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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 16일 금요일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 조선총독부도서관, 국립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백창민, 이혜숙, 2019년 7월 11일, 8월 8일, 오마이뉴스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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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총독부도서관_후기
 
 
1 
#오마이뉴스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 열네 번째 기사는 #조선총독부도서관 이야기입니다.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에 이어 두번째로 다룬 사라진 도서관이야기입니다. 조선총독부도서관은 국립중앙도서관(국중)으로 이어지지만, 지금의 국중의 토대가 된 조선총독부도서관에 대해서는 연구가 많지 않습니다.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에 대한 연구가 서울대학교를 중심으로 활발해지고 있는데 반해 조선총독부도서관에 대한 연구는 찾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국중의 흑역사라고 생각하기 때문일까요? 국립중앙도서관 스스로가 조선총독부도서관 역사 연구와 조명에 대해 가장 게으르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네요. 저도, 이 글을 함께 쓴 슈기님(이혜숙)도 묻어 두고 무시하기에는 조선총독부도서관 시절이 담고 있는 중요성이 크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국중뿐 아니라 #문헌정보학 연구자의 관심과 연구가 이어졌으면 하고 바래봅니다.
 
이 도서관에 대해 중요한 증언을 남길 사람이 사라지거나 이제 사망했다는 점도 안타깝네요. 조선총독부도서관 시절에 고위직에 있던 이재욱 관장과 박봉석 부관장은 납북되었고, 20년 이상 관장으로 재직했던 오기야마 히데오도 사망했죠. 오기야마 히데오 생전에 조선총독부도서관에 대한 녹취나 연구가 이뤄지지 않은 점은 안타깝네요. 국중 서고에서 잠자고 있는 조선총독부도서관 시절 장서에 대한 연구가 누군가에 의해 이뤄지기를 바래봅니다.
 
2 
#이완용 을 도서관인으로 다루었는데, 도서관에서 일하는 몇몇 분들은 분노할지 모르겠네요. 매국노 중의 매국노인 이완용을 왜 도서관인으로 조명하는 건지 불편해할 분들도 있을텐데요. 그가 과거 급제 후 첫 부임지가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이었고, 문헌정보학 분야에서 최초의 국립도서관 설립 시도로 꼽는 대한도서관에서 이완용은 서적위원장을 맡았습니다. 이 정도면 그를 도서관인으로 꼽지 않을 수 없는데요. 기사에 쓴 것처럼 이완용은 동농 김가진과 여러 면에서 공통점이 많은 인물입니다. 동농 김가진은 청운문학도서관을 통해 도서관인으로 따로 다룬 적이 있습니다.
 
백린, 김세익의 책에 다뤄진 후 ‘#대한도서관을 국립도서관 계보에 포함시키는 언급이 반복되고 있는데요. 도서관 건립 시도로 바라볼 수 있지만 국립도서관 계보에 넣는 것에 대해서는 저희는 다르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라를 팔아 먹은 이들이 국립도서관을 세우려 했을까요. 속국으로 전락해 주권을 상실한 대한제국 시절 도서관을 국립도서관으로 볼 수 있을까요.
 
앞선 선배의 연구에 대해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기보다는 다른 관점으로 접근하는 연구가 있었으면 합니다.
 
3 
일제가 조선에서 행한 서적 ‘#강탈‘#분서’, ‘#금서에 대해서는 체계적인 연구가 따랐으면 좋겠습니다.
 
일제는 조선의 서적과 출판을 탄압하는 ‘3종 세트를 저질렀는데, 이에 대해 잘 정리한 자료와 연구를 보지 못한 것 같네요.
 
4 
한국 도서관은 제3세계 다른 나라와 비교해 어떤 특성을 지니고 있을까요. 후후발개발도상국가 또는 동아시아 다른 나라와 비교해 한국 도서관이 갖는 특성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식민 통치의 경험은 한국 현대 도서관에 어떤 상흔과 영향을 남겼을까요.
 
#비교도서관 관점도 한국 도서관의 특성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주지 않을까 싶은데요. 우리와 함께 일제 식민통치를 겪은 #타이완 도서관 이야기는 이런 관점에서 흥미롭습니다. 타이완은 동아시아라는 지리적 환경도 비슷할 뿐 아니라 일제 ‘#식민통치경험과 ‘#내전그리고 ‘#분단을 함께 겪었다는 점에서 한국과 많은 유사성이 있는 나라입니다.
 
일본 본토와 비교해 크게 뒤떨어지지 않은 도서관 인프라를 가졌던 타이완의 이야기는 여러 면에서 흥미롭습니다.
 
5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편은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과 함께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이야기도 상당 부분 다뤘는데요. 이번 조선총독부도서관에서는 이후 이어지는 ‘#국립중앙도서관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다루지 않았습니다.
 
자료가 모이고 취재가 되는 대로 '국립중앙도서관'은 다른 글로 따로 다루고 싶은 생각에 국중에 대한 글은 거의 쓰지 않았습니다.
 
6 
#롯데백화점 일대와 조선호텔 #환구단 주변을 거닐며 이 자리에 있던 조선총독부도서관과 국립도서관을 기억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표석'주차장에 세워진 건 다행일 수 있으나 도심 한복판에 국립도서관이 그대로 이어졌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은 지울 수가 없네요.
 
남산으로 유배 갔던 국중이 서초동에 독립 건물을 지어 자리 잡은 건 다행일 수 있으나 #소공동 자리만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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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41392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41394

나치보다 일제의 '분서'가 더 악독한 이유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 조선총독부도서관 ①을사늑약이 체결된 이듬해인 1906년 이범구, 이근상, 박용화, 민형식, 윤치호, 이봉래는 근대적 도서관의 필요성에 뜻을 모은다. 이들은 회현방 미동 이용문의 집을 임시사무소로 삼아 도서관 건립을 추진했다.   
도서관 건립 움직임이 <황성신문>에 자세히 보도되면서 각계 인사의 기증과 지원이 이어졌다. 1906년 3월 25일 도서관장에 탁지부대신 민영기, 평의원장에 궁내부대신 이재극, 서적위원장에 학부대신 이완용이 선임됐다. 도서관 건물로 종정부 청사를 사용하고 도서관 건축과 운영비는 임원이 공동 부담하기로 하였다. 

1910년 2월 종정부 회의를 통해 대한도서관(大韓圖書館)으로 확장하면서 도서관 규모가 커졌고, 모든 준비를 마치고 개관을 앞두고 있었다. 하지만 한일 강제병합 이후인 1911년 5월 도서관 개관을 위해 수집한 10만여 권의 장서는 모두 조선총독부 취조국(取調局)에 몰수된다. 대한도서관의 장서는 몰수된 상태로 있다가 1928년부터 1930년에 걸쳐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으로 옮겨졌다. 

이완용과 김가진, 두 '도서관인'의 엇갈린 삶
 
도서관인, 이완용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에 모두 포함된 매국노 중의 매국노. 관직 생활을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에서 시작했고, 서적위원장으로 대한도서관 설립을 추진했다는 점에서 '도서관인'이라 할 만하다.
▲ 도서관인, 이완용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에 모두 포함된 매국노 중의 매국노. 관직 생활을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에서 시작했고, 서적위원장으로 대한도서관 설립을 추진했다는 점에서 "도서관인"이라 할 만하다.
ⓒ 위키백과
 
문헌정보학계에서는 백린의 <한국도서관사연구>로부터 남태우의 <문헌정보학사>에 이르기까지 대한도서관 설립 추진을 최초의 근대적 '국립도서관' 건립 시도로 파악하기도 한다. 잘 알려진 대로 민영기, 이재극, 이완용은 모두 친일파다. 1905년 을사늑약, 1907년 정미7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은 사실상 일제의 '속국'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이 시기에 추진된 도서관을 '국립도서관'으로 볼 수 있을까. 

국립도서관은 말 그대로 국가가 세운 도서관이다. 국민과 영토, 주권을 모두 갖춰야 국가다. 망국을 목전에 둔, 주권을 상실한 국가는 국가라 볼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추진된 국립도서관은 어불성설 아닐까. 게다가 국가를 팔아먹는 데 앞장선 이들이 도서관을 세우려는 뜻은 무엇이었을까. 대한도서관을 국립도서관 계보에 포함시키는 건 온당한 걸까. 

대한도서관을 추진한 인물 중 이완용은 여러모로 동농 김가진과 비교할 만한 인물이다. 1858년생으로 김가진보다 12살 어린 이완용은 1882년 10월 과거에 급제해 1886년 3월 24일 규장각 대교로 관직을 시작했다.

관직 생활을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에서 시작한 것도 같지만 외교관으로 일했다는 공통점도 있다. 김가진은 주일공사로 일했고 이완용은 주미 조선공사관에서 외교관(참사관)으로 일했다. 당대 명필로 손꼽힌 점도 비슷하며 독립문 현판을 쓴 사람으로 두 사람이 꼽힌 점까지 같다. 을사늑약 전후로 대한제국 대신이었다는 점 역시 공통점이다. 

뛰어난 재능으로 대한제국 대신 자리에 오른 두 사람은 을사늑약 전후로 대조적인 길을 걸어간다. 이완용은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에 모두 이름을 올린 매국노의 대명사로 알려진 삶을 살았고, 김가진은 대한제국 대신 중 유일하게 해외 독립운동의 길을 걷는다. 규장각을 거쳐간 두 '도서관인'의 삶은 극명하게 엇갈렸다(관련기사 : 독립운동에 뛰어든 유일한 대한제국 대신). 

나치보다 악독한 일제의 '분서'

 
독일 베를린 베벨 광장 지하에 묻힌 빈 서가 미하 울만(Micha Ullman)의 작품 '비블리오테크'(Bibliothek)로 수많은 책이 불에 타 빈 서가만 남았음을 의미하는 작품이다. 미하 울만의 빈 서가는 광기가 지배했던 나치 시대를 고발하면서 지성의 실종이 가져오는 파국을 경고하고 있다.
▲ 독일 베를린 베벨 광장 지하에 묻힌 빈 서가 미하 울만(Micha Ullman)의 작품 "비블리오테크"(Bibliothek)로 수많은 책이 불에 타 빈 서가만 남았음을 의미하는 작품이다. 미하 울만의 빈 서가는 광기가 지배했던 나치 시대를 고발하면서 지성의 실종이 가져오는 파국을 경고하고 있다.
ⓒ Wikipedia
 
1910년 한일 강제병합 직후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조선의 학교, 책방, 개인 집을 수색해서 51종 20여만 권의 책을 압수해서 불태웠다. 진시황과 히틀러도 그랬지만 책을 불태우는 만행은 군국주의자의 필연인가. '애국장서회진'이라는 이름으로 단행된 이 분서(焚書) 사건으로 조선 출판물은 크게 훼손당했다. 분서에 앞서 이토 히로부미와 데라우치는 규장각 귀중본을 포함한 조선의 고서적 상당량을 자료 조사라는 명목으로 강탈해서 일본으로 반출한 바 있다. 

히틀러 시대 독일은 괴벨스의 선동에 넘어가 자신의 장서를 불태웠지만 일제는 자신의 장서가 아닌 조선의 장서를 불태웠다는 점에서 나치보다 더 잔혹한 만행을 저질렀다.

독일 베를린 베벨 광장 지하에는 '빈 서가'가 묻혀 있다. 이성이 아닌 광기가 지배한 지난 날을 증언하고 반성하기 위한 미하 울만(Micha Ullman)의 작품이다. 나치의 선동에 넘어가 수많은 책을 불태웠던 독일은 자신의 만행을 이렇게 반성하고 있다. 식민지 조선에서 분서와 '위안부' 같은 만행을 저지른 일제는 어떤 식으로 반성하고 있을까. 

일제의 출판물 탄압은 분서에서 그치지 않았다. 분서 이후에는 대대적인 금서 조치로 단행본 출판을 철저히 막았다. 분서와 금서에 이어 데라우치 총독은 1911년 8월 '조선교육령'을 발표했다. 조선교육령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 일본인의 명령을 이해할 수 있도록 조선인에게 일본어를 교육하고 ▲ 일본에 충성하는 조선인을 양성하며 ▲ 조선인 노동력 확보를 위해 낮은 수준의 실업교육을 실시하고 ▲ 넷째 향교와 서당 같은 조선의 교육시설과 구미 선교사가 운영하는 사립학교를 규제했다. 이른바 '우민화'(愚民化) 정책의 시작이다. 대일본 제국에 충성하는 신민, 충실한 노동력으로 길러내겠다는 것이 조선교육령의 취지였다. 

조선교육령을 발표하던 1911년 일본 본토는 적령 아동의 98.1%가 초등교육을 받았다. 같은 해 조선은 1.7%만이 초등교육을 받았다. 18년 후인 1929년에는 18.6%로 나아지지만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일제 식민 통치 중반까지 기초적인 초등교육이 이런 실태였는데, 도서관 상황은 말할 나위 없는지 모른다. 

도서관을 건립하지 않는 정책

 
조선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제3대 통감이었던 데라우치는 1910년 한일 강제병합 때부터 1916년 10월 14일까지 조선 초대 총독으로 재임했다. 총독으로 부임하자마자 혹독한 '무단통치'로 조선을 식민 통치했다. 통감 시절부터 총독 재임 기간 동안 조선의 서적을 강탈하고, 불태우고, 출판을 금지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 조선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제3대 통감이었던 데라우치는 1910년 한일 강제병합 때부터 1916년 10월 14일까지 조선 초대 총독으로 재임했다. 총독으로 부임하자마자 혹독한 "무단통치"로 조선을 식민 통치했다. 통감 시절부터 총독 재임 기간 동안 조선의 서적을 강탈하고, 불태우고, 출판을 금지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 위키백과
 
심지어 조선총독부는 총무, 내무, 탁지, 사법, 농상공 5부를 두었는데, 교육을 담당하는 학부는 아예 두지 않았다. 교육은 내무부 아래 학무국이 맡도록 했다. 1914년 1068개였던 사립학교가 일제의 무단통치기를 거치면서 1919년에는 749개로 급감한다. 학교마저 없앤 일제가 도서관을 건립하려 했을까. 반면 일본 본토의 공사립 도서관은 1904년 99개에서 1926년 4336개로 크게 늘었다.  

도서관에 관해 특기할 대목은 일본 국내에서는 1879년 '교육령'을 통해 도서관을 독립 교육기관으로 명문화했는데, '조선교육령'에서는 도서관에 대해 언급조차 하지 않고 도서관을 부정했다는 점이다. 

일제는 1910년 한일 강제병합 이후 조선에 도서관을 건립하지 않는 정책으로 일관한다. 도서관을 건립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생적으로 문을 연 조선인의 도서관을 폐쇄해서, 말 그대로 도서관이 없는 '무도서관'(無圖書館) 정책을 추진했다. 일제가 실질적으로 조선을 지배하기 시작한 1905년 을사늑약 때부터 1920년대 초까지 한국통감부나 조선총독부 차원의 도서관 건립은 아예 추진하지 않았다. 

훗날 동경시립도서관이 되는 '대일본교육회서적관'은 1887년에 문을 열었고, '제국도서관'이 도쿄 우에노(上野) 공원 도쿄음악학원 부지에 개관한 것은 1906년이다. 제국 본토와 비교하면 조선총독부도서관 개관은 20년 가까이 늦다. 일제가 조선과 함께 식민 지배를 한 타이완(臺灣)의 경우 1915년 8월 9일 '타이완총독부도서관'이 문을 열었는데, 조선은 이보다 10년이 늦었다. 

일제는 '도서관'을 왜 건립했나

 
무도서관에서 도서관 건립으로 정책을 전환한 조선총독부 3.1 운동 이후 일제가 표방한 '문화통치'는 사실상 ‘무단통치’의 연장이었다. 도서관을 건립하지 않는 '무도서관' 정책을 취했던 일제는 만철경성도서관(1920년), 경성부립도서관(1922년), 조선총독부도서관(1925년),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1927년)을 개관했다. 3.1 운동을 통해 조선 민중의 저항이 없었다면 일제가 '문화통치'라는 유화 조치를 시행했을지 의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1920년대 일제가 잇따라 세운 도서관도 1919년 3.1 운동 과정에서 조선 민중의 피로 얻은 성과가 아닐까.
▲ 무도서관에서 도서관 건립으로 정책을 전환한 조선총독부 3.1 운동 이후 일제가 표방한 "문화통치"는 사실상 ‘무단통치’의 연장이었다. 도서관을 건립하지 않는 "무도서관" 정책을 취했던 일제는 만철경성도서관(1920년), 경성부립도서관(1922년), 조선총독부도서관(1925년),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1927년)을 개관했다. 3.1 운동을 통해 조선 민중의 저항이 없었다면 일제가 "문화통치"라는 유화 조치를 시행했을지 의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1920년대 일제가 잇따라 세운 도서관도 1919년 3.1 운동 과정에서 조선 민중의 피로 얻은 성과가 아닐까.
ⓒ 위키백과
 
그나마 조선총독부에서 도서관 건립을 고려하기 시작한 것도 1919년 3.1 운동 이후부터다. 3.1 운동을 겪으면서 일제는 강압적인 동화정책인 '무단통치'가 실패했다는 것을 깨닫고 해군 대장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를 3대 총독으로 임명하며 유화적인 식민통치를 시도한다. '문화통치'의 시작이다. 일제의 통치가 본질적으로 바뀐 것이 아니라 조선 동화정책을 더욱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통치 스타일을 바꾼 것이다. 

헌병경찰을 보통경찰로 바꾸고, 이전과 달리 <동아일보>, <조선일보> 같은 민간 신문과 잡지의 발행을 허용하고, 교사에게 칼을 차지 않게 하고, 조선인에게 총독부 관직을 허용하는 조치가 시행됐다. 헌병 대신 경찰이 치안을 담당하면서 조선총독부 본부에 경무국을 설치하고 경찰 수를 크게 늘렸다. 일제는 패망 때까지 조선 경찰 수를 전체 관리의 20% 선으로 유지했다. 

1910년 481개였던 경찰관서는 1920년 2761개로 크게 늘었고, 같은 시기 5694명이던 경찰 수도 1만8376명으로 3배 이상 늘렸다. 경찰관서에 '특별고등부'라는 비밀경찰부도 이때 설치했다. '문화통치'라는 이름으로 '무단통치'가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일제는 조선인의 숨통을 일부 틔어주며 조선인 사이에 격차를 발생시키는 동시에 친일파를 양성했다. 

조선총독부가 주도한 도서관 건립도 이때 이뤄진다. 1921년 문을 연 이범승의 경성도서관에 부지와 건물을 무상 제공하고, 1922년 경성부에 첫 공공도서관(경성부립도서관)을 건립한 후 1925년에는 조선총독부도서관을 개관했다. 

'무도서관' 정책으로 일관하던 일제는 조선에 도서관을 왜 건립했을까? <일본의 식민지 도서관>을 쓴 가토 가즈오와 가와타 이코이, 도조 후미노리는 이렇게 지적한다. "독립된 사회교육기관이나 문화시설이 아닌 '통치도구'로 도서관을 건립했다"고. 

일제는 식민 지배를 시작하자마자 타이완과 조선, 만주 지역의 역사, 지리, 문화, 각종 정보를 샅샅이 조사했다. 조선에서 이를 담당하던 부서는 조선총독부 취조국이다. 취조국은 1911년 6월 궁내부 이왕직이 가지고 있던 홍문관, 규장각, 집옥재, 시강원, 북한산 이궁, 정족산사고에 있던 장서 11만 권을 이관받는다.

취조국이 가지고 있던 조선 왕실의 장서는 훗날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으로 넘어가지만, 취조국이 담당했던 조선 문헌 수집 업무는 1925년 개관한 조선총독부도서관으로 이어졌다. 

석고단을 해체하고 지은 조선총독부도서관

 
조선총독부도서관에 자리를 빼앗긴 석고단 1902년 반관반민(半官半民) 성격의 송성건의소가 만든 석고단은 취지로 보면 광화문 네거리에 있는 고종 즉위 40년 칭경기념비와 비슷한 유적이다. 일제가 조선총독부도서관을 석고단 자리에 지으면서 석고단은 황궁우 옆으로, 석고를 보호하던 석고각은 박문사 종각으로, 석고각 앞에 있던 광선문은 동본원사 대문으로 각각 해체 이전했다.
▲ 조선총독부도서관에 자리를 빼앗긴 석고단 1902년 반관반민(半官半民) 성격의 송성건의소가 만든 석고단은 취지로 보면 광화문 네거리에 있는 고종 즉위 40년 칭경기념비와 비슷한 유적이다. 일제가 조선총독부도서관을 석고단 자리에 지으면서 석고단은 황궁우 옆으로, 석고를 보호하던 석고각은 박문사 종각으로, 석고각 앞에 있던 광선문은 동본원사 대문으로 각각 해체 이전했다.
ⓒ 백창민
 
조선총독부도서관은 환구단(圜丘壇) 근처 석고단(石敲壇) 자리에 지었다. 조선총독부도서관의 건립 위치도 '통치 도구'로 도서관을 지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조선총독부도서관 부지는 낙산 아래와 탑골공원이 거론되다가 최종적으로 석고단 영역으로 결정된다. 

1897년 10월 11일 완성된 환구단은 베이징의 천단(天壇)을 본떠 화강암으로 세 개의 단을 쌓고 금색 원추형 지붕을 씌운 제단이다. 하늘과 땅을 비롯한 천지자연의 신위를 모셨다. 환구단과 함께 1899년 세워진 '황궁우'(皇穹宇)는 태조, 하늘, 땅 세 신위를 모신 3층 규모 '팔각정'이다.

동양에서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 하여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라고 인식했다. 둥근 하늘과 네모난 땅 사이에 '팔각형'이 있다고 생각해서 팔각형을 신성한 도형으로 여겼다. 제후국이던 조선은 팔각형을 사용하지 못했는데,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천자의 상징인 팔각형 정자, 황궁우를 세운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이순우에 따르면, 환구단 근처에 있어서 관련 유적으로 오해받는 석고단은 1902년 송성건의소(頌聖建議所)라는 단체가 고종황제 즉위 40년과 망육순(51세)이라는 양대 경축일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원래는 돌로 만든 북(石敲)에 고종황제의 공덕을 새기려고 했으나 제왕의 업적은 서책을 통해서만 전하는 것이라 하여 돌북에 글씨를 새기지 않았다. 

석고는 원래 '석고각'(石敲閣)이라는 건물을 지어 그 안에 두었는데, 일제가 석고단이 있던 자리에 조선총독부도서관을 지으면서 석고단의 수난이 시작된다. 석고를 보호하기 위해 지은 석고각은 1935년 박문사 종각으로 옮겨졌고, 석고각 앞에 있던 '광선문'(光宣門)은 1927년 동본원사 대문으로 옮겨졌다(조선총독부도서관 정문이 들어선 곳이 광선문이 있던 자리다). 석고단 역시 1936년 황궁우 옆,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일제는 경복궁 근정전 앞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었을 뿐 아니라 1913년 고종황제가 대한제국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던 환구단을 없애고 그 자리에 지상 4층, 지하 1층 규모의 '조선철도호텔'을 세웠다. '조선총독부도서관'도 대한제국과 고종황제를 지우기 위한 목적으로 석고단 자리에 지었다. 1938년에는 조선철도호텔 근처에 지상 8층짜리 '반도호텔'까지 들어섰다. 반도호텔은 당시 경성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환구단 영역의 축소와 대한제국 지우기는 일제 강점기 내내 지속됐다.

일제는 대한제국의 탄생과 독립을 상징하는 장소였던 환구단을 훼손하고 가려 식민 통치를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활용했다. 그 과정에서 대한제국이라는 독립국가의 성역을 일개 호텔 정원과 도서관 뒷마당으로 전락시켰다. 정치와 무관해 보이는 도서관을 가장 정치적인 목적으로 활용한 셈이다. 도서관이라는 문화 시설을 헤게모니 장악을 위해 활용한 일제의 통치 전략이 놀랍기만 하다. 

진무천황 제삿날에 개관한 총독부도서관 

 
광통관 조선총독부도서관을 지어주고 조선상업은행이 얻은 광통관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 건물의 하나다. 1909년 완공됐다가 1914년 화재가 나서 1915년 복구했다. 네오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이화여대 건축과 임석재 교수는 광통관을 네오바로크로 지어진 대한의원 본관과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의 계보를 잇는 건물로 파악했다. 지금은 우리은행 종로금융센터로 쓰인다.
▲ 광통관 조선총독부도서관을 지어주고 조선상업은행이 얻은 광통관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 건물의 하나다. 1909년 완공됐다가 1914년 화재가 나서 1915년 복구했다. 네오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이화여대 건축과 임석재 교수는 광통관을 네오바로크로 지어진 대한의원 본관과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의 계보를 잇는 건물로 파악했다. 지금은 우리은행 종로금융센터로 쓰인다.
ⓒ 백창민
 
조선총독부도서관은 1923년 3월부터 공사를 시작해서 1923년 12월에 마무리했는데, 지상 2층, 지하 1층 규모의 본관과 지상 5층 높이 서고로 완성했다. 도서관 업무는 개관 전인 1923년 11월부터 경성부 대화정 2정목 조선헌병대사령부 진단소 안 임시 사무소에서 시작했다. 도서관 개관을 총독부 건물도 아니고 조선헌병대사령부에 사무실을 마련해서 준비한 것도 의미심장해 보인다. 

이순우에 따르면 조선총독부도서관 건립 비용은 총독부가 아닌 조선상업은행이 부담했다. 도서관 건립 비용이 없었던 조선총독부는 건축비와 비품비를 조선상업은행이 부담하도록 하는 대신, 총독부 소유였던 건물을 조선상업은행에 제공한다. 그 건물이 바로 '광통관'으로 알려진 지금의 우리은행 종로금융센터다. 도서관을 지어주고 얻은 건물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정작 조선총독부도서관 건물은 45년 전에 헐렸다.

도서관이 개관한 건 을축년 대홍수가 발생한 1925년이며, 개관한 날짜는 진무천황제일(神武天皇祭日)인 4월 3일이다. 진무천황은 <일본서기>와 <고사기>에서 전하는 초대 천황이다. 진무천황제일은 진무천황이 죽은 날을 기념하는 날로 이 날을 조선총독부도서관 개관일로 잡은 것이다. 도서관 개관 날짜만 봐도 천황의 '신민'(臣民)을 길러내는 교육기관으로 조선총독부도서관을 상정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개관 시점의 도서관 열람시간은 오전 8시 또는 10시부터 밤 9시까지였고, 매주 수요일과 기원절(紀元節), 시정기념일, 천장절축일(天長節祝日), 연말연시(12월 28일-1월 6일)는 휴관했다. 기원절은 진무천황이 즉위한 날이고, 시정기념일은 일제가 한국 통치를 시작한 날이며, 천장절축일은 천황의 생일이다. 천황의 지배와 일제의 식민 통치를 기념하는 날을 도서관 휴관일로 삼은 것이다. 열람료는 1회 4전씩, 10회권은 35전이었고 신문 열람은 무료였다. 

박완서 눈에 비친 총독부도서관

 
박완서 국민학교(초등학교) 시절 일요일마다 경성부립도서관을 즐겨 찾았던 박완서. 그녀는 어린 시절 도서관을 통한 독서 체험을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같은 자신의 작품에 생생히 묘사했다.
▲ 박완서 국민학교(초등학교) 시절 일요일마다 경성부립도서관을 즐겨 찾았던 박완서. 그녀는 어린 시절 도서관을 통한 독서 체험을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같은 자신의 작품에 생생히 묘사했다.
ⓒ 위키백과
 
박완서의 작품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먹었을까>에 보면 조선총독부도서관을 언급하는 장면이 나온다. 국민학교 5학년 때 국어 첫 시간에 '도서관'에 대해 배운 그녀는 친구 복순이와 일요일에 조선총독부도서관을 찾아 나선다. 
 
"선생님이 가르쳐준 도서관은 지금의 롯데백화점 자리였다. 그때 그 도서관을 우리는 공립도서관이라고도 했고 총독부도서관이라고도 했다. 해방되고 나서 국립도서관이 된 바로 그 건물이었다. (중략) 붉은 벽돌 건물엔 권위주의적인 정적이 감돌고 있었고 감히 어디로 어떻게 들어가 책을 빌리는 절차를 밟아야 하는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중략)

안에 충충하게 고여 있는 어둡고도 서늘한 정적을 훔쳐보는 것조차 두려워서 가슴을 졸이며 열려 있는 문을 이문 저문 조심스럽게 엿보고 다니는데 정복을 입은 수위가 달려왔다. 나는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것처럼 어쩔 줄을 몰라 하는데 내 동무는 또박또박 교과서에서 배운 도서관 이용법을 직접 해보려고 왔노라고 말했다. 당장 몰아낼 듯이 눈을 부라리며 달려온 수위였지만 내 동무의 똑똑함에는 감동을 한 듯했다. '허, 고것들 참'하면서 이 도서관에는 아이들 열람실이 없으니 딴 도서관엘 가보라고 했다."

 

박완서와 친구 복순이는 수위가 알려준 대로 총독부도서관에서 가까운 '경성부립도서관'(지금의 남산도서관)으로 향한다. 박완서 눈에 비친 조선총독부도서관의 모습이 인상적인데, 어린 그녀의 눈에도 '국가주의'를 지향한 조선총독부도서관이 위압적으로 다가왔던 모양이다. 

(* ②편으로 이어집니다.)

명동 롯데백화점 주차장에서 이 표석을 본 적 있나요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 조선총독부도서관 ②
조선총독부도서관은 도서관 운영 면에서 눈에 띄는 부분이 있다. 1930년 9월부터 공휴일을 제외하고 연중무휴로 문을 열었고, 1930년 11월에는 도서관 주간을 맞아 라디오 방송을 하기도 했다. 책이 부족한 지방도서관에 매월 50권씩 책을 대출하는 순회문고를 운영했고, 1932년 1월 8일 도서관 이용을 늘리기 위해 60명이 이용할 수 있는 대중문고를 열었다.

1935년 7월 15일 아동석 30석, 부인석 20석을 갖춘 부녀자문고를 무료로 운영하기도 했다. 부녀자문고는 1942년 5월 폐쇄했는데, 박완서가 친구 복순이와 조선총독부도서관을 방문한 건 부녀자문고 폐쇄 이후였던 모양이다. 
1935년 1월부터는 조선총독부도서관장을 회장으로 하는 조선총독부도서관사업회를 만들어 각종 강연회, 강습회, 독서회, 전람회, 좌담회, 영화회를 열었다. 조선총독부도서관사업회 회원에게는 도서관 관보(官報)가 배포되고 도서관 장서의 관외 대출이 가능했다.

분류는 '듀이 십진분류법'(Dewey decimal classification)이 아닌 '조선총독부도서관 분류표'를 따로 만들어 사용했다. 1876년 발표된 듀이 십진분류법이 국제 표준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건 1920년대 후반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총독부도서관 분류표는 1924년 4월 조선총독부도서관 사서로 부임한 시마자키 스에히라(島崎末平)를 중심으로 여러 도서관 분류표를 참고해서 만든 것으로 추측된다. 관장인 오기야마 히데오(荻山秀雄)가 교토제국대학 출신이어서 그런지 '교토제국대학 부속도서관 분류표'와 비슷한 부분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반도 장서의 1/3을 가지고 있었던 조선총독부도서관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의 전신, 제국도서관 1872년 문부성은 도쿄 유시마에 서적관을 개관했다. 유시마서적관은 1875년 도쿄서적관, 1877년 도쿄부서적관, 1880년 도쿄도서관으로 이름을 바꿨다. 1897년 메이지 정부는 제국도서관 관제를 공포해 1907년 도쿄 우에노 공원 도쿄음악학원 부지 안에 제국도서관을 개관했다. 제국도서관은 태평양 전쟁 패전 후인 1947년 12월 국립도서관으로 이름을 바꿨다. 1948년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이 설치되자 1949년 4월 통합돼 국립국회도서관지부 우에노도서관이 되었다.
▲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의 전신, 제국도서관 1872년 문부성은 도쿄 유시마에 서적관을 개관했다. 유시마서적관은 1875년 도쿄서적관, 1877년 도쿄부서적관, 1880년 도쿄도서관으로 이름을 바꿨다. 1897년 메이지 정부는 제국도서관 관제를 공포해 1907년 도쿄 우에노 공원 도쿄음악학원 부지 안에 제국도서관을 개관했다. 제국도서관은 태평양 전쟁 패전 후인 1947년 12월 국립도서관으로 이름을 바꿨다. 1948년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이 설치되자 1949년 4월 통합돼 국립국회도서관지부 우에노도서관이 되었다.
ⓒ Wikipedia
 
조선총독부가 건립한 도서관이었음에도 초기 예산은 이범승이 운영하던 경성도서관보다 조금 많은 수준이었고, 일본 내 현립도서관인 아키타(秋田)현립도서관보다 적었다. 개관 때 확보했던 1만 2천 권의 장서 중 1만 권은 조선총독부의 사무용 도서였고, 2천 권은 조선교육회로부터 기증받은 책이었다.

'건물부터 짓고 보자'는 식의 도서관 정책은 식민 시대의 유산이었던가. 도서관장이었던 오기야마 히데오조차 개관 당시 조선총독부도서관이 책이 없는 '도서무관'(圖書無館)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이여성과 김세용이 발간한 <숫자조선연구>에는 1930년도 조선과 일본 본토의 도서관 현황을 비교한 자료가 있다. 당시 조선은 48개 도서관이 있을 때 일본 본토에는 4609개 도서관이 있었다.

장서수는 조선에 있는 도서관 전체 장서가 31만 5244권일 때 일본 본토는 963만 5566권으로 1천만 권에 육박했다. 열람 인원은 조선이 73만 1337명일 때 본토는 2335만 4767명이었다. 일본 본토와 조선의 수치를 비교하면 도서관 수는 1.04%, 장서는 3.27%, 열람인원은 3.13%였다. '내선일체'를 부르짖은 일제의 도서관 인프라 차별은 수치로도 확연히 알 수 있다. 

초기에는 총독부도서관이라 하기에 초라한 수준이었지만, 1934년부터는 장서수가 12만 권을 넘겨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을 제외하고 조선에서 가장 규모가 큰 도서관이 되었다. 1937년에는 20만 권에 육박하는 장서를 갖게 되고, 하루 이용자 수도 1천 명에 가까웠다. 문제는 조선총독부도서관이 조선 도서관 장서의 1/3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장서의 편중이 심했다.

1937년 당시 일본 제국 안에는 장서량 10만 권 이상 도서관이 38개 관 있었다. 조선총독부도서관은 장서량으로는 19만 9032권으로 18위에 해당했다.

조선총독부도서관보다 9년 먼저 개관한 타이완총독부도서관 장서량이 15만 4천 권 수준이었음을 고려할 때 조선총독부도서관이 비교적 짧은 기간에 장서량을 늘렸음을 알 수 있다. 1944년 5월에는 32만 3121권으로 장서량은 계속 늘었다. 장서 10만 권 이하의 공공도서관이 지금도 흔한 걸 생각하면 75년 전 조선총독부도서관의 장서 규모는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제국대학 부속도서관을 제외하면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 滿鐵)가 건립한 다롄(大連)도서관(21만 2876권)에 이어 조선총독부도서관은 일본 식민지에 있는 도서관 중 두 번째로 많은 장서를 보유하고 있었다. 일본 본토에도 조선총독부도서관보다 더 많은 장서를 가진 공공도서관은 오사카부립도서관(27만 1170권)이 유일했다.

일본 본토의 국가 도서관 격인 제국도서관과 비교하면 조선총독부도서관의 장서량은 어느 정도였을까? 1937년 3월 말을 기준으로 도쿄 제국도서관은 84만 7676권을 소장하고 있었고, 조선총독부도서관은 1/4 수준인 19만 9032권을 가지고 있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장서량이 1/4 수준이었지만 하루 열람인원은 제국도서관이 1327명, 조선총독부도서관이 949명으로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본 제국 내 도서관 중 조선총독부도서관은 하루 이용자가 네 번째로 많은 도서관이었다. 인프라는 열악했지만 식민지 조선에서 도서관에 대한 열망은 그만큼 컸던 것일까. 

총독부 '홍보기관'이었던 조선총독부도서관

 
제7대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 1936년 8월 5일부터 1942년 5월 29일까지 제7대 조선총독으로 재임했다. 육군 대장 출신으로 총독 재임 시절 창씨개명과 조선어 사용 금지 같은 민족 말살 정책을 강행했다. 1945년 일본 패전 후 A급 전범으로 극동국제군사재판에 회부좪으며,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54년 건강 악화로 석방되었다. 1955년 자택에서 사망했다.
▲ 제7대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 1936년 8월 5일부터 1942년 5월 29일까지 제7대 조선총독으로 재임했다. 육군 대장 출신으로 총독 재임 시절 창씨개명과 조선어 사용 금지 같은 민족 말살 정책을 강행했다. 1945년 일본 패전 후 A급 전범으로 극동국제군사재판에 회부좪으며,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54년 건강 악화로 석방되었다. 1955년 자택에서 사망했다.
ⓒ 위키백과
 
조선총독부도서관이 소장했던 책이 어떤 책인지 알기 위해 식민지 조선의 출판 상황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일제는 1909년 2월 '출판법'을 만들어 시행했다. 출판법은 책으로 출간하려는 원고의 사전검열과 사후납본을 의무화해서 출판물을 통제하는 법이다. 뿐만 아니라 한일 강제병합 이후에는 경무총감부 아래 고등경찰과를 승격시켜 도서계에서 신문, 잡지, 출판물, 영화의 검열과 단속을 담당하도록 했다. 도서계는 경무국 도서과, 검열과로 이름을 바꾸면서 일제 패망 때까지 이어졌다. 

일제의 검열과 통제를 거친 책만이 도서관에 소장되고 이용자가 읽을 수 있는 시대였다. 1937년 7월 중일전쟁 이후 7대 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는 내선일체를 명분으로 황국신민 서사를 제정하고, 일어(日語) 상용, 창씨개명, 신사 참배와 같은 '황국신민화' 정책을 강력히 추진한다.

비슷한 시기인 1937년 6월 일본 본토에서 출범한 고노에(近衛) 내각 때부터 일본의 사상 정책은 '사상 통제'에서 '사상 동원'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1937년 9월부터 '국민정신총동원 운동'이 시작되고, 1938년 5월 5일부터는 국가총동원법이 시행되었다. '전선'(front)에서 전쟁 승리를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후방'(銃後, home front)에서 동원할 수 있고, 모든 것이 전쟁에 복무하도록 하는 법이다. 

'문헌보국'(文獻報國)을 도서관 깃발과 노래로 만들어 기치로 세운 조선총독부도서관도 자료 수집과 열람, 운영 면에서 총독부의 정책과 방침을 선도하는 기관이었다. '문헌보국'은 문헌으로 국가에 보답한다는 뜻이다. 이 시기 이후 조선총독부도서관와 관립도서관에서는 조선어 책을 철저히 배제하고 일본어로 쓰인 일서 위주의 책을 수서했을 것으로 보인다. 

일제 강점기 조선은 일제의 일본어 강요로 '이중 언어' 상황에 놓였다. 1913년 0.61%였던 조선인의 일본어 해독률은 1930년대 중반 10%를 넘어 1943년 말에는 22.15%까지 상승했다. 식민지 조선의 엘리트 중에는 조선어를 아예 하지 못하는 사람도 상당수 생겨났다. 문맹율은 여전히 높아서 1930년 즈음에는 80%에 육박했다. 당시 일본의 문맹율은 8.5%였다. 일본인은 열 사람 중 한 사람 정도가 글을 읽지 못할 때 조선인은 열에 여덟이 '까막눈'이었다. 

조선총독부도서관은 근본적으로 조선총독부 학무국 소속 기관으로 일제의 식민통치 정책에 발맞춰 운영되었다. 조선총독부도서관은 1935년 10월부터 발행한 도서관 기관지 <문헌보국>을 발행했다. <문헌보국>에는 도서관 신착도서 목록뿐 아니라 조선 내 발매금지 도서목록, 경무국 납본 목록, 문부성 추천도서 소개가 실렸다.

조선총독부도서관이 금서를 차단하고 일제 추천도서를 홍보하는 '사상 통제 기관'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의 식민지 도서관>의 저자는 조선총독부도서관이 '사회교육기관이라기보다 총독부의 홍보기관으로 기능하다가 패전을 맞았다'고 평했다. 

식민지 도서관 비교 : 조선과 타이완 

 
타이완 국가 도서관인 국립타이완도서관(National Taiwan Library) 태평양 전쟁 과정에서 타이완총독부도서관은 미군 폭격으로 도서관 건물이 파괴되기도 했다. 일본 패전 후 타이완총독부도서관과 남방자료관을 합쳐, '타이완성행정장관공서도서관'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후 '타이완성 타이페이 도서관'을 거쳐 1973년 7월 1일 '국립타이완도서관'으로 이름을 바꿨다. 청나라 시대부터 타이완에 대한 방대한 문서 자료를 보유하고 있다.
▲ 타이완 국가 도서관인 국립타이완도서관(National Taiwan Library) 태평양 전쟁 과정에서 타이완총독부도서관은 미군 폭격으로 도서관 건물이 파괴되기도 했다. 일본 패전 후 타이완총독부도서관과 남방자료관을 합쳐, "타이완성행정장관공서도서관"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후 "타이완성 타이페이 도서관"을 거쳐 1973년 7월 1일 "국립타이완도서관"으로 이름을 바꿨다. 청나라 시대부터 타이완에 대한 방대한 문서 자료를 보유하고 있다.
ⓒ Wikimedia
 
조선총독부도서관 관장은 개관 때부터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오기야마 히데오가 계속 맡았다. 오기야마 히데오는 교토제국대학 사학과 출신으로 교토제국대학 도서관과 이왕직, 중추원, 학무국, 조선사편집위원회 촉탁을 거쳤다. 열정적인 사서라기보다 총독부 방침을 충실히 실행하는 행정가의 면모가 강한 인물이었다. 

타이완총독부도서관의 경우 총독부 학무과장 스미모토 시게키치(隅本繁吉)가 초대 관장을 맡아 개관한 후 제국도서관 사서관 출신이자 일본도서관협회장이었던 오타다메 산로(太田爲三郞)를 초빙해서 2대 도서관장을 맡겼다. 1915년부터 1921년까지 부임한 오타다메 관장 후 3대 나미가타다 히로시(竝河直廣) 관장을 거쳐 1927년 7월부터 야마나카 키코리(山中樵) 관장이 부임했다. 

1945년 일본 패망 때까지 관장을 맡은 야마나카 키코리 관장은 타이완총독부도서관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니가타시청 사회과장 겸 니가타현립도서관장 출신인 야마나카 관장은 타이완 도서관망 확대와 도서관 이용, 독서 보급 확대에 큰 공헌을 한 인물이다.

심지어 야마나카 관장은 1945년 일본 패망 이후에도 타이완에 남아 도서관 재건에 힘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타이완의 경우 1940년 일본어 해독율이 50%를 넘어섰고 1943년 말에는 80%라고 선전됐는데, 도서관 확대와 관련해서 눈여겨볼 수치다. 

조선총독부도서관장 임용은 1923년 11월 29일 개정된 '조선총독부도서관장 및 대만총독부도서관장 특별임용에 관한 건'(칙령 499호)에 따라 '제국대학 사서관' 임용에 관한 규정을 적용했다. 조선총독부도서관이나 타이완총독부도서관이나 도서관장 임용에 관한 기준은 동일했다. 그럼에도 조선과 타이완에서 식민통치 기간 동안 도서관 인프라의 차이가 발생한 건 왜일까? 

타이완보다 못한 조선의 도서관 인프라

 
1914년 건립된 국립타이완도서관 일제가 세운 '총독부 도서관'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우리와 달리 타이완은 타이완 총독부 도서관이 문을 연 1914년을 도서관 개관 시점으로 명시하고 있다. 우리는 해방 후 '국립도서관'이 출범한 1945년 10월 15일을 국립중앙도서관의 개관 시점으로 삼고 있다.
▲ 1914년 건립된 국립타이완도서관 일제가 세운 "총독부 도서관"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우리와 달리 타이완은 타이완 총독부 도서관이 문을 연 1914년을 도서관 개관 시점으로 명시하고 있다. 우리는 해방 후 "국립도서관"이 출범한 1945년 10월 15일을 국립중앙도서관의 개관 시점으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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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총독부도서관'이라는 점에서 조선총독부도서관과 타이완총독부도서관은 같지만 타이완에는 '열정적인 도서관 전문가'가 관장으로 부임했다. 이 차이점이 조선과 타이완의 도서관 정책과 운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1923년 4월  <공립·사립 도서관 규칙>이 공포되면서 대만 공공도서관은 크게 성장했다. 1923년 타이완총독부도서관과 사립 석판문고 2개 도서관뿐이던 타이완 공공도서관 수는 12년 만인 1935년 74개가 됐다. 1942년 3월에는 93개 관이 된다. 1942년 시점에 타이완의 공공도서관 보급률은 일본 본토와 비교해도 거의 차이가 없었다고 한다. 

타이완에서는 1935년 3월 시점에 전체 공공도서관 74개 관 중 35개 관이 순회문고를 운영했고 독서클럽, 강연, 전시 같은 부대행사도 활발했다. 규모가 작은 도서관이 대부분이지만 총독부가 세운 공립도서관이 많았다는 점에서 조선과 큰 차이를 보인다. 포르투갈, 네덜란드, 청나라를 거쳐 일본까지 여러 나라의 식민통치를 경험한 타이완에서 일제 강점기 도서관에 대해 긍정적 평가가 많은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인지 모른다. 

1935년 10월 8일부터 10일까지 '전국도서관대회'가 서울 경성제국대학 강당에서 열렸다. 일본 본토, 조선, 만주, 타이완에서 도서관 관계자 200여 명이 참가한 이 대회에서 조선의 도서관 사업이 일본 본토와 비교해서 크게 뒤처지고 있다는 내용이 언급되고 있다. 행정과 재정 상의 준비 부족을 그 원인으로 꼽았는데, 조선 도서관 인프라의 취약함은 이미 1930년대 중반에 공개적으로 논의되었다. 하지만 조선의 도서관 사정은 일본 패망 때까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조선과 타이완에 대한 일제 식민지 정책의 차이가 영향을 끼쳤겠지만 총독부도서관장을 중심으로 식민지 도서관에서 일한 사서의 전문성과 열정의 차이도 두 식민지 도서관의 '격차'를 만들어낸 요인으로 작용한 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조선은 '불운' 하기도 했다. 일제는 '대동아공영'을 부르짖었지만 도서관 인프라만 놓고 보면 조선은 일본 본토와 타이완에 이어 '3등 신민'의 처지였다. 

일본과 서구 제국주의의 차이
 
소공동 시절의 국립중앙도서관 조선총독부도서관 건물과 장서, 인력을 승계해서 1945년 10월 15일 ‘국립도서관’이 문을 열었다. 국립도서관은 1963년 10월 28일 '국립중앙도서관'으로 이름을 바꿨다. 1968년 소공동에 있던 국립중앙도서관을 촬영한 사진인데 조선총독부도서관 시절 도서관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 소공동 시절의 국립중앙도서관 조선총독부도서관 건물과 장서, 인력을 승계해서 1945년 10월 15일 ‘국립도서관’이 문을 열었다. 국립도서관은 1963년 10월 28일 "국립중앙도서관"으로 이름을 바꿨다. 1968년 소공동에 있던 국립중앙도서관을 촬영한 사진인데 조선총독부도서관 시절 도서관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 국가기록원
 
조선총독부도서관 사서 수는 개관 시점인 1925년 3명, 1929년에는 4명, 1940년에는 6명, 1942년에는 8명이었다. 전체 직원 수는 개관 시점에 19명의 직원으로 출발해서 1940년에는 직원이 77명으로 늘었다. 이중 조선인은 54명이었다. 일제는 통치기구 내에 조선인 등용을 억제하는 정책을 취해왔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 발발과 함께 일제는 조선에서 전쟁 수행을 위한 '총동원체제'를 시행한다. 전시 총동원체제가 시행되면서 관료 수가 늘어나는데, 조선인 관료 수도 함께 늘었다. 조선총독부도서관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럽 제국주의 국가가 식민지 통치를 위해 파견한 관리는 식민지 인구 2~3만 명당 1명인 반면, 일제는 조선인 인구 4백 명당 1명의 일본 관리를 파견했다. 그만큼 일제의 식민통치가 유럽 제국주의 국가에 비해 촘촘하고 세밀하게 조선을 옥죄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는 식민통치의 핵심 중앙부서나 경제기관에는 일본인 관료 위주로 배치하고 조선인은 말단으로만 배치했다. 전략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한 철도국이나 우편국의 경우 조선인을 단 한 명도 쓰지 않았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건 해당 기관에서 일본인 관료 배치 비율은 일제가 생각한 전략적 중요성과 비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조선총독부도서관에 일본인 관료 비율이 점차 낮아졌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뭘까? 일본이 생각한 도서관의 전략적 중요성이 높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걸까? 아니면 총독부도서관에서 일한 조선인이 다른 기관에 비해 협조적이거나 유능했던 걸까? 

조선총독부도서관의 관장과 사서, 서기는 일본인이 차지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조선인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중 조선인으로 부관장 자리에 오른 이재욱과 세 번째 서열까지 올라선 박봉석은 해방 후 조선총독부도서관이 '국립도서관'으로 재탄생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국립중앙도서관의 전신, 하지만 잊힌 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옛터' 표석 롯데백화점 주차장에 세운 국립중앙도서관 옛터 표석. 지금은 백화점 주차장으로 변했지만 바로 이 자리에 조선 도서관 체계의 정점에 있던 조선총독부도서관과 국립도서관이 있었다.
▲ "국립중앙도서관 옛터" 표석 롯데백화점 주차장에 세운 국립중앙도서관 옛터 표석. 지금은 백화점 주차장으로 변했지만 바로 이 자리에 조선 도서관 체계의 정점에 있던 조선총독부도서관과 국립도서관이 있었다.
ⓒ 백창민
 
해방이 되면서 조선총독부도서관은 '국립도서관'으로 바뀐다. 지금의 국립중앙도서관은 조선총독부도서관의 시설, 장서, 인력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국립중앙도서관은 해방 이후부터를 자신의 역사로 인정하고 조선총독부도서관 시절은 역사에 포함시키지 않고 있다(일제의 식민 통치를 함께 겪은 타이완은 국립타이완도서관의 역사를 타이완총독부도서관 개관 때인 1914년부터 꼽고 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도서관이 국립중앙도서관의 '전신'(前身)이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조선총독부도서관 개관에 앞서 총독부 학무국이 기자들에게 밝힌 4가지 도서관 운영방침이 있다. ▲ 조선통치의 주의 방침에 의하여 사상을 잘 지도하며 교육의 보급, 산업의 진행 등에 관한 신구 참고도서를 갖출 것 ▲ 조선 민족의 문헌을 모을 것 ▲ 널리 조선 연구에 관한 화한양서(和漢洋書)를 모을 것 ▲ 전선(全鮮)에 도서관의 보급 발달을 도모하기 위해 지도(기관)이 될 것. 

총독부의 운영 방침처럼 조선총독부도서관은 불온서적을 차단하고 총독부가 선정한 도서와 목록을 소개함으로써, 조선인을 사상적으로 통제하는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구'로 충실하게 기능했다. 동시에 조선총독부도서관이 해방 후 국립도서관의 '토대'가 된 것도 사실이다. 

어두운 시대의 '흑역사'이기  때문일까. 조선총독부도서관에 대한 기록과 연구는 부족해서 이 도서관이 어떤 성격을 가졌고, 어떤 기능을 했는지 그 전모를 알기 어렵다. 일제 강점기 조선 도서관 체제의 정점에 있었고, 이후 국립도서관으로 전환된 도서관임에도 조선총독부도서관에 대한 책과 논문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1973년 발간된 <국립중앙도서관사>에서 다룬 수십 페이지 분량이 고작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조선총독부도서관 시대에 주목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근대 도서관 제도의 큰 틀이 이때 이식됐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에 대한 뜨거운 이슈로 '식민지 근대화론'과 '근대화 맹아론'이 있다. '식민지 근대화론'이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 도서관은 일제 식민통치를 겪으며 근대화된 것인가. 아니면 일제의 통제와 수탈에 의해 한국 도서관의 '자생적 근대화'가 거세된 것인가. 

식민 시대를 거치며 근대 문화시설인 도서관이 도입되고 틀이 놓였지만, 도서관이 사상과 지식의 통제, 천황을 정점으로 한 국가주의가 확산·선전되는 장이었음도 부정할 수 없다. 해방 후 우리 도서관의 과제는 이런 일제 강점기의 유산을 어떻게 청산할 것인가에 맞춰졌어야 했다.

문제는 우리 도서관 분야에서 그런 논의와 실천이 이뤄졌느냐 하는 것인데, 안타깝게도 우리 도서관은 식민 시대의 청산보다는 현상 유지와 도서관학 지식·담론의 수입에 급급했다. 식민 시대의 청산을 미루면서 우리 도서관은 또다른 식민의 현장으로 전락한 건 아닐까. 

조선총독부도서관은 해방 후 국립중앙도서관으로 바뀌었지만, 이 자리는 롯데백화점과 롯데호텔이 들어서며 그 흔적이 사라졌다. 1925년 문을 열어 1974년까지 반세기 동안 조선과 대한민국 도서관 체계의 정점에 있던 건물은 그렇게 사라졌다. 소공동 6번지, 지금은 롯데백화점 주차장으로 사용되는 공간에는 '국립중앙도서관 옛터'라는 표석 하나만 남았다. 

[조선총독부도서관 옛터]

- 주소 : 서울시 중구 남대문로 81 (소공동) 롯데백화점 주차장 1층
- 이용시간 : 월-목요일 10:30 - 20:00, 금-일요일 10:30 - 20:30
- 이용자격 : 제한 없음. 
- 전화 :  02-771-2500
- 운영기관 : 롯데쇼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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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창민

1
#국립도서관’은 ‘#국립중앙도서관’의 옛이름입니다. 사실 국립중앙도서관은 세 번째 이름이고 첫 번째 이름은 ‘#조선총독부도서관’이었습니다. 시인 김수영은 1955년 쓴 <국립도서관>이라는 시에서 “예언자가 나지 않는 거리로 창이 난 이 도서관은 창설의 의도부터가 풍자적이었는지도 모른다”라고 노래했습니다. 그는 조선총독부도서관으로 문을 연 이 도서관의 건립 의도를 비판적으로 바라봤는데요.
‘조선총독부도서관’편에 이어 김수영이 시로 노래한 ‘국립도서관’ 시절을 어떻게 쓸까 저희는 고심했습니다. 여러 자료를 뒤적이다가 슈기님(이혜숙)과 저는 해방과 분단국가 수립, 한국전쟁이라는 격동기를 거친 국립도서관을 ‘도서관장’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이번 편은 ‘관장으로 본 국립도서관 이야기’일 수 있겠네요.
국립중앙도서관은 자신의 역사를 <국립중앙도서관사> <국립중앙도서관 60년사> <국립중앙도서관 70년사> 총 3권으로 펴낸 바 있습니다. 저희는 수천 페이지 분량의 ‘국립중앙도서관사’에서 다루지 않은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정리한 글이 이번 ‘국립도서관’ 편입니다.
2
‘한국 도서관의 아버지’라 불리는 #박봉석 에 대해 관심있는 분은 그의 창씨개명 이름이 ‘와야마 히로시게’(和山博重)라는 걸 아실텐데요. #이재욱 관장의 창씨개명에 대해서는 생소하실 것 같네요. 이재욱 관장의 창씨개명 이름은 아오키 슈조(靑山修三)입니다. 이재욱 관장의 창씨개명 이름에 대해서는 어떤 자료에도 언급이 없지만 <조선총독부 직원록>과 이재욱 집안에 대한 자료를 함께 추적했고요.
<조선총독부 직원록> 자료를 연도별로 확인해서 이전부터 조선총독부도서관에 근무했던 일본인 직원 이름을 하나하나 제외하고 나머지 이름 중에 이재욱을 찾았습니다. 1941년 <직원록>에 ‘사서 관등 3’으로 난데 없이 등장한 ‘아오키 슈조’가 이재욱이 아닐까 추측했는데요. 이재욱이라는 걸 확신한 건 그의 조부 이병학의 창씨가 ‘아오키’라는 걸 확인한 다음이었습니다.
3
일제 강점기에는 사서도 드물었지만 ‘조선인 사서’는 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조선총독부도서관은 조선 도서관 체제의 정점에 있었습니다. 이런 총독부도서관에서 서열 2위와 3위였던 이재욱과 박봉석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그들은 ‘친일파’일까요, 아닐까요?
저희는 오랫동안 이 문제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기사에 썼지만 당시 친일파 단죄 기준으로 볼 때는 ‘친일파’로 볼 수 없다는 것이 결론이긴 합니다. 그들의 관등은 ‘판임관’인 사서였고 해방 이후 거론된 여러 친일파 기준으로 볼 때 판임관은 단죄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당시의 친일파 기준이 최소치에 가까웠다는 건 생각할 필요가 있겠죠. 우리가 '엄격한' 과거 청산을 했다면 이재욱과 박봉석도 부일협력자로 단죄받았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 이재욱과 박봉석의 모든 행적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와야마 히로시게’라는 이름으로 <문헌보국>에 쓴 글까지 포함해 박봉석의 모든 저술을 살펴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 연구가 더 필요하지 않을까 싶네요.
도서관과 문헌정보학계에서 박봉석을 추앙하는 분이 많은 만큼 <박봉석 전집>도 이제 출간됐으면 좋겠습니다. <전집> 하나 출간되지 않은 ‘도서관 사상가’라니, 말만 ‘한국 도서관의 아버지’이라 불리지 사실상 ‘홀대’가 아닌가 싶습니다.
4
이번에 자료 조사를 하면서 박봉석 부관장의 ‘납북 이후 소식’을 처음 확인했습니다. 이번 기사를 작성하기 전부터 저희는 도서관 지도자의 납북 이후 행적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는데요. ‘#납북자’에 대한 자료를 여럿 뒤졌습니다. 그 과정에서 1968년 발간된 <북한총람>을 통해 박봉석 관장의 납북 이후 행적도 찾게 되었고요.
박봉석 부관장이 ‘1954년까지 인민사 잡부로 일하다가 1958년 함경남도 북청 과수농장 노동자로 노동자로 이주했다'는 소식은 ‘충격’이었는데요. 모진 전쟁 과정에서 박봉석 부관장의 ‘생존’ 소식을 확인한 건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박봉석 부관장의 장남인 박기홍씨는 이 소식을 알지 못했는지 2000년 5월 발간된 <도서관인 박봉석의 생애와 사상> ‘후기를 대신하여’에서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더군요.
납북된 도서관인 중에 이재욱, 박봉석, 김진섭, 김구경은 1947년 4월 조선도서관협회 제1차 총회를 통해 구성된 도서관협회 2대 임원진이기도 했습니다. 이재욱 관장이 회장, 박봉석 부관장이 상무이사, 김진섭과 김구경이 이사였죠. 해방 조선의 도서관 전문가가 한국전쟁을 통해 죄다 '납북'되었습니다.
박봉석 부관장뿐 아니라 이재욱, 김진섭, 이인영, 김구경의 납북 이후 행적도 꼭 알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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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때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면서 소공동 국립도서관은 ‘인민공화국 국립도서관’으로 전환되고 ‘서울시 정치보위부’로 쓰였습니다. 위당 정인보와 독립운동가 박열, 백인제, 백붕제를 비롯하여 꽤 많은 이들이 국립도서관에 억류되었다가 북으로 끌려 갔습니다. 저희가 조사한 사람은 지극히 일부였을테고 더 많은 분들이 국립도서관을 거쳐갔을 겁니다.
<납북자 명부>를 살펴보면 북한이 ‘모시기 공작’ 대상으로 삼지 않은 부류도 상당수 납북되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국립도서관이 ‘#정치보위부’로 쓰인 만큼 이 공간의 책임자였던 이재욱과 박봉석은 납북 대상에 오를 수밖에 없었을텐데요.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일제강점기뿐 아니라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우리는 수많은 ‘인재’를 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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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 동안 이어진 국립도서관 시절 거쳐간 관장은 모두 8명. 생각보다 많지 않은 이유는 역대 관장 중 재임기간이 첫번째, 두번째로 긴 조근영 관장과 이재욱 관장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2대 조근영 관장을 ‘자른’ 문교부 장관 이선근은 영남대학교 총장 재임 시절인 1973년부터 1977년까지 #한국도서관협회 11대 회장을 지냈습니다.
국립도서관장을 자른 문교부 장관 출신이 한국도서관협회 회장을 맡은 건데요. 제3대 도서관협회 회장이었던 조근영 관장이 1년만에 회장직에서 물러난 이유가 #이선근 장관 때문이었는데, ‘악연’이라면 악연이네요.
당시 도서관계는 이런 사정을 알고도 이선근씨를 도서관협회 회장으로 ‘선임’하고 ‘연임’하도록 했겠죠. 정운현씨는 이선근을 ‘유신체제 홍보의 나팔수’라고 평한 바 있는데요. 도서관계는 이승만뿐 아니라 박정희 시대에도 승승장구한 그를 통해 도서관 발전을 추진하려는 생각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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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준비하면서 국립중앙도서관 측에 역대 관장의 '약력 자료'를 가지고 있는지 문의했습니다. 해당 자료가 없다는 국중의 회신을 듣고 더 ‘열심히’ 자료를 정리했습니다. ^^
저희가 언급한 관장 중 최락구 관장은 마지막 국립도서관장이자 첫 국립중앙도서관장인데요. 1971년 비위 사실로 창덕여중 교장 자리에서 ‘파면’된 후 다시 공직 생활을 이어갑니다. 황당한 건 최락구 전 관장이 비위 사실로 파면된 후 학교장(여의도고등학교)으로 다시 복귀했다가 서울시교육위원으로 공직을 이어갔다는 사실입니다.
비위로 파면당한 이가 공직을 이어간 것도 이해가지 않는데, 그것도 ‘교육 현장’으로 다시 복귀한 건 당혹스럽기까지 합니다. 비위 인사가 교육 현장에 다시 복귀하는 것 자체가 ‘비교육적’이지 않을까요? ’교피아’라고 불리는 교육부 마피아가 이때부터 준동했던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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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개관한 조선총독부도서관에 이어 1963년 국립중앙도서관 출범 전까지 이야기를 2편의 글로 나누어 썼는데요. 1963년 이후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국립중앙도서관’ 시대를 다룰지는 모르겠습니다.
소공동부터 남산을 거쳐 서초동으로 옮겨가는 반세기 이상의 이야기인데요. 자료는 살펴보고 있는데, 쓸지는 모르겠습니다. 쓴다면 ‘국립중앙도서관 3부작’이 되겠네요.
언제 다 쓰나 싶었는데, 오마이뉴스에 연재중인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도 18편까지 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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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사서' 이재욱과 박봉석은 '친일파'인가?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 국립도서관 ①
지금의 국립중앙도서관은 1963년까지 '국립도서관'이라 불렸다. 1945년 10월 15일 문을 연 '국립도서관'은 조선총독부도서관의 시설, 장서, 사람을 그대로 승계한 도서관이다(관련 기사 : 명동 롯데백화점 주차장에서 이 표석을 본 적 있나요). 

여기서 짚고 넘어갈 부분은 조선총독부도서관의 거의 모든 것을 승계한 도서관이 '간판'만 바꿔단다고 '국립도서관'으로 전환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이 전환은 조선총독부에서 일하던 관료와 경찰이 미군정을 거쳐 대한민국 공무원과 경찰로 그대로 이어진 것과 무엇이 다를까.

도서관이 맞은 '해방'

 
해방은 단 25일뿐?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되었지만 1945년 9월 8일 미군의 진주와 함께 미군정 시대로 돌입했다. 해방이 되었지만 총독부 청사에는 ‘태극기’가 아닌 ‘성조기’가 내걸렸다. 미군 진주와 함께 뒤바뀐 이 상황을 도올 김용옥은 ‘해방은 단 25일뿐이었다’라고 표현했다.
▲ 해방은 단 25일뿐?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되었지만 1945년 9월 8일 미군의 진주와 함께 미군정 시대로 돌입했다. 해방이 되었지만 총독부 청사에는 ‘태극기’가 아닌 ‘성조기’가 내걸렸다. 미군 진주와 함께 뒤바뀐 이 상황을 도올 김용옥은 ‘해방은 단 25일뿐이었다’라고 표현했다.
ⓒ Wikipedia
 
영화계의 거장 임권택은 인터뷰를 통해 그가 맞은 '해방'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남긴 바 있다.
"국민학교 때 학교에서 조선말 썼다고 모질게 때렸던 교사가 해방 후 여전히 학교에 남아 있는 것을 보고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박완서 역시 장편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그녀가 겪은 '해방'의 풍경을 이렇게 남겼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일본인 교장 선생님과 선생님들이 안 보이는 건 당연했지만 일본어를 가르치던 국어 선생님이 그냥 우리말의 국어 선생님으로 눌러앉아 있는 건 잘 이해가 안 됐다."

두 달 전까지 '사상의 관측소' 역할을 하며 '총독부도서관'으로 군림하던 곳이 간판만 바꿔 단다고 '국립도서관'이 되는 걸까. 경찰과 관료뿐 아니라 국립도서관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이런 모습이 우리가 겪은 '해방'의 실체는 아니었을까.

정부 수립 전에 출범한 '국립'도서관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기념식에 참석한 하지와 맥아더 왼쪽부터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 중장, 더글러스 맥아더 육군 원수, 이승만 대통령. 미국의 역코스(reverse course) 전략으로 인한 ‘현상유지’ 정책이 아니었다면 국립도서관의 설립 과정도 달라졌을 가능성이 있다. 서울대학교는 명예박사 학위 1호를 맥아더에게, 2호는 하지에게 수여했다.
▲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기념식에 참석한 하지와 맥아더 왼쪽부터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 중장, 더글러스 맥아더 육군 원수, 이승만 대통령. 미국의 역코스(reverse course) 전략으로 인한 ‘현상유지’ 정책이 아니었다면 국립도서관의 설립 과정도 달라졌을 가능성이 있다. 서울대학교는 명예박사 학위 1호를 맥아더에게, 2호는 하지에게 수여했다.
ⓒ 국가기록원
 
미군이 인천에 상륙한 것이 1945년 9월 8일, 서울 중앙청(옛 조선총독부)에서 교육 담당 업무를 시작한 것이 9월 11일, 미군 장교가 학무국장으로 임명된 것이 9월 14일, 공립초등학교가 다시 문을 연 것이 9월 24일, 한글 교과서 발행 원고가 승인된 것이 10월 15일이다.

국립도서관은 해방된 지 정확히 두 달만인 1945년 10월 15일 문을 열었다. 국립박물관 개관일이 1945년 12월 4일, 과학관 개관일이 1946년 2월 8일인 것을 감안하면, 국립도서관이 얼마나 빨리 문을 열었는지 알 수 있다.

국립도서관이 개관한 1945년 10월 15일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이다. 정부가 수립도 되기 전에 국가가 세운 '국립'도서관이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 제기가 있을 수 있다. 국립서울대학교 역시 같은 질문을 피할 수 없다.

물론 나라는 이어졌으되 주권을 강탈당해 정부가 수립되지 않은 상황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국립도서관과 국립서울대학교 모두 실질적인 설립 주체는 대한민국 정부가 아닌 '미군정'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일제 통치기구와 제도, 인력을 그대로 유지한 미군정의 '현상 유지' 정책이 아니었다면 국립도서관과 국립서울대학교는 다른 방향으로 설립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국립도서관 설립 주체였던 이재욱과 박봉석은 조선총독부도서관 고위직에 있던 이들이어서, 해방된 조국에서 새로운 인물을 중심으로 도서관을 설립하자는 논의가 일었다면 국립도서관 건립 양상도 달라졌을 것이다.

한국 도서관의 아버지, 박봉석 

 
초대 국립도서관 부관장 박봉석 국립중앙도서관 2층 문화마루 전시 공간에 새겨진 박봉석 부조. 해방 직후부터 한국전쟁 기간까지 국립도서관 개관, 조선도서관협회 결성, 조선도서관학교 설립과 같은 활발한 활동으로 우리 도서관의 기틀을 마련했다.
▲ 초대 국립도서관 부관장 박봉석 국립중앙도서관 2층 문화마루 전시 공간에 새겨진 박봉석 부조. 해방 직후부터 한국전쟁 기간까지 국립도서관 개관, 조선도서관협회 결성, 조선도서관학교 설립과 같은 활발한 활동으로 우리 도서관의 기틀을 마련했다.
ⓒ 백창민
 
국립도서관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바로 박봉석이다. 박봉석은 '한국 도서관의 아버지'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1905년 8월 22일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박봉석은 1927년 중앙고등보통학교를 나와 1931년 중앙불교전문학교(동국대학교의 전신)를 졸업했다.

1931년 3월부터 조선총독부도서관에서 일하기 시작했는데, 신분은 고원(雇員)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봉석은 조선총독부도서관에 들어간 때부터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주로 분류와 편목 업무를 담당했다. 1939년 3월에는 일본 문부성 공립도서관 사서 검정시험에 합격했다. 해방이 될 때까지 조선인 중 일본 문부성이 발급한 '사서 자격증'을 보유한 사람은 박봉석과 최장수 두 사람뿐이다.

1940년 개성에 중경문고(中京文庫) 도서관 개관 준비를 맡으면서 새로운 분류표를 완성했고, 이를 조선공공도서관 도서분류표로 발표했다. 1940년 시점에 조선총독부도서관 서열 10위였던 박봉석은 1942년에는 80여 명의 직원 중 서열 3위로 뛰어올랐다. 오기야마 히데오(荻山秀雄) 관장과 이재욱 부관장에 이어 '넘버 쓰리'였던 셈이다.

해방 직후인 1945년 8월 16일 박봉석을 비롯한 조선인 직원은 일본인으로부터 조선총독부도서관을 접수할 것을 결의하고 도서관 장서와 시설 보존에 힘썼다. 1945년 9월 1일 박봉석은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방문했고, 건준으로부터 조선총독부도서관과 철도도서관의 유지를 요청받았다. 조선총독부도서관 접수와 건국준비위원회 접촉, 낙향한 이재욱 관장 추대 같은 일련의 움직임을 보면 박봉석은 '정무적' 감각도 상당한 인물이 아니었나 싶다.

1945년 10월 1일 오기야마 히데오 관장으로부터 도서관 운영권을 넘겨받았고, 10월 15일 아침 9시 이재욱을 관장으로 박봉석을 부관장으로 국립도서관을 개관했다. '국립도서관'이라는 이름은 박봉석과 미군정 문교부 최승만 교화과장이 정했다.

해방 직후에는 무슨 책이건 우리 글로 된 책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강준만은 해방 이후 '유흥계'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호황을 누린 분야가 '출판계'였다며 당시 상황을 '출판의 둑이 터졌다'라고 표현했다. 박봉석은 '문헌수집대'를 만들어 거리에서 뿌려지고 판매되는 인쇄물을 수집했다. 훗날 건국사의 귀중 자료가 될 것을 생각한 조치인데, 이렇게 모인 자료를 해방 1주년 전시회를 통해 공개하기도 했다.

1945년 12월 10일부터 1946년 5월 11일까지는 법률도서를 법제도서관으로 이관하려는 미군정의 조치로부터 도서관 장서를 지켰다. 1946년 4월 1일에는 '조선도서관학교'를 설립해서 사서 양성에 힘썼다. 조선도서관학교는 조선인 스스로 도서관 인력 양성을 위해 설립한 최초의 교육기관이다. 박봉석은 1945년 조선도서관협회와 1947년 조선서지학회 결성을 주도하고 조선십진분류표와 조선동서편목규칙을 발표하며 열정적으로 활동했다.

박봉석 띄우기 '제대로' 하자
 
박봉석이 서훈받은 은관문화훈장 문화예술 발전에 공을 세운 사람에게 수여하는 문화훈장에는 금관, 은관, 보관, 옥관, 화관이 있다. 은관문화훈장은 2등급 문화훈장이며, 박봉석은 2003년 10월 도서관인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이 훈장은 국립중앙도서관 2층 문화마루에 전시되어 있다. 도서관인 중에는 마을문고 운동을 활발히 전개한 엄대섭이 2004년 두번째로 은관문화훈장을 서훈받았다.
▲ 박봉석이 서훈받은 은관문화훈장 문화예술 발전에 공을 세운 사람에게 수여하는 문화훈장에는 금관, 은관, 보관, 옥관, 화관이 있다. 은관문화훈장은 2등급 문화훈장이며, 박봉석은 2003년 10월 도서관인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이 훈장은 국립중앙도서관 2층 문화마루에 전시되어 있다. 도서관인 중에는 마을문고 운동을 활발히 전개한 엄대섭이 2004년 두번째로 은관문화훈장을 서훈받았다.
ⓒ 백창민
 
박봉석을 띄우고 싶어서였을까. 박봉석을 다룬 책마다 박봉석이 만든 조선공공도서관 도서분류표가 "당시 여건으로는 신분상 위험이 따르는 일"이며 "냉혹한 일본의 침략정책 밑에서 박봉석의 굳은 민족의식을 엿볼 수 있는 흔쾌한 일"이라는 서술이 넘쳐난다. 박봉석이 일본 다음에 '조선문'을 배치한 이 분류표가 그의 민족주의적 성향을 드러내는 지점일까?

박봉석은 조선공공도서관 도서분류표를 1940년과 1941년에 걸쳐 <문헌보국>(文獻報國)을 통해 공개 발표했다. <문헌보국>이 어떤 매체인가. 바로 서슬 퍼런 조선총독부도서관의 '기관지'다. 총독부뿐 아니라 특고경찰이 감시의 눈빛을 번득이는 상황에서 민족의식이 엿보이는 분류표를 공개적인 지면을 통해 발표하는 게 가능했을까? 이런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았을 박봉석이 신분상 위험이 따르는 분류표를 만들어 조선총독부도서관 기관지에 발표까지 했다?

박봉석은 <문헌보국>에 발표한 조선공공도서관 도서분류표의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신동아 건설의 가을, 우리 조선 도서관계도 그 박차를 가해야 하나 발랄한 활동을 하고 있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다." 박봉석이 '조선 도서관계도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 언급한 '신동아 건설'은 일제가 부르짖은 '대동아공영권'을 지칭했을 것이다.

박봉석이 만든 조선공공도서관 도서분류표는 그의 민족주의적 성향을 드러내는 대목이 아니라 사서로서 그가 지닌 열정과 성실함을 보여주는 지점이 아닐까. 박봉석에 대한 '조명'은 좋지만 '오버'하진 말자.

'한국 도서관의 아버지', '한국의 멜빌 듀이', '도서관 사상가'... 박봉석에 대한 헌사와 찬사는 넘치지만 정작 그의 '사상'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는 '전집'은 출간조차 되지 않았다. 한국 도서관과 문헌정보학계의 게으름을 탓하지 않을 수 없다. 박봉석을 띄우는 것은 좋다. 이왕 띄우려면 그의 사상을 제대로 살필 수 있는 '전집'이라도 내자.

'한국 도서관의 아버지'인 박봉석이 이럴진대, 다른 사람은 말해 무엇하랴. 초대 국립도서관장 이재욱의 저술을 모은 <이재욱 전집>도 도서관이나 문헌정보학계가 아닌 '영남민요연구회'에서 출간했다.

이재욱은 왜 철저히 잊혔을까 
 
초대 국립도서관장 이재욱 1905년 9월 20일 대구에서 태어난 이재욱은 대구고등보통학교와 경성제국대학 조선어문학과를 졸업했다. <봄은 고양이로다>를 쓴 시인 고월 이장희가 그의 삼촌이며, 중추원 참의를 지낸 대구의 대표적 친일파 이병학이 그의 조부다. 1931년부터 조선총독부도서관에서 일했고, 경성방송국 라디오에 출연, 독서와 도서관 프로그램을 담당하기도 했다.
▲ 초대 국립도서관장 이재욱 1905년 9월 20일 대구에서 태어난 이재욱은 대구고등보통학교와 경성제국대학 조선어문학과를 졸업했다. <봄은 고양이로다>를 쓴 시인 고월 이장희가 그의 삼촌이며, 중추원 참의를 지낸 대구의 대표적 친일파 이병학이 그의 조부다. 1931년부터 조선총독부도서관에서 일했고, 경성방송국 라디오에 출연, 독서와 도서관 프로그램을 담당하기도 했다.
ⓒ 백창민
 
국립중앙도서관 '서고 견학'을 다녀온 적이 있다. 견학 과정에서 관람객의 질문이 나왔다. 국립중앙도서관 2층 문화마루 전시 공간에서 '초대 관장이 아닌 부관장인 박봉석을 기리는 이유가 뭐냐'는 것이다. 그때 견학을 돕던 담당자는 이렇게 설명했다. '박봉석은 사서이고 관장은 사서가 아니라서 그렇다'라고. 사서여서 기리고 사서가 아니어서 기리지 않는다는 설명도 이상하지만 담당자가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있다. 박봉석뿐 아니라 초대 관장인 이재욱 또한 '사서'다.

이재욱은 국립도서관 역사상 유일한 '사서 출신 관장'이다. 대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우현서루'(友弦書樓)라는 도서관을 접한 이재욱은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조선어문학과를 졸업했다. 1931년 조선총독부도서관에 촉탁으로 들어가 '사서'를 거쳐, 1943년에는 조선총독부도서관 서열 2위인 '부관장'이 되었다.

1905년 박봉석과 같은 해에 태어난 이재욱은 조선총독부도서관에도 1931년 같은 해에 들어갔다. 동갑내기에 입사동기인 셈인데, 이재욱의 승진이 더 빨랐다. '제국대학' 출신인 데다가 중추원 참의를 지낸 조부 이병학의 '후광'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식민지 도서관에서 보기 드문 '출세'를 한 걸 보면 이재욱이나 박봉석 모두 '능력'을 인정받았던 모양이다.

오기야마 히데오 관장이 와병 중일 때는 부관장인 이재욱이 총독부도서관을 이끌기도 했다. 이재욱은 1945년 초 조선총독부도서관을 그만두고 고향인 대구로 내려가 경북도청에서 일하다가 해방 이후 박봉석을 비롯한 국립도서관 직원의 추대를 받아 초대 국립도서관 관장이 되었다.

1935년 <농촌도서관의 경영법>을 한성도서주식회사를 통해 출간하고, 해방 후 1947년에는 <독서와 문화>를 조선계명문화사를 통해 출간했다. 이재욱이 남긴 글을 살펴보면 국문학과 민속학, 서지학, 도서관학 분야에서 상당한 식견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이재욱은 조선어문학회와 진단학회, 조선서지학회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946년 박봉석에 이어 조선도서관협회 2대 회장을 맡았다. 박봉석 부관장과 함께 '조선도서관학교'를 만들어 강사로도 활동했다. 일제 강점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그는 도서관 분야 '강습회'에서 빠지지 않는 강사였다. 특히 1939년부터 1943년까지 조선도서관연맹 주최로 열린 도서관 강습회에서 이재욱은 강사로 나선 '유일한' 조선인 사서였다.

그가 가진 실력이나 존재감으로 볼 때 이재욱은 박봉석에 필적하면 필적했지 부족한 사람이 아니다. 박봉석이 도서관학을 중심으로 전문성을 키운 사람이라면 이재욱은 도서관학뿐 아니라 여러 학문 분야를 넘나들며 팔방미인 같은 재능을 뽐낸 사람이다. 도서관 분야 안에서는 박봉석이, 도서관 분야 밖에서는 이재욱에 대한 평가가 높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어찌 된 일인지 이재욱은 잊혔다.

박봉석 역시 오랫동안 잊혔지만 그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지면서 '한국 도서관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다. 하지만 이재욱은 지금도 잊힌 존재다. 이재욱이 철저히 잊힌 이유는 뭘까? 그가 '친일파'라서? 그의 실력이 부족해서? 그가 '납북'되었기 때문에?

이재욱이 일제 강점기 도서관 분야에서 조선인 중 최고위직에 있었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설명했다. 박봉석은 조선총독부도서관 서열 3위였는데, 서열 2위인 이재욱은 '친일파'이고 서열 3위인 박봉석부터는 '친일파'가 아닌 걸까?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이재욱이 '친일파'라면 박봉석도 '친일파'의 혐의를 벗기 어려울 것이다.

이재욱의 실력이나 경력이 박봉석에 못지않거나 그 이상임은 앞에서 설명했다. 이재욱과 박봉석은 한국전쟁 과정에서 '행방불명'되었는데, 둘 다 '납북'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납북 여부도 이재욱이 잊힌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이재욱이 철저히 잊힌 것은 의아하기까지 한데, 그가 행방불명된 후 가족이 미국으로 이주한 것도 이유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도서관과 문헌정보학계의 '무관심'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도서관인을 발굴하고 도서관 역사를 조명하는 데 우리 도서관이 무심하고 게으른 것이 가장 큰 이유 아닐까. 늦었지만 2005년 10월 19일 한국도서관협회는 창립 60주년을 맞아 이재욱에게 공로패를 수여했다.

'제국의 사서' 이재욱과 박봉석은 '친일파'인가 
 
이재욱 전집  영남민요연구회가 펴낸 <이재욱 전집>. 이재욱이 펴낸 <농촌도서관의 경영법>, <독서와 문화>, <동요집>, <영남전래민요집>를 모두 수록한 전집이 2013년 출간되었다. 도서관인뿐 아니라 서지학자, 민요학자, 국문학자로서 이재욱의 면모를 알 수 있다.
▲ 이재욱 전집  영남민요연구회가 펴낸 <이재욱 전집>. 이재욱이 펴낸 <농촌도서관의 경영법>, <독서와 문화>, <동요집>, <영남전래민요집>를 모두 수록한 전집이 2013년 출간되었다. 도서관인뿐 아니라 서지학자, 민요학자, 국문학자로서 이재욱의 면모를 알 수 있다.
ⓒ 백창민
 
해방 직후 박봉석이 일제로부터 장서와 시설을 지키고 국립도서관으로 전환한 것은 공적으로 치하해 마땅하다. 하지만 박봉석이 '사상 관측소' 역할을 한 조선총독부도서관에서 서열 3위까지 오른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조선총독부도서관 부관장이었던 이재욱 역시 마찬가지다. 도서관에 대한 열정과 업무 능력이 남달랐음을 알 수 있지만 이들이 몸담은 조직이 일제 통치 기구의 하나였음을 고려할 때 당황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이재욱은 조선총독부 직원록에 1937년부터 이름이 나타난다. 처음에는 '촉탁'이라고 나오는데 조선인 중에 가장 수당을 많이 받았다. 1939년에는 '촉탁'이 아닌 '사서'로 기록이 나오는데, 총독부도서관에서 일한 조선인 중 가장 먼저 '사서'가 된 것으로 보인다. 총독부도서관에 들어간 지 8년 째인 1939년부터 이재욱은 오기야마 히데오 관장에 이어 두 번째로 관등이 높았다.

1940년에는 이재욱과 함께 박봉석이 '사서'로 기록된다. 1941년 직원록부터는 조선인 이름이 사라지고 일본식 이름만 나타나는데, 사서 '아오키 슈조'(靑山修三)가 이재욱이고, 사서 '와야마 히로시게'(和山博重)가 박봉석이다. 개정조선민사령에 의해 1940년 2월 11일부터 '창씨개명'이 시행되는데, 이재욱과 박봉석 모두 1941년 직원록 작성 이전에 창씨개명을 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총독부 소속 기관에서 일하면서 창씨개명을 피하기 어려웠을 테고 창씨개명 여부가 친일 부역의 잣대는 아니다. 하지만 이들이 식민지 조선에서 '사상 통제'를 주도한 조선총독부도서관에서 고위직에 있던 조선인이라는 점은 당혹감을 안긴다.

일제 강점기 공직자의 관등은 친임관(親任官), 칙임관(勅任官), 주임관(奏任官), 판임관(判任官) 4종류였다. '친임관'은 천황이 직접 임명한다는 의미로 조선에서는 조선 총독과 정무총감 두 사람이 여기에 해당한다. '칙임관'은 총독부 국장과 각도 도지사 같은 고관이다. 고등관 1등급과 2등급이 칙임관에 해당하는데 지금으로 치면 중앙부처 차관과 국장급이다. 칙임관 이상은 '각하'라고 불렸다.

'주임관'은 고등관 3등급부터 9등급까지다. 고등문관 시험에 합격하거나 판임관에서 승진해야 주임관이 될 수 있었다. 주임관 중 참사와 부참사는 1945년 서기관과 사무관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군수도 주임관이었는데, 주임관 이상을 '고등관'이라고 했다. '판임관'은 고위직이 아닌 일반 직원으로 지금의 6급 이하 공무원을 말한다.

조선총독부도서관 부관장 이재욱과 서열 3위 박봉석의 '관등'은 어느 정도였을까? <조선총독부 직원록>에는 1942년부터 오기야마 히데오 관장만 표기하고 직원의 관등은 1941년까지만 기록이 남아 있다. 1941년 이재욱은 사서 관직 4등급, 박봉석은 6등급이었다. <조선총독부도서관 직제>를 살펴보면 관장은 주임관, 사서는 판임관이다. 이재욱과 박봉석은 판임관인 사서였는데 관등은 이재욱이 더 높았다. 해방 즈음에는 이재욱과 박봉석 모두 사서 2등급과 4등급까지 각각 승진했을 가능성이 있다.

해방 후 남조선노동당은 '주임관 이상'을 친일파로 규정했다. 해방 후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은 1947년 3월 13일 '부일협력자, 민족반역자, 전범, 간상범에 대한 특별법률조례'(이하 특별조례)를 상정하고 7월 2일 최종안을 확정했다. 특별조례에 따른 부일협력자는 10~20만 명, 민족반역자는 약 1천 명, 전범은 2~3백 명, 간상배는 1~3만 명으로, 총 20만 명 정도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추산됐다.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특별조례는 미군정 장관이 인준을 거부하면서 시행되지 못했다. 이후 제헌국회에서 만든 '반민족행위처벌법'(이하 반민법)에서는 '칙임관 이상'의 관리를 '친일파'로 규정했다.

남조선로동당의 규정,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특별조례, 반민법 어느 기준을 적용하더라도 이재욱과 박봉석은 친일파로 '단죄'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당시 친일파 청산 기준이 '최대치'가 아닌 '최소치'에 가까웠다는 점은 생각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이재욱과 박봉석이 '사상의 관측소' 역할을 하던 조선총독부도서관의 고위직 조선인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우리가 프랑스처럼 '엄격한' 과거 청산을 했다면 이재욱과 박봉석은 '부일협력자'에 포함되었을 수 있다. 친일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우리는 과학자와 건축가, 사서 같은 '테크노크라트'의 친일과 부역에 대해 관대하거나 신경 쓰지 않는데 이 부분 역시 짚고 넘어 가야 하지 않을까.

해방 후 최린은 반민법정에서 "민족 앞에 죄지은 나를 광화문 네거리에서 사지를 찢어 죽여라"라는 말을 하며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민족대표 33인의 하나로 활약하다가 변절한 최린은 그렇게 자신의 친일과 부역을 사죄했다.

조선총독부도서관을 그대로 '승계'해서 문을 연 국립도서관은 '사상 통제 기관'으로 기능했던 자신의 과거에 대해 어떤 '반성'을 했을까. 국립도서관의 개관일을 1945년 10월 15일로 정하면 그것으로 조선총독부도서관 시절의 과거는 '청산'되거나 '단절'되는 것인가. 국립도서관뿐 아니라 '제국의 사서'이자 일제 강점기 지도적 위치에 있던 도서관인들이 식민 통치 기구에서 일한 과거에 대해 아무런 입장 표명이 없었다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도서관의 식민 잔재 어떻게 '청산'할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 위촉장 수여 및 간담회 2005년 5월 31일 노무현 대통령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 성대경과 위원에게 위촉장을 수여하고 간담회를 진행했다. 이 날부터 2009년 11월 30일까지 4년 6개월 동안 활동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25권 분량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를 발간했다.
▲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 위촉장 수여 및 간담회 2005년 5월 31일 노무현 대통령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 성대경과 위원에게 위촉장을 수여하고 간담회를 진행했다. 이 날부터 2009년 11월 30일까지 4년 6개월 동안 활동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25권 분량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를 발간했다.
ⓒ 정부기록사진집
 
해방 직후에 이뤘어야 하지만 우리는 해방 후 지금까지 제대로 식민 시대를 청산하지 못했다. 이루지 못한 과제는 계속 우리 발목을 붙잡아 해방 75년이 되어가는 지금도 우리는 '청산'을 이야기한다.

식민 시대의 청산은 인적, 물적 청산을 바탕으로 제도와 문화적 청산까지 방향을 잡아 진행해야 했다. 하지만 인적, 물적 청산이 불가능해진 이 시점에서 우리는 어떻게 청산을 해야 할까. 과거에 대한 '역사적 청산'을 통해 '교훈'을 되새기고, 식민의 잔재 중 우리가 극복해야 할 과제를 설정해서 그로부터 '탈피'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청산 과제가 아닐까.

해방 후 일본인이 떠나자 촉탁이나 하급 고원으로 일하던 조선인이 도서관 운영을 맡았다. 도서관 상층을 구성하던 일본인의 공백을 하층에서 일하던 조선인이 메웠다. 일종의 신분 상승이 이뤄진 셈이지만 갑자기 도서관을 맡게 된 조선인들은 어떻게 도서관을 운영했을까?

급한 대로 조선어로 된 장서를 수집하고, 조선에 맞는 분류 체계를 도입하고, 도서관학에 대한 지식도 습득하는 등 해방 조국의 실정에 맞는 도서관을 위해 분주했을 것이다. 넘치는 의욕에도 그들이 아는 도서관 지식은 일제가 이식한 틀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여기서 궁금한 점은 그들이 도서관 업무를 배우고 익힌 일제 식민 시대의 경험과 유산이 우리 시대 도서관에 얼마나 이어지고 어떻게 제도화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우리가 청산할 잔재와 적폐인지 구분조차 쉽지 않지만 지금이라도 이런 작업을 하지 않으면 우리 후손도 '청산'하지 못한 과거를 트라우마처럼 안고 살 것이다.

(* ②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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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에게 찍혔다고... 국립도서관에 얽힌 황당한 사연

한국전쟁이 터지고 1950년 7월 13일 아침 국립도서관 박봉석 부관장은 납북되었다. 이재욱 관장 역시 1950년 7월 15일 정치보위부원에게 끌려갔다.

이재욱 관장이 7월 20일 오후 2시 의정부시 가능동 부근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내용이 <이재욱 전집>에 있지만 확실치 않다. 이재욱 관장의 아내가 그의 납북과 관련해 작성한 실향사민 신고서가 남아 있다. '사망'이 확실하다면 실향사민 신고서를 따로 작성해서 대한적십자사에 제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왜 '납북'되었을까
 

1951년 8월 2일 열린 납북자 가족 총회 모습 한국전쟁 과정에서 8만3천 명이 넘는 비전투 민간인이 북으로 끌려간 걸로 알려졌다. 북한은 ‘자진 월북’이라고 주장하지만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북으로 끌려간 ‘납북자’도 상당수 있을 것이다. ‘월북’이든 ‘납북’이든 북으로 간 사람의 행적과 소식이 알려져야 하며, 북으로 간 사람의 전모가 밝혀져야 한다.
▲ 1951년 8월 2일 열린 납북자 가족 총회 모습 한국전쟁 과정에서 8만3천 명이 넘는 비전투 민간인이 북으로 끌려간 걸로 알려졌다. 북한은 ‘자진 월북’이라고 주장하지만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북으로 끌려간 ‘납북자’도 상당수 있을 것이다. ‘월북’이든 ‘납북’이든 북으로 간 사람의 행적과 소식이 알려져야 하며, 북으로 간 사람의 전모가 밝혀져야 한다.
ⓒ 국가기록원

국립도서관 이재욱 관장, 박봉석 부관장뿐 아니라 서울대학교 도서관 초대 관장을 지낸 김진섭도 납북되었다. 국립도서관 동서과장을 지낸 박희영은 '근대 한국 도서관 선구자 3인'으로 이재욱, 박봉석, 김진섭을 꼽은 바 있는데, 공교롭게 이 세 명은 한국전쟁 과정에서 모두 '납북'되었다. 실제로 이 세 사람은 해방 후 도서관 분야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던 인물이다. 서울대학교 출범 직전 경성대학 시절 도서관장 이인영, 서울대학교 도서관 부관장을 지낸 김구경도 납북됐다.

이신철이 지적한 것처럼 한국전쟁 과정에서 북한은 이른바 '모시기 공작'을 통해 저명인사를 포섭한 걸로 알려져 있다. 북한은 군사위원회 8호 결정에 의해 남한 저명인사 포섭을 위한 실무 책임자로 방학세, 김응기, 이주상, 김창주, 김춘삼을 파견한다. 7월 4일 새벽에 서울에 도착한 이들은 방학세의 지휘로 활동에 들어가며, 국회의원과 정당, 사회단체의 주요 인물을 포섭 또는 강제 연행했다.

'모시기 공작' 대상이 된 인물은 다섯 부류다. ▲ 남한에 머물던 북한 정당.단체에 속한 사람들 ▲ 노동당 비밀당원 또는 지지자면서 남한 행정부와 국회에서 고위직에서 활동하던 사람들 ▲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한 인사들 ▲ 사회 각 분야의 저명인사 또는 전문가이면서 자수하거나 협력에 나선 사람들 ▲ 반동분자로 연행 또는 체포 대상자들이다.

'모시기 공작'에서 가장 중요한 대상은 네 번째 사회 각 분야 저명인사와 전문가로 김규식, 조소앙, 엄항섭 같은 임시정부 요인과 이광수, 방응모, 정인보, 백인제 같은 인물이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자수하거나 북한 정권에 협력할 의사와 상관없이 저명인사와 전문가는 '모시기' 대상이 되었던 모양이다. 포섭 대상이 된 인사는 7월 20일경부터 8월 중순까지 네 차례에 걸쳐 평양으로 후송되는데, 인천상륙작전 이후 평양이 함락되자 압록강변 만포까지 이동했다.

도서관 지도자의 납북과 도서관의 '분단'


국립도서관 해방 후 국립도서관으로 쓰인 이 건물은 1923년 ‘조선총독부도서관’으로 지은 건물이다. 국립도서관은 1974년까지 반세기 동안 소공동에 위치했다. 국립도서관에 있던 자리에는 롯데백화점 주차장이 들어섰다.
▲ 국립도서관 해방 후 국립도서관으로 쓰인 이 건물은 1923년 ‘조선총독부도서관’으로 지은 건물이다. 국립도서관은 1974년까지 반세기 동안 소공동에 위치했다. 국립도서관에 있던 자리에는 롯데백화점 주차장이 들어섰다.
ⓒ 백창민

이재욱, 박봉석, 김진섭은 사회 각 분야의 저명인사 또는 전문가에 해당한다. 해방 후 김일성이 '도서관'에 관심이 많았던 점을 감안하면 남한 도서관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던 이 세 명을 북한에서 '모시기 공작' 대상에 올렸을 가능성은 높다. 인민군이 국립도서관 장서를 북한으로 이송하려 한 점까지 고려하면, 조선총독부도서관 시절부터 소장한 희귀 장서와 도서관 분야 전문가를 포섭 또는 납북해서 북한 도서관 인프라 재건에 활용하려 했을 가능성도 높다.

1968년 발행된 <북한총람>은 납북 이후 박봉석의 행적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박봉석(朴奉石). ▲ 전 도서관 부관장. ▲ 6.25 당시 납북. ▲ 1954년까지 인민지(人民誌) 사에서 잡부로 일함. ▲ 1958년 12월경 함경남도 북청 과수농장 노동자로 이주함."

책에 실린 내용이 사실이라면 너무나 안타까운 소식이다. 박봉석의 간략한 소식 외에는 이재욱, 김진섭, 이인영, 김구경의 납북 이후 행적은 알려진 바가 없다. 한국전쟁 이후 생존했다면 북한 도서관과 학계에서 활동했거나 삶을 이어갔을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이들의 행적을 추적하는 건 남북교류 협력 과정에서 우리 도서관과 문헌정보학계가 풀어야 할 과제다.

또 하나 일제 강점기까지 동질성을 유지했던 남북 도서관이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어떻게 '분단'되어 갔는지 규명하는 것도 과제일 것이다. 대학의 경우 경성제국대학을 모태로 서울대학교와 김일성종합대학이 설립되는 과정에서 '일란성 쌍생아'처럼 미국식 대학과 소련식 대학으로 각각 변모했다는 분석이 있다.

이런 분석은 상당히 눈길을 끄는데 남과 북의 도서관이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친 후 미국의 문헌정보학과 소련의 도서관학을 받아들여 어떻게 변화했는지 '도서관의 분단' 과정을 추적하는 것은 '통일'을 대비한 우리 도서관과 문헌정보학 분야의 또 다른 과제일 것이다.

한국전쟁이 도서관에 남긴 상처 


서울 시가지 전투 서울만 해도 한국전쟁 과정에서 인민군의 점령과 UN군의 재점령이 반복되면서 큰 피해를 입었다. 낙동강 이남을 제외한 한반도 전역의 도서관이 전쟁으로 인해 인적 물적 피해를 크게 입었다.
▲ 서울 시가지 전투 서울만 해도 한국전쟁 과정에서 인민군의 점령과 UN군의 재점령이 반복되면서 큰 피해를 입었다. 낙동강 이남을 제외한 한반도 전역의 도서관이 전쟁으로 인해 인적 물적 피해를 크게 입었다.
ⓒ Wikipedia

한국전쟁 과정에서 도서관이 입은 피해는 컸다. 북한 인민군은 서울을 점령한 후 국립도서관 고서 1만여 권을 이송하다가 우이동에 은닉하기도 했다. 총무과장 남상영이 은닉한 고서를 찾아내 다시 회수했으나 운이 좋은 경우에 해당한다.

한국전쟁 직후 서울대학교 도서관을 둘러본 연세대 민영규 도서관장이 남긴 증언을 보자.

"서고는 텅 비어 있고 난데없이 허청 같은 창고 속에 문제의 규장각 도서들이 몇 백 석 노적가리처럼 쌓아 올려져 있었다. 실로 괴상한 광경이었다. 고서 한 권이 마치 돌멩이 팽개치듯 문전(門前)에서 대각선 저쪽까지 보내자면 10미터도 족히 될 거리를 이리저리 쌓고 쌓인 것이 천정까지 닿아 있었으니 말이다.

백린 사서가 그 몰골이 된 고서 무더기 속에서 석탄 광부가 무색할 정도로 검은 먼지를 뒤집어쓰고 한 권 한 권을 캐어내고 있었다. 시멘트로 된 밑바닥에 썩은 물이 흠뻑 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서울이 유엔군에 의해 탈환은 되었으나 아직 민간의 입주가 허용되지 않았을 때 미 본국의 모기관에서 파견되었다는 어느 여인이 규장각 도서를 마이크로필름으로 찍어 가고 난 뒤의 처참한 모습이 그 꼴이었던 것이다." 

마이크로필름으로 촬영한답시고 썩은 물 바닥에 규장각 귀중본을 노적가리처럼 내팽개치고 간 모기관 어느 여인은 누구였을까? 서울대학교 도서관에서 35년 동안 재직한 박종근에 의하면 미8군 소속 '라이샤워 여사'였다고 한다. 그녀는 이렇게 촬영한 마이크로필름을 오키나와 극동군 사령부로 가져갔는데, 이후 필름의 행방은 묘연해졌다.

한국전쟁 기간 국립도서관은 도서관이 아닌 '다른 용도'로 쓰이기도 했다. 인민군은 서울을 점령한 후 국립도서관을 '서울시 정치보위부'로 사용했고, 납북할 인사를 조사하고 억류하는 공간으로 활용했다. 백인제와 백붕제는 1950년 7월 19일 체포되어 국립도서관에 2주 동안 억류됐다가 서대문형무소로 옮겨졌다. 그후 9.28 서울 수복으로 인민군이 퇴각할 때 미아리 고개를 거쳐 북으로 끌려갔다.

백병원은 유명한 외과의사였던 백인제가 설립한 병원이며, 백병원을 부속병원으로 삼아 1984년 '인제대학'이 출범했다. 인제대학에는 '백인제기념도서관'이 있는데, 대학과 도서관 모두 백인제를 기념하기 위해 명명한 이름이다.

백인제의 동생이자 변호사였던 백붕제의 둘째 아들이 '창비'(창작과비평사)를 이끈 백낙청이다. 백인제와 백붕제는 해방 직후 경성에서 '수선사'(首善社)라는 출판사와 '수선서림'(首善書林)이라는 서점을 운영했다. 창비라는 출판사는 아버지 때부터의 '가업'인 셈이다. 백인제가 살던 집은 정독도서관 옆에 '백인제 가옥'으로 남아 있다.

백인제와 백붕제 외에도 위당 정인보, 독립운동가 박열, 동국대학교 교수 정준모, 대구대학 초대학장 전봉빈, 재무부 인사과장 노흥열, <국경의 밤>을 쓴 시인이자 언론인 김동환, 동아일보 편집국장 장인갑, 서울신문 사회부장 겸 문화부장 여상현, 국제보도사 편집국장 한상직, 자유신문 기자 조경석, 민주일보 기자 호해섭, 방송인 이석훈과 최충현, 출판인 김영철, 창덕여자중학교장 박승호가 소공동 국립도서관에 억류되었다가 납북되었다. '서울시 정치보위부'로 쓰인 만큼 이들 외에도 수많은 인사가 국립도서관에서 조사를 받고 북으로 끌려갔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비롯하여 무릇 전쟁을 통해 파괴되고 훼손된 도서관이 한둘이 아니지만 한국전쟁이 우리 도서관에 남긴 상처는 컸다. 철도도서관과 춘천도서관, 진주도서관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건물과 장서가 온전한 곳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인적, 물적 손실이 막대했다.

대통령에게 찍혀 '잘린' 최장수 국립도서관장


국립도서관 2대 조근영 관장  조근영은 1951년부터 1956년까지 5년 2개월 동안 국립도서관장으로 재임했다. 국립도서관과 국립중앙도서관 역사상 ‘최장수’ 관장이다. 조선총독부도서관 시절 22년 재임한 오기야마 히데오를 제외하면 조근영 관장이 재임기간이 가장 길다. 한국전쟁 때 납북된 이재욱 관장의 재임 기간은 4년 9개월이다.
▲ 국립도서관 2대 조근영 관장  조근영은 1951년부터 1956년까지 5년 2개월 동안 국립도서관장으로 재임했다. 국립도서관과 국립중앙도서관 역사상 ‘최장수’ 관장이다. 조선총독부도서관 시절 22년 재임한 오기야마 히데오를 제외하면 조근영 관장이 재임기간이 가장 길다. 한국전쟁 때 납북된 이재욱 관장의 재임 기간은 4년 9개월이다.
ⓒ 백창민

한국전쟁 발발 초기 이재욱 관장이 납북되면서 공석이 된 관장 자리에 1951년 2월 17일 후임으로 임명된 사람은 조근영이다. 경북 영양 출신으로 와세다대학 정치경제과를 졸업한 그는 초대 문교부(지금의 교육부) 문화국장을 지냈다. 조근영 관장은 5년 2개월 재임했는데, 국립도서관과 국립중앙도서관을 통틀어 가장 재임 기간이 긴 '최장수 관장'이다. 동시에 대통령에게 찍혀 '잘린' 첫 관장이기도 하다.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1956년 4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이 국립도서관을 시찰했다. 도서관을 둘러보는 과정에서 청소 상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이 대통령이 불쾌한 표정을 지은 모양이다. 대통령 시찰로부터 4, 5일이 지난 후 조근영 관장은 문교부 장관으로부터 '스스로 물러나지 않으면 좌천'될 거라는 사임 압박을 받기 시작했다. 청소 상태를 이유로 사임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한 조근영 관장은 <문교부 장관 이선근 씨에게 보내는 공개장>이라는 반박문을 신문 지면에 발표했다.

'지금까지 사재를 털어가며 양심적으로 도서관 발전에 심혈을 기울여 왔는데, 사소한 이유로 기관장을 '초개'와 같이 희생시킨다면 어떤 공무원이 안심하고 자신의 직무에 충실할 수 있겠느냐, 설사 대통령이 일시적으로 화가 나서 과도한 지시가 있다 해도 문교부 장관이라면 사리 판단을 해서 피해가 가지 않도록 조치해야지, 부하에게 사표만을 강요하는 것은 천만부당하다'는 내용이었다.

청소 상태를 이유로 국립도서관장을 사임시키는 것도 황당하지만 대통령이 인상 썼다고 관장을 자른 문교부장관 이선근도 우습긴 마찬가지다. 이승만이 방귀를 뀌었을 때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라고 말했다는 장관의 아첨은 이때부터 이미 싹을 보인 것인가. 교육을 주관하는 주무 장관의 비교육적 작태에 아연해질 수밖에 없는데, 권력에 대한 충성 때문이었을까. 이선근은 성균관대∙영남대∙동국대 총장을 거쳐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초대 원장까지 지낸다.

장관의 부당한 사임 압박을 공개적으로 반박한 후 관장직을 걷어차고 나온 조근영도 대단한데, 그의 기개를 알 수 있다. 조근영은 관장직을 사임하고 민주당에 입당했다. 조근영은 5대 총선 민주당 후보로 경북 영양에 출마했으나 당선되진 않았다. 조근영 관장의 딸 조동원은 열여덟 나이로 결혼했는데, 남편은 훗날 국회의장이 된 박준규다.

조근영은 '지조론'을 설파한 시인 조지훈의 큰아버지이기도 하다. 조근영 관장의 형제는 조헌영, 조준영, 조애영인데, 둘째 조헌영의 아들이 바로 조지훈이다. 조지훈의 아버지 조헌영은 와세다대학 영문학부를 나와 신간회와 반민특위, 제헌의회와 2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했고 한의학자로 유명하다. 조헌영은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

조근영 관장과 그의 형제가 나고 자란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실마을 호은종택은 조용헌이 <500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에서 첫 번째로 다룬 '명문가'다. 한국 인문학의 대가인 조동일, 조동걸, 조동원 교수가 모두 주실마을 출신이다.

1955년 4월 조선도서관협회는 총회를 열어 한국전쟁 후에 활동이 중단된 협회를 '한국도서관협회'로 바꾸고 회장과 간사를 각각 선출했다. 한국도서관협회로 이름이 바뀐 후 첫 번째 회장이 조근영, 간사는 훗날 마을문고 운동으로 유명해진 엄대섭이다.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관장부터 과학자 출신 관장까지


제3대부터 6대까지 국립도서관장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3대 정홍섭 관장, 4대 박만규 관장, 5대 김상필 관장, 6대 최태호 관장. 2대 조근영 관장 이후 국립도서관장 재임 기간은 1년 내외로 대체로 짧았다.
▲ 제3대부터 6대까지 국립도서관장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3대 정홍섭 관장, 4대 박만규 관장, 5대 김상필 관장, 6대 최태호 관장. 2대 조근영 관장 이후 국립도서관장 재임 기간은 1년 내외로 대체로 짧았다.
ⓒ 백창민

조근영 관장이 '잘린' 뒤 국립도서관은 어떤 사람이 관장으로 거쳐갔을까?

3대 정홍섭 관장은 서울 출신으로 일본 야마구치(山口)고교와 규슈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고 충남도청을 시작으로 당진, 서천, 아산에서 군수를 역임했다. 해방 후 관재청, 농림부를 거쳐 1951년 12월 문교부 문화국장을 지냈다. 국립도서관장을 지낸 후 1957년 1월부터 국회 민의원 사무차장으로 취임했다. 1960년 10월 참의원 초대 사무총장이 된 정홍섭은 1961년 부정선거에 대한 문책을 받아 참의원 본회의를 통해 해임됐다.

정홍섭은 역대 국립도서관장 중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유일한 인물이다. 일제 강점기 그의 이름은 요시다 히로아키(吉田浩明). 도서관 분야에도 친일 행적을 보인 이들이 눈에 띄는데, 중요한 시기에 관장 자리에 오른 이가 일제 강점기부터 시류에 잘 영합하는 '친일 관료' 출신이었다는 건 국립도서관에 불행한 일이었다.

3대 관장 정홍섭은 불과 8개월 남짓 관장 자리에 머물러 역대 관장 중 손 꼽을 정도로 재임 기간이 짧은 관장이다. 국립도서관장 자리가 문교부 관료가 '짧게 머물다 가는 곳'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한 건 정홍섭 이후부터다.

4대 박만규 관장은 전남 구례 출신으로 전남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일본 문교성 중등교원 검정시험에 합격한 후 교사 생활을 했다. 해방 후 문교부 편수관과 장학관을 거쳐 문교부 편수국장이 되었고 국립과학관장, 국립도서관장을 차례로 거쳤다.

12개월 동안 국립도서관장으로 재임한 후 1958년 문교부 편수국장에 복귀, 교과서 편수 업무에 종사하다가 1962년 이후 고려대학교와 가톨릭 의과대학 교수로 식물분류학을 강의했다. <우리나라 식물>(1962), <한국양치식물지>(1961),<한국쌍자식물지>(1974) 같은 저서를 낸 식물학자다. 국립도서관장으로는 드물게 과학자 출신이다.

김상필 5대 관장은 1900년 3월 22일 함북 성진에서 태어나 함흥영생중학교 교장을 하다가 해방 후 월남했다. 조선일보 감사역과 문교부 수석장학관, 공보실 선전국장을 거쳐 1956년 8월 문교부 문화국장을 지냈다.

그가 국립도서관장으로 2년 4개월 재임하는 동안 4.19 혁명이 터지는데 '국립도서관 직원들에 의해 사표를 제출케 됐다'는 언론 보도가 남아 있다. 국립도서관에도 '혁명의 기운'이 번진 걸까? 도서관 직원이 들고 일어나 관장을 몰아낸 건지, 관장직을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직원들에게 신망을 잃은 건지 궁금한데,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

1960년 7월 12일 문교부는 문교부 사회교육과장 남상영을 후임 관장으로 발령했다. 한국전쟁 때 인민군이 가져간 고서를 되찾기도 한 남상영은 조선총독부도서관과 국립도서관 근무 경력이 있는 사람이다. 조선도서관학교 교무주임과 조선도서관협회 간사를 맡았던 그는 1956년 국립도서관 사서과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김상필 관장 사표 제출 후 조직을 추스르는 데 적합한 인사라고 평가했던 모양이다. 어찌 된 일인지 남상영은 국립도서관장으로 취임하지 않고 '서리'로 재임명된다. 국립도서관장 자리는 10개월 동안 공석인 상태로 이어졌다.

문교부 관료가 '짧게' 거쳐가는 산하 기관으로


제7대부터 8대까지 국립도서관장  왼쪽부터 7대 이춘성 관장, 8대 최락구 관장. 8대 최락구 관장 재임 때 <도서관법>이 제정되며, 제정된 <도서관법>에 따라 ‘국립도서관’은 ‘국립중앙도서관’으로 명칭을 바꾼다.
▲ 제7대부터 8대까지 국립도서관장  왼쪽부터 7대 이춘성 관장, 8대 최락구 관장. 8대 최락구 관장 재임 때 <도서관법>이 제정되며, 제정된 <도서관법>에 따라 ‘국립도서관’은 ‘국립중앙도서관’으로 명칭을 바꾼다.
ⓒ 백창민

제6대 최태호 관장은 1915년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나 1933년 경성사범학교 연습과를 졸업하고 교사를 거쳐 문교부 편수관과 편찬과장, 예술원 사무국장으로 일했다. 국립도서관장으로 1년 6개월 재임 후에는 문교부 장학관, 춘천교육대학 학장, 서울성동여자실업고등학교 교장을 지냈다.

해방 후 국어 교과서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동화를 쓰면서 아동문학을 시작했다. 대표작은 <리터엉 할아버지>이며 수필가이기도 했다. 4∙19 혁명 직후부터 5∙16 쿠데타에 이르는 정치적 격동기에 국립도서관장을 지냈다.

제7대 이춘성 관장은 1923년 전북 전주 출신으로 1950년 고려대 상대를 졸업하고 1956년 미국 켄터키 주립대학 대학원 경제학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전북대학교 조교수, 전주 USIS 원장, 문교부 문예국장, 공보부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국립도서관장으로 임명되었다. 불과 6개월 동안 국립도서관장 자리에 머문 그는 역대 '최단기 관장'으로 기록을 남길 뻔 했으나 그보다 재임 기간이 더 짧은 관장이 국립중앙도서관 시절에 등장한다.

이춘성 관장은 1966년부터 1968년까지 공보부 차관을 역임한데 이어, 공보부가 문화공보부로 바뀐 1968년부터 1970년까지 문화공보부 차관을 역임했다. 국립도서관장 출신 중 가장 고위직에 올랐다. 1971년부터 1973년까지 전라북도 지사를, 1974년 뉴질랜드 대사를 지냈다.

8대 최락구 관장은 마지막 국립도서관장이면서 첫 국립중앙도서관장이다. 그의 재임 기간 중인 1963년 10월 28일 도서관법이 제정·공포되면서 국립도서관이 '국립중앙도서관'으로 명칭을 바꿨기 때문이다.

최락구 관장은 경남 고성 출신으로 문교부 사회교육과장을 거쳐 국립도서관장에 임명됐다. 소공동 국립도서관 건물을 민간에 매각하고 국유지에 새롭게 도서관을 건립하자는 구상도 이즈음부터 있었던 듯 싶다. 국립도서관장 재임 후 국립과학관장을 거쳐 1967년부터 문교부 편수국장으로 발령받았고 1968년 문교부 편수국장에서 직위 해제된 후 1969년 11월부터 창덕여자중학교장을 맡았다. 그가 창덕여자중학교장으로 재임하던 1971년 7월 8일 경향신문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문교부는 무인가 학급 증설, 신입생 정실 입학 찬조금 강징, 부정 전입학, 부교재 강매 등 부정행위를 저지른 것이 특별감사에서 드러난 서울사대부속국민학교 최삼준 교장, 서울북공고 박재남 교장, 창덕여중 최낙구 교장 등 3명을 8일 직위해제하고 교육공무원법 56조에 따라 징계위에 회부, 파면키로 했다."

국립도서관장 출신이 이후 공직 생활 중 비위 사실로 불명예 '파면' 당한 첫 사례다.

'제국의 도서관'에서 '국립공공도서관'으로


국립도서관 시절의 풍경  국립도서관 시절의 열람실과 목록함, 서가의 풍경을 보여주는 사진으로 1961년 촬영했다. 지금은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사라진 열람실과 목록함, 철망서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시절은 남성과 여성 열람실이 나뉘어 있었고, 칸막이가 높지 않아 ‘가방’을 칸막이 대용으로 사용했다.
▲ 국립도서관 시절의 풍경  국립도서관 시절의 열람실과 목록함, 서가의 풍경을 보여주는 사진으로 1961년 촬영했다. 지금은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사라진 열람실과 목록함, 철망서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시절은 남성과 여성 열람실이 나뉘어 있었고, 칸막이가 높지 않아 ‘가방’을 칸막이 대용으로 사용했다.
ⓒ 백창민

초대 이재욱 관장 이후 국립도서관장은 2대 조근영 관장을 제외하고 대체로 재임 기간이 1년 내외로 짧았고 문교부 관료 출신이었다. '사서 출신' 도서관 전문가의 임명은 이재욱 관장 이후 이뤄지지 않았다. 2대 조근영 관장부터 8대 최락구 관장까지 문교부 국.과장 출신이 아닌 관장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도서관에 대해 전문성을 지닌 사람이 관장으로 선임되지 않고 재임기간도 짧다 보니, 국립도서관장으로서 전문성을 기를 시간도 없었다. 문교부 관료 출신 관장 임명은 대한민국 국립도서관 정체성 확립에 악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국립도서관은 문교부 관료가 '짧게 거쳐 가는' 산하 기관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국립도서관이 국립중앙도서관으로 바뀌는 것은 1963년 도서관법을 통해서인데, 해방 후 18년 만이다. 그 18년 동안 국립도서관은 법으로 명시된 기관이 아니었다. 한때 '제국의 도서관'으로 뚜렷한 존재감을 지녔던 조선총독부도서관은 해방 후 국립도서관으로 거듭났지만 '국립공공도서관' 수준으로 위상이 약해졌다. '국립서초도서관'으로 종종 놀림받는 '국립중앙도서관'의 허약한 위상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인가.

1945년 10월 15일 재개관 시점에 국립도서관이 보유한 장서는 28만 4457권이었다. 국립중앙도서관으로 이름이 바뀐 1963년 시점의 장서는 35만 8198권. 국립도서관이라 불린 18년 동안 늘어난 장서량은 7만 3741권. 한국전쟁 기간이 끼어 있지만 18년 동안 연평균 4096권의 책이 늘어났을 뿐이다. 일제 강점기와 비교하면 장서량 증가 속도는 1/4에 그쳤다.

해방 후 국가도서관의 기틀을 마련했으나 한국전쟁 이후 국립도서관은 장서 증가 속도나 인프라 면에서 일제 강점기보다 퇴보한 건 아닐까. 그런 점에서 국립도서관에게 한국전쟁 이후 시간은 '잃어버린 13년'인지도 모른다.

식민 잔재 청산과 공화국에 걸맞은 도서관 비전을 수립하고 매진했어야 할 이 시대, 국립도서관은 청산도 비전 수립도 하지 못한 채 세월만 흘려보낸 건 아닐까. 조선총독부도서관과 국립중앙도서관 사이에서 '국립도서관'의 시대는 그렇게 저물었다.

[국립도서관 옛터]

- 주소 : 서울시 중구 남대문로 81 (소공동) 롯데백화점 주차장 1층
- 이용시간 : 월-목요일 10:30 - 20:00, 금-일요일 10:30 - 20:30
- 이용자격 : 이용 자격 제한 없음.
- 홈페이지 : http://store.lotteshopping.com/
- 전화 :  02-771-2500
- 운영기관 : 롯데쇼핑(주)

덧붙이는 글 |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는 격주로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국립도서관'을 다룬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②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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