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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4월 27일 월요일

방역체계, 신자유주의, 공공재와 시장--이준구(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2020 0426

"Government is the problem." - Ronald Reagan(1981.2) 이준구(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2020 0426
 
루즈벨트(Roosevelt) 행정부로부터 케네디-존슨(Kennedy-Johnson) 행정부에 이르는 미국 진보의 전성기에 보수 세력은 거의 존재감이 없는 소수파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권토중래를 노리는 보수 세력의 집요한 노력은 드디어 성과를 거둬 1970년대 말부터는 서서히 정치판도가 뒤집어지기 시작했지요. 1980년의 대통령선거에서 레이건(R. Reagan)이 당선되면서 보수 세력은 완전한 승리를 거두기에 이릅니다. 이 보수세력 권토중래의 선봉장으로서 레이건혁명(Reagan Revolution)을 주도한 레이건은 19812월의 대통령 취임식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지금의 위기상황에서 정부는 우리가 직면한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사실) 정부가 바로 문제니까요.” “In this present crisis, government is not the solution to our problem; government is the problem.”
 
레이건 대통령의 이 말은 신자유주의 이념을 대표하는 사고방식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정부를 문제의 해결사로 착각하지 말라, 정부 그 자체가 문제다.”라는 그의 말은 정부는 악덕(vice), 시장은 미덕(virtue)”이라는 신자유주의 이념을 축약해서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마침 대서양 건너편 영국에서는 레이건 못지않은 보수주의의 강력한 전사 새처(M. Thatcher)가 집권하게 되면서 신자유주의의 시대가 화려하게 열리게 되었습니다.
 
신자유주의 정책의 특징은 모든 분야에서 정부의 역할을 줄이고 시장으로 하여금 주역을 맡게 하도록 만드는 데 있습니다. 감세, 지출 감소, 규제 철폐 같은 신자유주의의 전형적 정책이 모두 이와 같은 기본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와 같은 신자유주의의 바람은 비록 미국과 영국에 국한되었던 것이 아니라, 최근 전 세계를 휩쓸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동안의 비교적 평화스러웠던 시기에는 이런 신자유주의 정책의 폐해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코로나 19 사태와 더불어 맹목적인 신자유주의정책의 위험성이 그 민낯을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정부의 역할을 경시하고 어떻게 하든 정부의 활동영역을 줄이는 데 급급해 오던 미국과 유럽의 보수적 정치인들이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위험한 도박을 하고 있었음이 만천하에 폭로되고 말았습니다.
 
이번에 우리가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선진국으로 알고 있던 미국과 서유럽 여러 나라들이 코로나 바이러스에 허무하게 무릎을 꿇게 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이유는 단 하나, 지출 감소에 급급해 공공의료에 투입되던 예산을 마구잡이로 삭감한 나머지 방역체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위기를 맞았던 데 있었습니다. 평시라면 방역체계의 미비가 별 문제되지 않았겠지만, 코로나 19 같은 까다로운 바이러스의 대유행을 막기에는 역부족을 드러내고 말았던 겁니다.
 
지난번에 말씀 드렸듯, 트럼프(Trump) 행정부는 방역 사령탑에 해당하는 CDC의 예산을 어마어마한 수준으로 삭감했습니다. 구체적인 수치는 잘 모르지만, 영국과 프랑스도 공공의료에 들어가는 예산을 미국 못지않은 엄청난 규모로 삭감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코로나 19 치명률이 18%대로 후진국보다 더 높은 수준인 것은 예산삭감으로 인한 방역체제의 미비가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서유럽 여러 나라들 중 비교적 선방하고 있는 나라가 독일이라는 건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이 나라의 치명률이 유독 낮은 것은 역설적으로 그 동안 공공의료에 과잉투자를 해온 것의 덕분이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독일 사회에서는 그 동안 공공의료에 대한 과잉투자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어 논란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과잉투자가 지금과 같은 위기상황에서는 오히려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한 셈이지요.
 
여러분이 잘 아시듯, 우리나라에서도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는 신자유주의정책을 흉내 내려는 노력이 어느 정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운 좋게도 그런 정책이 자리를 제대로 잡기 전에 탄핵을 당해 무대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듯, 우리의 공공의료체계는 세계에서 손꼽을 만큼 우수한 수준입니다. 이것을 그대로 지켜낸 우리의 선택이 지금 세계가 모두 부러워하는 결과를 이끌어낸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방역체계는 일종의 공공재의 성격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공공재와 관련해서 시장이 명백하게 실패한다는 것은 자명한 진리입니다. 신자유주의자들이 아무리 시장의 능력을 높게 평가한다 한들 공공재와 관련해서는 시장이 무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모든 것을 시장메커니즘에 맡겨 놓자고 주장하는데, 코로나 바이러스를 퇴치하는 데 시장이 도대체 어떤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겠습니까? 마스크 유통을 시장메커니즘에 맡겨 놓으면 한 개 천원도 안 되는 것이 만원을 넘는 가격에 은밀하게 거래되는 결과밖에 빚지 못할 겁니다. 우리 사회에 의료민영화가 현실화되어 많은 병원들이 영리를 추구하는 것으로 성격이 바뀌었다면, 코로나 감염자로 의심되는 환자의 치료를 거부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을 게 분명합니다.
 
아무리 시장의 능력이 출중하다 해도 정부를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정부만이 수행할 수 있는 활동의 영역이 있고, 이것을 함부로 훼손해서는 안 됩니다. 이번 코로나 19 사태는 이와 같은 평범한 진실을 무시했을 때 전 사회가 얼마나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미국과 유럽의 정부들이 뒤늦게 후회를 하게 되겠지만, 수만 명 혹은 수십 만 명의 무고한 국민을 죽음으로 이르게 만들어 놓은 뒤 후회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나는 우리나라에서 그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지 않은 것을 천만다행으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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