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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26일 금요일

민주공화국의 학교를 위하여/ 홍세화 / 한겨레

홍세화
장발장은행장, ‘소박한 자유인’ 발기인



분단, 그리고 전쟁 때문이었다. 우리가 1945년 해방과 함께 새로 건설할 나라의 아이들에게 어떤 교육을 펼칠 것인지를 놓고 교육자, 학부모, 학자와 정치인 등 전 사회 구성원이 참여하는 토론의 장을 갖지 못한 것은. “교육은 백년지계”라는 말이 회자되는 것에 비해, 새 학교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학습 내용과 방식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등에 대해 심층적인 토론이 있었어야 마땅했다.


각 나라의 민주주의의 성숙 정도가 ‘민의 성숙’ 정도, ‘민주의식의 성숙’ 정도에 따라 규정된다고 할 때, 여기에 학교교육만큼 막중한 영향을 미치는 게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단과 전쟁은 식민지에서 막 벗어난 사회 구성원들로 하여금 이 중대한 주제와 만날 기회를 없애버렸다. 그리하여, 일제부역세력을 청산하지 못했듯이, 일제강점기의 학교 구조와 교육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게 되었고, 이에 대한 문제의식조차 찾기 어려울 만큼 익숙해져 버렸다. 가령 우리 학교의 원형이 군사학교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는 교사와 학부모, 학생이 과연 얼마나 될까?


우리는 익숙해지는 것에 대해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좋은 대상에 익숙해지면 권태나 싫증을 느끼고, 나쁜 제도에 익숙해지면 별 저항 없이 더 나쁜 제도를 받아들이게 되며, 우리를 둘러싼 공간에 익숙해지면 그 공간에 대한 판단력을 잃게 된다

갑오개혁과 함께 이 땅에 최초의 소학교가 서울 북촌에 세워진 뒤, 고종에 의해 ‘소학교령’이 반포된 게 1895년의 일이다. 근대식 학교의 공식적인 시발점이라 할 수 있는데, 그 5년 뒤인 1900년에 이 땅 최초의 관립중학교가 역시 북촌에 세워졌다. 그 5년 뒤에 을사늑약이 있었고, 다시 또 5년 뒤에 조선이 망했다. 그리고 35년 동안 일제 강점기가 지속됐다. 요컨대, 우리가 별생각 없이 받아들이는 학교의 기본 틀이 군국주의 일제 강점기 때 정착됐다는 뜻이다. 학교의 교실과 운동장 사이에 권위의 구조물처럼 우뚝 서 있는 구령대가 군사학교의 사열대라면, 학생들이 도열하는 운동장은 연병장이고, 경비실은 위병소다. 이런 학교는 ‘군국주의 일본’의 학교이지, 민주공화국의 학교가 될 수 없다.


우리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공교육의 일차적 소명은 대한민국의 국민을 민주공화국의 구성원으로 형성하는 데 있다. 이 소명에 맞게 학교가 제도와 구조, 학습 방식에 이르기까지 완벽하게 달라졌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분단과 전쟁으로 시기를 놓치면서 70여년의 세월을 흘려보냈다. 실로 뒤늦게 일제부역에 뿌리를 둔 수구세력이 박근혜 정권의 속살을 드러냄과 함께 약해지면서 탄생한 문재인 정권을 맞아 ‘민주공화국의 학교’ 건설을 제기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구령대를 허무는 일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신설 학교는 구령대를 없애고 만들기도 하지만, 여전히 많은 학교에 구령대가 남아 있다. 그래서 구령대를 허무는 일은 학교를 민주적인 공간으로 만들기 위한 첫걸음이다. 민주공화국의 학교는 민주시민을 길러내는 곳이지 신민이나 사병을 양성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며, 학생들이 민주적인 공간에 있을 때 민주주의를 ‘습’(習: 익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사회, 학생회를 법제화하여 학교 운영의 의사결정 주체가 되도록 해야 한다. 학생, 교사, 학부모가 교육의 세 주체라면, 이 세 주체가 학교 운영상 주체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교장이 누구인가에 따라 학교가 달라진다는 것은 그만큼 비민주성의 반영이므로 교장임용제도는 없애야 한다.


이렇게 민주공화국으로 규정된 나라의 학교와 교실에서 일제 강점기 때 자리 잡은 전체주의의 유제를 하나하나 없애야 하는데, 이들 중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과제는 주입식 암기교육의 학습 방식을 글쓰기와 토론으로 바꾸는 일이다. 인간과 사회에 관한 공부에서 학생 각자가 ‘나’의 생각을 논리에 바탕을 두고 고민하고 정리하고 피력하는 과정으로 필수적인 게 글쓰기와 토론이다. 이 두 가지가 빠져 있다면 인문사회과학 공부를 한다고 말할 수 없다. 학생들에게 사유하도록 하지 않고 논리를 갖추도록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심각한 문제는 또 있다. 사유하지 않았다면 의식세계가 비어 있는 편이 차라리 나은데, 사유하지 않았는데도 의식세계는 충만하다. 주입된 것이 많기 때문이다. 학생에게 암기하도록 요구되는 내용이 ‘객관적 진리로 포장된 지배세력의 관점 또는 지배이념’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자신의 처지나 정체성과 동떨어진 의식세계를 갖고 그것을 고집하는 서글픈 존재들이 양산되는 배경이다.


여기서 글쓰기와 토론이 주입식 암기교육과 어떻게 다른지 좀 더 살펴보자. 글은 누가 쓰나? 학생 각자가 쓴다. 토론은 누가 하나? 학생 각자가 참여한다. 글쓰기와 토론에는 ‘나’가 있다. 교실에서 학생 각자가 글쓰기를 하고 토론에 참여하는 일상 자체가 주체화의 과정인 데 반해, 받아쓰고 숙지하는 과정은 대상화다. 모든 학생에게 똑같은 내용을 주입하는 과정에 ‘나’는 없는데, ‘나’ 없이 인간과 사회에 관한 학문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전체주의 사회에서의 일이다. ‘나’에는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고, 성소수자도 있고, 이주노동자의 아이도 있고, 가난한 사람, 부자인 사람, 농촌 사람, 도시 사람, 섬사람도 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나’들이 각자의 처지와 정체성을 바탕으로 인간과 사회에 관한 물음에 자신의 생각과 논리를 가져야 하고 견해를 피력해야 하는데, ‘나’가 없다면 다시금 강조하건대 인문사회과학이라고 할 수 없다.


토론수업을 강조하는 혁신학교의 지향은 백번 옳다. 그러나 아직 부족하다. 글쓰기와 토론이 인문사회과학 공부의 일상이 되어야 하는데 아직은 양념처럼 곁들이는 정도에 머물고 있어서다. 결국 우리는 대학서열체제에 대해 엄중히 숙고해야 한다. 실제로 교육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회 구성원들은 거의 대학서열체제가 문제의 핵심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 문제가 극복되기 어려운 것은 대학서열체제가 전체주의적 주입식 암기교육과 찰떡궁합의 관계를 맺고 있어서다. 글쓰기와 토론을 통해서는 대학서열체제가 요구하는 학생 줄세우기가 어려운 반면, 암기교육으로는 아주 수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문사회과학은 애당초 학생을 줄 세울 수 있는 학문이 아니다. 줄 세우기 위해 학문을 왜곡하고 있을 뿐.
실상 대학서열체제는 적잖은 교육자, 교사의 불성실에 방패막이가 되어준다. “문제를 알고 있지만 대학서열체제가 바뀌지 않는 한 다른 도리가 없다” “학교 현실을 알지 못하는 이상론이다” 등의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학문을 왜곡하는 행위를, 그것도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실에서 계속 행할 것인가. 그렇다면, 다음 악순환의 고리는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 제도적 굴레인 대학서열체제는 학생들에게 줄 서기를 요구함으로써 교육 주체들에게 주입식 암기교육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강제한다. - 이 주입식 암기교육은 비판적 안목을 갖지 못하게 한다. - 비판의식을 갖지 못한 사회 구성원들은 대학서열체제와 같은 차별체제에 맞서는 대신 복종한다.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많은 사회 구성원들이 능력만 되면 한국을 떠나려 한다는 것을. 그 대부분이 자녀 교육 문제 때문이라는 것을. 그만큼 교육의 세 주체가 모두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여기에 학문까지 왜곡되고 있다고 덧붙여야 할 것이다. 민주공화국 학교 건설이 문재인 정부에서 중요한 과제로 인식되기 바란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97189.html#csidx9e2a32f6b03fc278dfc4eacf1ef4077 

이달 초 유은혜 신임 교육부 장관(사회부총리)은 취임 일성으로 공교육 정상화와 관련하여 자신의 큰 그림을 펼치거나 전교조를 공교육 정상화의 주요 파트너로 하기 위해 전교조에 대한 법외노조 통보 직권취소를 고용노동부에 요청하는 대신, 유치원과 초등 1~2학년의 방과 후 영어교육을 허용하겠다고 밝혔다. 그 일주일 전에 신임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은 “일자리 문제 해결과 노동존중사회 실현에 역점을 두겠다”며 “우리나라 노동권을 국제수준으로 신장시키기 위해 국제노동기구(ILO) 핵심 협약 비준에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실은 말의 성찬을 비웃는다. 5년 전 박근혜 정권에 의해 조합원 중 9명의 해직자가 있다는 이유로 고용노동부로부터 법외노조 통보를 받은 전교조는 문재인 정권 1년 반이 지난 지금도 법외노조로 남아 있다.


유 장관은 유치원과 초등 1~2학년의 방과 후 영어교육 허용을 과도한 사교육을 방지하기 위한 조처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초등 3학년부터 시작되는 영어교육 과정을 위반하는 선행학습을 정부가 앞장서서 공식화한 행위이기도 하다. 사립유치원 비리 사태로 다시금 드러났듯이, 공공성의 실현 현장이며 배움터가 되어야 할 교육현장이 사적 이익을 창출하기 위한 수단이 된 지 오래다. “이익은 사유화, 손해는 사회화”라는 신자유주의의 요령처럼, 교육의 공공성은 오로지 국가 지원금을 받을 때만 적용되고 반교육적 경쟁의 아수라장이 된 게 오래전에 고착된 현실이라면, 이런 현실이 아닌 교육 공공성이라는 기본원칙에서 길을 찾아야 한다.


70년 적폐가 다른 사회부문보다 더 심하게 쌓여 무척 어려운 이 과제를 풀려면 교육의 공공성을 지향하는 시민사회세력과 공조해도 모자랄 판인데 이들을 배제한 채 사익추구집단의 열성에 휘둘려 단기적 처방을 내리는 데 급급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청와대에 교육문화수석을 두지 않은 문재인 정권에 공교육 정상화의 의지와 이를 관철하기 위한 사령탑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있기나 한 것인지 의문을 품는 게 나만은 아닐 것이다.


누차 강조했듯이,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라면 공교육의 일차적 소명은 국민을 민주공화국의 시민으로 형성하는 데 있다. 그리고 민주시민의 요체는 주체성, 비판성, 연대성에 있다. 이는 “자유로운 시민들이, 공동선·공익을 목표로 하는 사회로서, 법의 권위가 지배하는 국가”라는 민주공화국의 보편적 개념 규정에 따른 것이다. 또 앞으로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갈 구성원들에게 자본주의에 관한 교육, 특히 노동인권 교육은 주체성과 비판성뿐만 아니라 연대성 함양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주체성 없는 자유로운 시민은 형용모순이고, 연대성 없이 공동선·공익을 추구할 수 없으며, 비판성이 없으면 법의 권위가 아닌 권위주의적 권력과 금력이 지배하게 된다. 민주공화국의 구성원은 민주적 공간인 학교에서 이 세 가지 요체를 함께 배우고 익힌 다음 각자의 자질과 능력에 따라 사회에서 자기 직분을 가져야 한다.


문제의 심각성은 우리 공교육이 경쟁지상주의에 압도됨으로써 주체성, 비판성, 연대성은 형성하지 않은 채 기능적인 능력만으로 학생들을 서열화하는 과정이 돼버렸다는 데 있다. 간디는 일찍이 7대 사회악으로 ‘원칙 없는 정치’, ‘노동 없는 부’, ‘양심 없는 쾌락’, ‘인격 없는 지식’, ‘도덕 없는 상업’, ‘인간성 없는 과학’, ‘희생 없는 신앙’을 꼽았는데, 우리 공교육은 이들 중 특히 ‘인격 없는 지식’과 ‘인간성 없는 과학’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 우리 교육현장은 배움터가 아니라 경쟁의 장이다. 아무에게나 물어보자. 학교에 왜 가냐고? 주체성, 비판성, 연대성을 함양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할 사람 누구이며, 경쟁에서 앞자리를 차지하여 상위권 대학에 가기 위해서라고 대답하지 않을 사람 누구인가? 이 경쟁의 과정에서 인격이나 인간성은 설자리가 없다.


학종(학생부종합전형)에 대한 불신이 커지면서 수능 상대평가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주장하는 게 최근의 민심 동향이라고 한다. 이것이 문재인 정권이 교육 공약을 후퇴시킨 이유라고도 한다. 그러나 민심을 핑계로 공약을 후퇴시키기 전에 설득을 시도하는 게 ‘원칙 있는 정치’의 지도자다운 모습이다.


그러면 수능은 공정한가? 공정하다면 어떻게 공정한가? 석차와 등급을 주기 위해 이미 학문을 왜곡했는데, 왜곡한 학문 위에 공정성이 무슨 의미를 가질까? 잠시 생각해보자. 학생의 국어능력, 사회를 보는 눈, 역사를 보는 안목을 어떻게 평가하여 석차와 등급을 정확히 매길 수 있다는 것인가? 우리 학생은 사회를 비판적으로 보는 눈을 뜨는 대신 그것을 위해 필요한 참고사항을 암기하는 데서 멈추고, 역사를 보는 안목을 갖기 위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는 대신 그것을 위한 참고사항을 암기하는 데서 멈춘다. 노동자로 살아갈 구성원으로서 모의 노사협의를 하는 등 토론을 통해 자신의 계급적 정체성을 인식하는 기회를 갖는 대신 객관적 사실을 숙지하는 것에서 멈춘다. 왜냐하면 참고사항이나 객관적 사실에 대한 암기 여부로만 석차와 등급을 매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지식암기 위주 교육으로는 학생 각자가 나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하여(주체성),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비판성), 이웃에 대한 공감능력을 키워 더불어 사는(연대성) 민주시민을 형성할 수 없다.


그 대신 형성하는 게 있다. 좋은 학벌을 획득한 사회구성원들이 경쟁에서 승리한 자로서 특권의식과 그때까지 처들인 사교육비에 대한 보상의식을 가진다면, 그렇지 못한 구성원들은 패배의식을 내면화하고 자긍심도 갖지 못하게 된다. 그리하여 운 좋게 머리 좋고 부유한 집안에 태어난 사람이 연대성이나 공감능력 없이 사회 귀족이 되어 군림할 때, 운 나쁘게 암기능력 떨어지고 가난한 집안에 태어난 사람은 상징폭력의 희생물이 되어 지배당하는 것이, 이른바 공정성이라는 이름의 경쟁을 통해 우리 사회가 얻는 결과물이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각 사회부문에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현상이 일어난다. 사회적 책임의식이 없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개인적 가치를 성숙시키기보다는 권력에 기대거나 집단이기주의에 숨는 경향이 강한데, 패거리주의에 비해 주체성과 비판성이 부족해 이런 경향이 통제되지 않는 것이다. 학업 성적이 좋아 입신출세하여 사법부 수장까지 오른 양승태나 30대에 대공수사국장에 올랐던 김기춘 같은 인물의 지난 행적을 보라.


국공립대를 통합네트워크화하고 이를 사립대에도 개방함으로써 대학서열화를 극복하여 공교육 정상화를 다지는 게 우리의 장기적 과제라면, 단기적 과제는 학종에서 학생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학부모의 경제력에 크게 의존하는 비교과 영역을 없애고 지식암기 중심의 교실을 토론·실습·체험 중심으로 바꾸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러면 학생의 인격이나 인간성을 함양하는 계기가 조금이라도 열릴 수 있다. 또 학업 성적이 뒤떨어지는 학생을 “너는 9등급이다!”라고 규정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지적 인종주의’의 반교육적, 반인권적 행태도 줄일 수 있다.


최근 서울 송파구의 한 중학교 학생들이 이란 출신 친구가 난민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연대활동을 열심히 펼친 모습을 보여주었다. 오랜 친구 관계는 학생들로 하여금 이방인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게 했다. 그 중학생들에 비해 고등학교 이상 교육을 받은 대다수 사회구성원들이 난민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를 돌아보면 인격과 인간성, 그리고 연대성이 비어 있는 우리 교육의 모습이 반사되지 않는가.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67421.html#csidx86ca1ec68fa67298cdfdff5795ef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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