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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2일 화요일

개꿈을 꾸다/ 강금실 법무법인 원 변호사·포럼 지구와사람 대표

보통 잠결에 줄거리도 제대로 이어지지 않고 잡다하게 꾸는 꿈을 개꿈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지난해 연말 즈음 함께 사는 언니가 꿈속에 진짜로 개가 나타난 개꿈을 꾸었다. 꿈에 언니는 초록빛이 펼쳐진 어느 정원에 서 있었다. 나지막한 정원수들이 가지런히 앞으로 늘어서 있는데 저 끝쪽에 죽은 나무 몇 그루를 사람들이 파내고 새로 묘목을 심었다. 그 장면을 보고 있는데 시커멓고 커다란 덩치의 개 서너 마리가 나타나서 주위를 에워쌌다. 이 꿈이야기를 듣고 나는 얼른 오만원권 지폐 한 장에 꿈을 샀다. 나무를 새로 심는 것도 상서롭거니와 마침 곧 다가올 새해가 개띠해라 틀림없이 길몽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지난해는 정유년 닭띠해였고 나는 1957년생으로 환갑을 맞았다. 환갑은 과거엔 넘기기 쉽지 않은 삶과 죽음의 경계나이였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서울 시내에는 환갑잔치 전문 대형회관이 흥행했다. 지금은 100세시대를 넘본다 하지만, 몸으로 찾아오는 여러 증상들을 보면 환갑은 노년으로 진입하는 시점임이 틀림없다. 마음으로도 앞으로 남은 날들의 끝자락을 바라보게 했다. 이제 내게 한 단락의 시간이 남아있다고 생각했다. 지금 하는 일들만 잘 마무리하고, 죽기 전에 은거하는 기회를 갖고 삶을 정리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도 길몽에 기대를 거는 걸 보니, 살아있는 존재는 역시 매순간 희망하게 돼있나 보다. 
남은 삶을 바라보며 꿈꾼다 한들, 태어나는 것도 죽는 것도 사람 맘대로 되는 게 아니다. 삶에 주어지는 조건과 환경도 천차만별하고 선택의 여지도 별로 없다. 요즘은 전 지구적 삶의 거대한 급류에 정신없이 휩쓸려가는 느낌이 든다. 그럼에도 주어진 삶을 살아내야 하고, 삶의 의미를 찾아 길을 만들어가야 한다. 삶을 살게 하는 것은 생명이 지닌 고유한 힘이고,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은 고유한 반성능력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삶은 무엇이 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가치를 실현하는 길에 놓여 있고, 꿈이 그 길을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꿈의 설계가 잘못되거나, 꿈을 부서뜨리는 장애들에 부딪힐 때, 개인이나 공동체는 깊은 좌절과 혼란을 겪게 된다. 
20대 때, 나는 헝가리 출신 미학자 게오르그 루카치(1885~1971)의 <소설의 이론> 속 첫 문단의 글을 무척 좋아했다.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이런 시대에 있어서 모든 것은 새로우면서도 친숙하며, 또 모험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결국은 자신의 소유로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는 무한히 광대하지만 마치 자기 집에 있는 것처럼 아늑한데, 왜냐하면 영혼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은 별들이 발하고 있는 빛과 본질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 글은 고대 그리스 시대를 완결된 문화로 묘사한 것이다. 이 글에서는 정신과 삶의 세계가 일치하고 창공에 빛나는 별을 품은 우주에까지 삶과 꿈의 일체감을 느끼는 존재의 가득찬 풍요로움이 느껴진다. 루카치는 고대 그리스 시대를 선험적 좌표가 있고 서사시적 총체성이 유지되던 세계라 하면서 인간 영혼이 안주할 수 있었던 때로 보았다. 이에 반해 근대 자본주의 시대는 선험적 좌표와 총체성이 무너진 세계라고 보았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진 1914년에 이 책을 구상했다고 한다. 당시 독일 사회민주당을 비롯한 좌파 지식인들도, 청년들도, 모두 전쟁을 지지하고 열광했다. 그러나 그는 전쟁이 ‘도덕적 가치가 완전히 타락한 세계상황’을 초래한 서구문명의 위기의 해법이 못된다는 이유로 적극 반대했다. 이런 절망적 상황 속에서 그는 유토피아적 희망을 품고 이 책을 썼다. 나중에는 1917년의 러시아 사회주의혁명을 해답으로 믿기도 했다. 그러나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소련)은 1991년에 해체됐다. 
젊은 시절 좋아하던 이 글을 다시 들춰보니 한 세기 전의 사람이 절망하고 또 꿈꾸며 삶을 붙잡고 뒤척이던 모습이 그려진다. 꿈이 현실화된다 해서 유토피아가 도래하지는 않으며 그럼에도 의미를 찾아가는 삶의 길은 끝나지 않는다. 루카치가 당시 세계의 붕괴 앞에서 고민하고 희망을 찾던 그 시기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세계는 어디쯤 와 있으며 지금 이 시기에 살고 있는 사람은 무슨 꿈을 꾸어야 하는 걸까. 
그러고 보니 나는 한국전쟁 후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이다. 초등학교 시절에 라면과 커피, 식빵이 처음 생산됐다. 그 무렵부터 지금까지 50여년 동안 산업화과정과 함께 성장했다. 지금 우리 사회를 주도하고 있는 세대가 대체로 나와 같은 60대 전후라고 본다면, 이 세대는 삶의 서사적 총체성과 선험적 좌표를 갖추어 인간 영혼이 안주할 수 있는 정신적 고향으로서 전거가 될 만한 세계를 갖고 있지 않다. 이 세대는 한반도 분단 이전의 체험도 없다. 70년 넘게 지속되는 분단은 공간적·정신적 장애로 진정한 발전을 가로막고 있지만, 북핵 문제로 위기가 가속화되고 있는 암담한 상황이다. 이 세대는 꿈이 불명확하고 온전한 형태로 존재할 수 없었다. 우리는 지금의 청년세대에게 꿈을 전해주지 못했다. 정신과 삶의 세계의 일치, 나아가 별을 품는 우주에까지 일체감을 느끼는 존재의 행복감을 느낄 기회가 없었다. 또한 행복감의 원체험이 없기에 갈망이나, 상실의 절망감도 별로 없는 듯하다.
새로운 해를 맞는 지금, 우리는 근대화를 이끌었던 패러다임이 붕괴되는 과정을 겪고 있다. 이 시대에 ‘성장’만큼 꿈으로 군림한 단어가 또 있을까. 그러나 인간의 물질적 성장은 정확한 비례치로 지구를 파괴했고, 기후변화를 초래했고, 전 지구적 인구과잉을 초래했다. 이제는 가급적 빨리 에너지전환을 해서 기후변화시대에 대처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했다. 이로 인해 우리 삶과 문화가 성장시대로부터 어떻게 바뀔 것인지에 대해 예측할 능력이 부족해서 좀처럼 꿈을 그려내기가 어려워 뒤척인다. 우선은 ‘성장’이라는 단어 앞에 ‘정신적’이라는 말을 얹어본다. 우선은 아주 크게 성장의 방향선회를 해야 할 것 같아서이다.
원문보기: 
https://goo.gl/jLxBw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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