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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12일 금요일

촛불‘혁명’의 완성을 위해 무엇을 희망할 것인가?/ 백무산 시인, 울산저널 대표

한 해가 시작되는 날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누구나 아는 얘기지만 임의로 정해진 날이기에 물리적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날이다. 자연의 순환을 좇아 살던 농경시대에서는 낮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첫날인 동지나 땅 속 뿌리가 생동을 시작하는 입춘을 한 해의 시작으로 삼았던 적도 있었지만, 서양달력이 들어오면서 전통을 몰아내고 이상한 날로 굳어졌다. 그러나 도시생활이 자연 순환과 무관해지면서 어느 날인들 상관이 없게 되었다. 무한궤도를 돌고 있는 태양계에 어느 날이 첫날인지 무슨 상관이 있으랴. 의미 없는 날인 줄 뻔히 알면서도 누구나 희망이 다시 부활하기를 염원하고, 스스로를 축복하고자 해맞이 명소에는 올해도 성지 순례하듯 사람들로 들끓었다.

이러한 새해맞이를 지그문트 바우만은 “새해란 희망들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마다 열리는 축제”라고 했다. 희망이란 우리가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부활해야 할 그 무엇이다. 중국의 근대사상가 노신은 희망이란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본래 길이 없었으나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길이 되”어 새로운 희망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아직 한 번도 도래하지 않는 미래에 대한 이상”이 희망의 본질이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희망이 타인의 욕망과 집단 속의 다수의 심리에 끌려가지 않고 자신만의 깨끗한 희망을 품을 수 있기를 염원한다. 이미 여러 사람이 지나가 반들반들해진 ‘제도화’된 길은 희망의 길이 아니다. 아직 한 번도 도래하지 않은 길을 간다는 것은 삶이 창조적 상태에 놓이는 것을 의미한다. 임의로 정한 날이라고는 하지만, 지상의 어느 날도 결코 ‘아무 날’이 아닌 것이다. 사실 한 번도 같은 태양이 뜬 적이 없다. 지금 이 시간은 우주에서 한 번도 경과한 적이 없는 시간이다. 오늘 뜬 해는 아직 한 번도 뜬 적이 없는 해인 것이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지나간 뒤에 가서나 헤아리게 되고, 또다시 희망의 부활을 염원하고 되풀이 한다.

지난해 우리는 역사에 가보지 않은 길을 걸어 새로운 길은 열어 왔다. 오직 시민의 자발적인 의지와 열망을 모아 타오른 촛불로 대통령을 탄핵하고 새 정권을 탄생시켰다. 그랬기에 이를 ‘혁명’이라고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과거에 비추어보아도 시민의 자발성이 이처럼 꽃피운 적이 없기에 ‘혁명’의 이름에 값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1년이 지난 시점에서 좀 더 냉정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혁명’은 낡은 것에 대한 파괴의 과정만이 아니라 나아갈 길을 결정하고 만드는 일이기 때문에 여전히 진행형이다. 부두에 결박돼 있는 배를 풀어놓기만 한다고 항로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다. 방향과 진로가 올바르지 않으면 혁명일 수가 없고, 언제든 반혁명이 일어나거나 혁명을 무의미하게 소모해버릴 수도 있다. 그래서 혁명은 언제나 다른 이름으로 더렵혀지기도 한다. 촛불이 여러 면에서 초유의 기록을 세운 것은 사실이지만, 역사적 맥락에서는 아직 분명한 진전의 획을 그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더더욱 위태롭다.

우리는 이미 20년 전에 선거를 통해 탄생한 민주정부 시대를 경험했다. 80년 광주 이후 꾸준하게 전개된 민주화 투쟁의 결과로 얻은 것이기에 역행이 불가능하다고 보았으나, 바로 그 결과물인 민주정부의 무능과 실패로 인해 반민주 정부로의 역행을 허용했던 것이다. 촛불은 민주정부가 실패해서 놓친 권력을 시민들이 되찾아준 사건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재의 정권은 20년 전의 정권과 그 성격과 구성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또한 대안 세력인 노동·진보정치가 별 진전이 없었다는 점과 촛불이 세력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적다는 점에서도 촛불 ‘혁명’의 성과를 지키고 과제를 수행할 주체는 매우 허약하다. 촛불의 미래가 그리 밝을 수 없는 이유다. ‘혁명’을 고전적 시각으로만 볼 필요는 없겠지만, 지배권력의 계급적 변화가 뒤따르지 않고서는 혁명을 지켜내기 어렵게 된다. 하지만 현재 권력의 전체적 지형과 집권세력의 성격으로 보아 혁명의 과제들이 수행되기 어려운 것은 현실이다. 자칫 잘못하면 ‘혁명’은 다른 이름으로 더럽혀지게 된다. 후대에 대통령 탄핵은 정치스캔들로 기록되고, 새로운 정권의 탄생은 주기적으로 오는 정권교체로, 촛불은 그저 역행된 민주주의를 회복한 수준으로 평가받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87년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역사적 비중으로 보면 촛불보다 87년 민주항쟁이 ‘혁명’에 더 근접하다. 즉각적인 정권교체에는 실패했지만, 이후 민주정당의 성장과 시민의식 향상, 기층민중운동의 진출,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시민사회를 탄생시켰고, 민주헌법을 쟁취해서 형식적이나마 시대적 역행은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후 민주주의의 위기 상황이 없지 않았지만, 사회의 기층으로부터 생활로 굳어진 민주주의를 무화시킬 수는 없었다. 87년에 비추어 보면 촛불은 십 년 이상 장기적으로 이어져야 할 과제인지도 모를 일이다.

87년과 달리 촛불‘혁명’의 결과물과 수행 과제는 현 집권세력에 전적으로 위탁된 형국이다. 이들의 실패는 곧 촛불의 실패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고 현 정권의 성공이 촛불의 성공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므로 촛불은 이후 여전히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시 지속적으로 촛불을 들어야 하는 것과 별도로 일상적인 영역에서 수행되어야 할 작은 혁명들 또한 촛불의 과제다.

촛불은 ‘문화혁명’적 성격이 강하다. 그러므로 정치혁명이 지체될 지라도 촛불은 사회의 기층에서 역행할 수 없는 변화의 흐름을 만들어가는 일이 중요하다. 일상적인 영역에 눈을 돌려 ‘문화혁명’으로 이어지는 것이 완성으로 나아가는 길일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전근대적인 문화가 적지 않다. 잘못된 기성 질서와 문화가 여전히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 온갖 차별주의와 메카시즘, 가부장적 갑질 문화, 배금주의, 지역차별, 성 차별, 학벌주의, 세대 갈등 등 권력과 행정의 무능력이 양산한 사회적 모순에 대한 문화혁명을 수행하는 일이 중요하다.

또한 촛불의 근간이 되는 정신은 자율주의다. 직접민주주의는 제도나 체제가 아니다. 개개인이 스스로를 책임지고 통제하는 자율 정신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자율은 또 의식혁명이 뒤따라야만 한다. 문화혁명은 의식혁명이다.

정치·사회운동이나 혁명운동들은 역사와 정의를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변절의 역사이기도 하다. 일부 변절자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난한 자들이 부자가 된 다음의 변절이나 약자가 권력자가 된 뒤의 횡포는 입신출세한 자들만이 아니라, 정의나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행하는 실천에서도 흔한 일이다. 진보 정치세력들이 소수정당의 설움을 토로하면서도 자신보다 약한 세력에 대해서는 패권적 횡포로 일관하고, 차별과 착취를 호소하는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동료에 대한 차별은 당연시 한다. 지방대와 삼류대 출신들이 학력차별에 더 노골적이고, 사법시험 폐지가 ‘개천 용’을 없앤다고 반발하지만 그간에 ‘개천 용’이 된 자들은 하나같이 개천을 짓밟았다. 민주노조 간부들도 지배세력으로 행세하고, 소수자와 피해자들 사이에서 또 다른 차별이 일어난다. 이런 따위의 일은 우리 사회에 부지기수다. 과거 민주정부가 그랬듯이 이러한 횡포들이 혁명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와해시킨다. 자율은 촛불의 중심 동력이었고 의식혁명은 자기실현의 과제다. 

촛불은 영웅 없는 혁명의 시대를 열었다. 집단과 조직을 중심으로 전체를 설계하지 않고 오직 개인의 자발적 실천과 자율적 행동원리로 전체를 통제했다. 촛불은 집단이 아니라 개인의 승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러한 개인은 분자화된 개체가 아니라, 유기적인 개인이다. 전체와 연결된 자유로운 개인이다. 그것은 ‘액체’ 속의 개인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우만의 말처럼 ‘유동하는 액체 근대’ 시대의 개인인 것이다. 촛불이 밖을 밝히는 것은 안에서 태워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촛불은 스스로를 실현하는 ‘자율혁명’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혁명을 꿈꿀 수도 있다.

“한 사람의 혁명!”을.

세상이 바뀔 때를 기다리지 말고 스스로를 혁명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그대로 살라는 것이다. 지금 당장! 평화운동가 애먼 헤나시가 주장한 ‘일인 혁명’의 기치다. 이것 역시 과거에 ‘실패’한 혁명이었겠지만, 촛불이 되살려볼 말이다. 실제 촛불 속의 사람들은 헤나시의 말처럼 행동했다. 자신이 생각했던 그대로 주저하지 않고 행동으로 옮겼던 것이다. 그러나 흔히 개인의 결단만으로는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세상이 바뀌겠느냐”는 질문에 헤나시는 이렇게 응수했다. “세상이 나를 바꾸지는 못한다”고. 촛불은 국가가 결코 생각과 행동을 바꿀 수 없었던 자들이 ‘액체’처럼 모여 광장을 이룬 사건이 아니던가!

백무산 시인
울산저널 대표

출처 http://www.usjournal.kr/News/9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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