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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 25일 일요일

강양구의 언론개혁론/2019년 8월 25일

Yanggu Kang
2019년 8월 25일
[언론]
나는 2003년 노무현 정부의 시작과 함께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2003년부터 2017년 초까지 기성(?) 언론사에 몸담고 기자 생활을 했다. 노무현 정부가 여러 실정으로 정권을 내주는 모습을 보았고,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권위주의로 회귀하려고 몸부림치다가 ‘촛불’의 힘으로 끝장나는 모습을 현장에서 지켜봤다. 그 다음에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다.
알다시피, 그 과정에서 나는 오로지 ‘권력 감시’-‘권력 비판’의 펜이 되고자 애썼다. 그 권력에는 국가 권력, 기업 권력, 지식 권력 심지어 시민 사회 권력도 포함된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노무현 정부와도 불편한 관계였고(황우석 사태 때는 최고였다), 이명박 정부나 박근혜 정부 때는 말할 것도 없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도 마찬가지다. 십 수년간 기자 생활을 하면서 교류했던 정치인, 지식인, 언론인, 시민운동가 다수가 이 정부와 여당(민주당)에 몸담고 있다. 장관, 국회의원, 청와대 비서진, 공기업 기관장, 공영 방송 사장 등. 그들의 성공을 바라지만, 그렇다고 내가 ‘저널리스트’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한 그들에게 비판적인 시각을 거둔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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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한국 사회에서 저널리스트는 ‘기레기’와 같은 의미가 되었다. 보수 언론뿐만 아니라 진보 언론에 몸담고 있는 저널리스트조차도 툭하면 ‘기레기’라고 불린다. 이번에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를 상대로 여러 매체에서 제기하는 의혹을 놓고서도 비슷한 반응을 보곤 한다. 나는 생각이 다르다.
애초 언론의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는 권력 감시다. 그리고 그 권력 감시를 위해서는 사실(fact)로 확정되지 않은 의혹 제기도 할 수 있어야 한다. 국가 권력, 기업 권력 등 갖가지 권력과 대항하는 (한정된 자원을 가진) 언론을 상대로 사실로 확정된 것만 보도하라는 이야기는 사실상 입을 막고 보자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 때 김어준, 주진우 같은 ‘정치 저널리스트’들은 때로는 ‘아니면 말고’ 식의 음모론을 제기하는 일조차 서슴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그 수많은 의혹 제기 가운데 어떤 것은 맞았고, 어떤 것은 틀렸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 열성 지지자 등은 그들을 엄혹한 시대 때 중요한 역할을 한 저널리스트로 기억하지 ‘기레기’라고 부르지 않는다.
이제 그때 그 ‘정치 저널리스트’들이 편들었던 문재인 정부가 국가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리고 조국 후보자는 그 권력 핵심이다. ‘정치 저널리스트’들이 박근혜 정부의 권력 핵심을 놓고서 수많은 의혹을 제기하는 일은 ‘참언론’이고, 이 정부의 권력 핵심에게 의혹을 제기하는 일은 ‘기레기’ 짓이라고 비판하는 모습은 앞뒤가 맞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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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앞에서 언급한 정치 저널리스트가 그렇듯이) ‘편드는’ 언론이라고!
한국 언론의 현재 모습을 놓고서 생각을 정리한 짧은 글([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서도 언급했듯이, 어떤 사람은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위해서 자유한국당 같은 수구 보수 세력은 겨냥하고, 이 정부의 실정은 눈감아주는 그런 언론을 ‘참언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 기준으로는 그런 건 ‘언론’도 아니고 ‘저널리스트’도 아니다. 그냥 ‘권력의 개’다. 나는 한국 사회가 이 만큼이라도 나아졌던 데는 ‘시민의 힘’과 함께 권력의 편이 아니라 진실 그 자체를 전하고자 했던 수많은 저널리스트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저널리스트는 ‘편드는 언론’-‘권력의 개’가 되는 것을 거부한 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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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언론이 그 자체의 ‘언론 권력’을 확대 재생산하고자 의혹을 부채질하는 모습이 꼴사나울 수도 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 권력에 부역했던 보수 언론이 지금 문재인 정부와 조국 후보자를 놓고서 저렇게 달려드는 꼴에 분노가 치솟을 수도 있다. 그 과정에서 <조선일보> 같은 언론이 최대의 수혜자가 될 것 같은 모습이 답답하기도 하다.
이조차도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의 답답했던 언론 상황을 염두에 두면, 지금 문재인 정부가 좀 더 민주적이라는 증거다. 더구나 지금 조국 후보자를 놓고서 보수 언론뿐만 아니라 진보 언론까지 동참해서 제기하는 여러 의혹은, 독립 저널리스트 정체성에 가까운 내가 봐도 충분히 문제 제기할 만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내가 보기에 최근의 여러 의혹 제기의 일차적인 원인은 (언론의 가짜 뉴스가 아니라) 조국 후보자의 ‘삶’과 ‘말’에 있다. 그러니 그 의혹을 해명할 책임도 조국 후보자와 그를 법무부 장관으로 지명한 문재인 정부에 있다. 그러니 이제 언론은 자유한국당을 놓고서도 빨리 청문회를 하자고 압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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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하자. 언론 개혁이 필요하다.
그런데 언론 개혁을 말하기 전에 지금 내가 원하는 언론-저널리스트가 무엇인지부터 따져 보면 좋겠다. 문재인 정부를 편드는 언론, 내가 좋아하는 정치인은 띄워주고 내가 싫어하는 정치인은 저격하는 언론, 듣기 싫은 이야기는 감추고 듣기 좋은 이야기만 내 귀에 속삭여주는 그런 언론. 그래서 나중에는 그 자체로 괴물이 될 언론.
우리는 그런 언론을 이미 가지고 있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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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태 김성수 같은 언론계 선배께서 “사실(fact)로 확정되지 않은” 의혹 제기의 정당성을 언급한 대목을 놓고서 이의를 제기해 주셨습니다. 예를 들어, 김어준 같은 ‘정치 저널리스트’의 “아니면 말고” 식의 의혹 제기의 사회적 폐해를 예민하게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죠. “저널리스트라면 사실의 기반 위에서 의혹을 제기하고 추론해야” 한다고도 주장하셨죠.
두 분의 의견이 저와 다르지 않아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총체적 진실을 찾는 일은 마치 지도나 나침반도 없이 산의 정상을 오르는 과정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 조금이라도 높은 지형을 가늠해서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또 어떤 곳에 멈춰 서서 높은 지형을 가늠해서 걸음을 옮기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운까지 좋다면) 정상에 오를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자기가 쥐고 있는 불완전한 사실의 조각을 ‘철저한 취재’를 통해서 팩트체크하고, ‘비판적으로 탐구’하고 더 나아가 ‘대담하게 해석’해서 보도를 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그런 보도가 그 자체로 ‘총체적 진실’이나 ‘확정된 사실’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비유하자면, 산의 정상(총체적 진실 혹은 확정된 진실)에 오르고자 더듬거리는 과정일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조국 후보자를 둘러싼 언론의 의혹 제기에 대한 반발은 이런 더듬거리는 과정조차도 하지 말라는 폭력으로 여겨집니다. 더구나 그런 주장을 하는 이들 다수가 김어준 같은 ‘정치 저널리스트’의 “아니면 말고” 식의 의혹 제기를 진짜 저널리스트의 행태라고 옹호했기에 더욱더 난감하고 당혹스런 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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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nggu Kang
2019년 5월 12일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송현정 기자의 대통령 인터뷰를 놓고서 앞에서 글을 하나 썼다(댓글 링크). 관련해서 한 가지 비유가 생각나서 덧붙여 보련다. 지금 신뢰가 바닥에 떨어진 한국 저널리즘은 거칠게 비유하자면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이렇게 셋으로 나눠볼 수 있을 것 같다. 통념과는 다른 구분법이니 설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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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놈’은 정파를 정해 놓고서 편드는 저널리즘이다. 어느 새 한국 저널리즘의 변방에서 주류로 우뚝 선 김어준 씨가 대표일 테고, 본인이야 인정하지 않겠지만 정치부 기자였을 때의 김의겸 전 대변인의 모습도 다르지 않았다. 이들은 특정 정파를 옹호하는 일이야말로 공동체와 구성원의 좋은 삶을 위한 일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고, 또 그 신념대로 실천한다.
이 과정에서 필요하다면 ‘기계적 중립’ 따위는 던져버릴 각오가 되어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가짜 뉴스와의 경계가 애매한 음모론을 제기하는 데에도 주저함이 없다. 당연히 이들은 특정 정파나 그 지지 세력과 긴밀하게 교감하고, 그 연장선상에서 열렬한 팬덤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특정 세력에게는 ‘좋은 놈’이지만, 반대 세력에게는 나쁜 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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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진짜 ‘나쁜 놈’은 따로 있다.
진짜 ‘나쁜 놈’은 공동체와 구성원의 좋은 삶보다는 ‘언론 권력’ 그 자체를 지키는 일이 더 중요한 저널리즘이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대체로 사주의 이익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언론사의 권력을 지키는 것이고, 더 나아가 거기에 기생하는 언론인(기자, PD 등)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일이다.
이들은 평소에는 ‘기계적 중립’이라는 관행 뒤에 숨어서 이쪽도 저쪽도 편들지 않고 사실(fact)만 전하는 척한다. 하지만, 그렇게 특정한 사실을 취사선택하고 논란을 증폭해서 여론을 호도하는 일(의제 설정)이야말로 언론 권력을 유지하는 중요한 메커니즘이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그들은 자신의 권력을 확대 재생산한다(<조선일보>가 제일 잘하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안타깝게도 보수든, 진보든 한국 언론과 그 종사자 대부분은 어느 정도는 ‘나쁜 놈’이다. 조금 도발해 보자면, 지금 대중이 호감을 가지고 있는 기성 언론 저널리스트 상당수도 다 이런 ‘나쁜 놈’의 범주에 들어간다. 특정한 시점의 이미지가 아니라, 그들이 어디서 어떻게 저널리스트로 살아왔는지 찬찬히 돌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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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놈’은 이런 상황에서 조금은 다른 저널리즘의 모습을 만들어보려고 노력해온 소수의 저널리스트다. 그 가운데는 기존 기성 언론사에 소속되어 ‘꼴통’ 짓을 하는 이들도 있고, 때로는 독립 언론사나 혹은 말 그대로 1인 독립 저널리스트로 활동해온 이들도 있다. (물론 이런 독립 저널리스트 가운데도 ‘좋은 놈’이나 ‘나쁜 놈’이 많다.)
이런 ‘이상한 놈’이 가장 경계하는 일은 특정 정파를 편드는 것이나 혹은 권력 그 자체를 좇는 것이다. 이들은 너무나 식상한 말이 되어버린 ‘진실’을 찾고자 고군분투하고, 그 과정에서 때로는 모두가 나쁜 놈이라 여기는 각종 권력뿐만 아니라 대중과 싸우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좋은 놈’이나 ‘나쁜 놈’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진실을 찾는 과정에서 때로는 대중의 우상을 파괴하고, 상식이나 통념에 질문을 제기하는 일도 감수해야 한다. 예를 들어, ‘태양이 지구를 돈다’는 천동설에 의문을 제기하다 화형을 당했던 중세 이단자의 운명을 ‘이상한 놈’은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그나마 한국 사회에서 저널리즘이 이 정도 수준이라도 유지해온 것은 그래도 ‘이상한 놈’들이 끊임없이 있어 온 탓이다. 적어도 17년간 저널리스트로 활동해오면서 나도 바로 그 ‘이상한 놈’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고 힘을 보탰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러다 보니, 정말로 ‘이상한 놈’이 되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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