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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17일 수요일

유가학단의 적, 영원한 비주류 묵가와 양주/ 김갑수 페이스북에서

유가학단의 적, 영원한 비주류 묵가와 양주
역사를 바꿀 수 있는 100권의 책 - 95

《조선왕조실록》을 읽다 보면 조선의 유학자들이 양주와 묵가를 비난하는 말이 자주 보인다. 양주와 묵자의 사상은 유학과는 크게 달라서 공존하기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조선의 유학자들은 양주와 묵가를 기피하고 혐오했다.

일찍이 맹자는 “묵가의 무리는 군신과 부자의 도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라고 비판했다. 순자의 묵가 공격은 더욱 논리적이었다. “묵자는 실용에 가려서 예문을 알지 못했다. 실용만을 도라고 하면 사람들은 모두 공리만을 추구할 것이다. 이는 도의 한 모퉁이일 뿐이다.”

사실 이렇게 된 데에는 묵가의 유가 공격이 먼저 있었기 때문이다. 묵가의 시조 묵적은 공자 바로 다음 시기의 사람으로서 맹자나 순자보다 이른 시대의 인물로 추정된다. 근검과 절약을 강조했던 묵가는 유가의 천명론과 허례허식에 경멸을 보냈다. 묵가는 유가학단을 싸잡아 ‘속유의 무리’라고 비난했다.

《한비자》에는 “세간에 이름 높은 학파로 유가와 묵가가 있다, 유학의 으뜸은 공구(孔丘, 공자)요, 묵가의 으뜸은 묵적(墨翟)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요컨대 당대 약 100년 동안 묵가는 유가와 대등한 세를 형성한 양대 학단이었다.

‘묵수(墨守)’라는 말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이는 묵적지수(墨翟之守)의 줄임말인데, 글자대로 하면 ‘묵적이 (성을) 지켰다’는 뜻이다. 이 말은 자기 의견이나 주장을 견고하게 지켜 나간다는 좋은 뜻임에도 불구하고 융통성이 없어 답답하다는 투의 부정적 어감을 풍긴다.

묵적(BC 480 ~ ?)은 제자백가 중 묵가의 시조로서 묵자라고 경칭되는 인물이다. 공자가 인(仁), 순자가 예(禮), 맹자가 의(義)를 강조했다면, 묵자는 애(愛)를 강조했는데, 그의 애는 정확히 말해서 이타적인 애, 즉 겸애(兼愛)의 성격을 띠는 것이다.

다시 묵적지수로 논의를 돌리자면, 이 말에는 대단히 견고한 반전주의 논리가 들어 있다는 점이 간과되는 것 같다. 묵자는 사상 최초의 반전평화주의자로 꼽힌다. 묵자는 겸애를 그르치는 최악의 행위를 전쟁이라고 규정했다. 전쟁은 다수인 인민의 삶을 파탄내기 때문이다.

《중국철학사》를 저술한 펑유란은 “유가는 사대부, 법가는 신흥지주, 도가는 몰락 귀족, 묵가는 하층 평민층을 대표하는 사상이다.”라고 말했는데, 결과론적으로만 본다면 매우 그럴 듯한 분석인 것 같다. 묵자는 어떤 명분의 전쟁에도 반대하는 가운데, 다만 방어를 위한 전투의 필요성만을 인정했는데, 그것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묵적지수라는 말이었다.

묵자는 남의 과수원에 들어가 자두나 복숭아를 훔치는 일보다 더 나쁜 것은 남의 개, 닭, 돼지를 훔치는 일인데 그것은 남을 해롭게 한 것이 더 크기 때문이라고 했다. 즉 그는 타인을 해롭게 하는 것이 클수록 불인(不仁)의 정도가 더 심해진다고 보았다. 이렇게 따질 때 전쟁이야말로 최대의 불인이 되는 것이다.

묵자는 “사람을 한 명 죽이면 불의하고 10명 죽이면 10배로 불의하고 100명 죽이면 100배로 불의하다. 이 경우 천하의 군자들 모두 불의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남의 나라를 공격할 경우 불의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작은 불의를 저지르면 이를 비난하다가 전쟁을 일으키는 큰 불의를 보고는 비난은커녕 오히려 칭송하면서 ‘의’라고 말하는 자들, 즉 작은 불의와 큰 불의를 구분할 줄도 모르는 자들이 어찌 군자란 말인가?”라고 말했다.

근현대 제국주의 국가 영국과 미국은 걸핏하면 남의 나라를 침공하면서 명예를 위하여, 정의를 위하여, 자유를 위하여, 민주주의를 위하여 등을 주워섬겼다. 이는 한 마디로 말해서 예외 없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와 같은 것이다. 우리는 '묵적지수'의 방어전쟁 이외 그 어떤 전쟁에도 묵자처럼 반대의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묵가보다도 양주를 더 혐오했다. 그래도 묵가는 유가를 공격하기는 했지만 사상적으로 유가와 공통되는 점이 있다. 그러나 양주는 유학과는 공통되는 면이 없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양주를 지극히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이라고 여겼다.

우리는 기원전 3세기에 활동한 그리스 철학자 디오게네스(Diogenes Laertios) 는 알지만 양주(楊朱, BC 440?~360?)에 대해서는 거의 모른다. 양주는 중국 전국시대의 학자로서 ‘위아설(爲我說)’, 즉 이기적인 쾌락설을 주장했다. 그의 삶은 명확하지 않고 《장자》, 《열자》 등에 그 편린이 남아 있다. 그러나 맹자가 “양주·묵적(墨翟)의 말이 천하에 충만하였다.”고 지적한 것으로 미루어, 당시 양주학파는 나름 융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의미 있는 철학사상일지라도 국가 공동체의 권력이나 기득권에 방해되는 것들은 후대까지 계승되기가 어렵다. 사실 민본혁명론을 주장한 맹자만 하더라도 춘추전국시대는 물론 한, 당대까지도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다. 맹자가 부각된 것은 송대 이후의 일이었다.

디오게네스와 양주는 국가권력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양주가 그렇듯이 디오게네스에 관련된 기록도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우리는 ‘노숙자 디오게네스’와 ‘황제 알렉산드로스’의 일화를 알고 있다.

“내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는가?”

“아, 몸을 좀 비켜 폐하의 그림자를 치워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햇빛뿐입니다.”

이 말을 들은 황제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알렉산드로스가 아니라면 디오게네스 같은 사람이 되고 싶구나.”

하지만 그냥 넘어갈 디오게네스가 아니었다.
“제가 디오게네스가 아니라면 폐하가 아닌 그 어떤 사람이 되어도 좋겠습니다.”

이처럼 디오게네스는 그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고 세상에 대해 조롱과 독설을 서슴지 않았다. 이것은 장자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본질적인 점에서는 장자보다 양주와 더 닮았다. 디오게네스와 양주의 공통점은 일면 개인주의적이지만 ‘개체 중심적인 세계관’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가 있다.

拔一毛而利天下 不爲(발일모이리천하 불위)

몸의 털 한 올을 뽑아서 세상을 이롭게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 (《맹자》, 〈진심장〉 편에서 인용)

이는 양주가 남긴 말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다. 맹자는 양주의 핵심 사상인 위아(爲我), 즉 나를 가장 우선시해야 한다는 주장이 결국 사람과 짐승의 경계를 허물게 될 것으로 보아 혹독하게 비판했다. 맹자는 양주를 극단적인 이기주의자 또는 허용될 수 없는 혹세무민의 사설(邪說)로 보았던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도 양주의 입장은 지나친 점이 있어 보인다. 몸에서 털 한 올을 뽑는다고 해서 뭐가 그리 손해 보는 일이라고? 그런데 나라를 위해서 그것조차 하지 않겠다고 하니 너무한다고 생각될 수 있다. 특히 털 한 올과 나라의 비중을 고려하면 양주는 전혀 합리적인 사람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털 한 올을 글자 그대로가 아니라 나의 건강을 유지하고 나의 의지에 반해서 누구에 의해서도 훼손될 수 없는 ‘생명체의 상징’이라고 생각해보자. 일모(一毛)도 개인의 생명을 이루는 중요한 부분이므로 천하의 가치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생명의 관점에서 보면 일모는 천하와 대등하거나 더 소중할 수도 있다. 부국강병을 내세우는 국가주의자의 입장에서 보면 ‘나’는 희생해서라도 나라에 이바지해야 한다. 하지만 국가의 요구를 충실히 이행했지만 제대로 보답을 받지 못하는데도 계속해서 개인의 희생만 요구한다면, “내가 왜 나라를 위해서 희생해야 하는가?”라고 되물을 수가 있다. 양주는 바로 이러한 시대, 다수를 형성하는 개인들의 여망을 담아서 ‘위아’를 주장했던 것이다.

한비자는 양주의 사상을 물질의 가치를 가볍게 보고 생명의 가치를 높게 봐야 한다는 뜻의 ‘경물중생(輕物重生)’으로 규정했다. 이러한 한비자의 평가는 맹자의 비판에 비해서 단연 객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생명은 부분으로 나눌 수도 없고 어떤 외적 가치에 의해서 양도될 수도 없는 절대적 가치를 갖는다. 바로 이런 인식을 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어떠한 외부의 요구로부터 우리의 심신을 온전히 지키려는 ‘인권’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자각이 있어야 우리는 나의 심신을 스스로 통제하는 자유를 가지면서 내 생명의 주체가 될 수 있다. 국가보다 자기 생명을 중시한 양주의 글은 거의 소실되었지만, 사회와 국가의 힘에 굴하지 않고 생명의 온전한 가치를 내세웠다는 점에서 양주는 ‘대단히 독창적이고 인상적인 제자백가’였다는 평가를 내릴 수가 있다.

출처 
https://www.facebook.com/kimcapsu?fref=n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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