더욱 공분을 샀다. 나 역시 1980년대의 엄혹한 시절을 보냈기에 기막히다. 하지만 이 요란법석이 씁쓸하기도 하다. 전씨를 저리 활개치도록 최종적인 승인을 한 사람이 바로 김대중 당시 대통령 당선자였음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면복권을 하는 순간, 이런 날은 올 수도 있었으니, 이 일은 결국 한국의 민주주의자들이 자초한 것이다. 이것도 ‘의도치 않은 결과’라 할 것인가.

5공 세력에 대한 단죄는 6월항쟁 10년 후인 97년 뒤늦게 이뤄졌다. 한보사태와 민심이반 등이 없었다면 이마저 힘들었을 것이다. 그때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이 한보사태로 구속되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진행됐던 전두환 등 쿠데타 세력에 대한 단죄는 4월 대법원 유죄 확정판결로 종결된다. 하지만 8개월도 안 되어 이들은 사면복권됐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는 당선되자마자 첫번째로 김영삼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이를 합의했다. 당시 권력교체기에 신구 권력엘리트 간의 타협의 결과라 할 만하다.

그러나 알고 보면 민주화 후 25년이 그랬다. 그리고 87년 6월항쟁이 그랬다. 바로 엘리트 간의 협약에 기반한 보수와 중도의 동거체제이다. 한국의 민주화 이행은 기묘하다. 6·10 항쟁으로 집권세력을 무너뜨린 정치혁명이지만, 동시에 ‘6·29 선언’이라는 권력엘리트의 양보조처를 자유주의 정치세력이 수용하면서 이뤄진 이른바 엘리트 간의 협약에 의한 이행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미국 동아태 국무부 차관보이자 대표적인 네오콘인 울포위츠의 발언이 주목된다. 울포위츠는 필리핀과 한국의 민주화 혁명을 신보수주의 가치의 확산이라는 차원에서 적극 지지해 자신들이 이루어낸 개가라고 말한 바 있다. 한국의 자유주의적 민주화는 미국에는 신보수주의(결국 신자유주의) 체제를 신흥시장경제로 확산시키는 어쩌면 최상의 정치적 틀이었을 것이다. 이를 학계에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민주화의 ‘이중전환’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단지 미국만이랴. 한국 역시 마찬가지다. 민주화운동 블록은 하나가 아니었다. 그 지도부였던 ‘국본’에는 급진좌파로부터 혁명적 민주주의, 보수 자유주의까지 혼재했다. 그러나 그 성과는 재야와 연합한 자유주의 세력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다음의 정치권력을 보장하는 선거게임의 유지였다. 민주화 이행 이후 한국의 민주주의는 시종 보수적이었다. 구 권위주의 엘리트는 당연히 보수적이었다. 하지만 신흥 엘리트 역시 보수적이었다. 그들은 민주주의의 심화보다 정치적 민주주의의 공고화를, 민주주의의 이념적 진보보다 최소 민주주의를 원했다. 또 그들은 신자유주의를 경제적 민주주의의 일부로 신봉했다. 이리하여 ‘이중전환’은 시차를 두고 87년과 97년을 경과하며 결국 이뤄졌다. 반면에 87년 6월혁명은 미완으로 종결됐다. 아니 영원히 미완성이어야 했다.

오늘 우리는 그 미완의 민주주의가 남긴 질곡을 본다.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가 고착시킨 것들이다. 노동배제의 민주주의, 탈이념화된 민주주의, 제3의 길을 허용하지 않는 보수와 중도세력의 동거체제, 나아가 사회경제적 민주주의 없는 최소의 정치적 민주주의 체제가 바로 그것이다. ‘6·10 항쟁’ 25주년이다. 여전히 우리 가슴을 벅차게 하지만, 전두환의 육사 사열만큼이나 씁쓸하게 만드는 미완의 혁명. 그래서 해마다 6월은 우리에게 환희로 그리고 아픈 좌절로 다가올 것이다.

권영숙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 선임연구원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36947.html#csidxa2f374a35e3c3a39e039c2315e72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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