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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5월 13일 수요일

‘포스트 미국’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뉴딜/ 김동춘

미국의 코로나19 사망자가 8만명을 넘어섰다. 많은 외신은 첫 사망자 발생일이 한국보다 늦었던 미국이 한국과 달리 이렇게 많은 희생자를 낳은 이유에 대해 이미 여러 가지 분석을 쏟아놓았다. 미 전직 대통령 오바마는 트럼프 행정부의 대처에 큰 문제가 있다고 질타를 했다. 그런데 과연 민주당이 집권했으면 상황은 달라졌을까?
 
알려진 것처럼 미국의 의료 기술은 세계 최상이며, 미국에는 가장 수준 높은 의사, 학자, 의과대학이 있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의료비 지출도 세계에서 가장 많다. 이런 미국이 전염병에 이렇게 취약한 모습을 보인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트럼프 대통령의 늑장 대응, 높은 진단 문턱, 마스크를 사용하지 않는 문화 등의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편적 의료보험의 부재를 포함한 공공의료의 취약성을 지적하는 점에 대해 이견이 없다.
 
즉 미국의 방역 실패는 천문학적인 의료비가 제약회사, 병원, 보험회사, 로펌 등 거대 이익집단의 호주머니로 들어가서 전염병과 같은 위기에는 전혀 지출되지 않는다는 데, 최고 수준의 의료 기술은 의료 상품을 구매할 수 있는 부자들을 위해 사용된다는 데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가, 미국의 코로나19 사망자의 70%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는 보도도 있다.
 
국가가 주로 의료 서비스를 공급하는 서유럽 국가의 방역 실패는 미국의 예로서는 설명할 수 없다. 대만과 한국은 중앙정부와 행정집행의 신속성과 투명성, 의료인들의 헌신성, 시민들의 공동체 마인드 등에서 이들 서유럽과 달랐다. 베트남과 같은 국가 통제 방식과는 다른 차원에서 동아시아 민주주의가 방역 성공의 중요한 배경이라고 보는 이유다.
 
결국 문재인 정부의 지도력과 질병관리본부와 같은 제도, 의료인들의 헌신, 효율적인 행정이 방역 성공, 민관협력 모델 등과 같은 케이(K)-방역의 내용일 것이지만, 실제 한국의 공공의료비 지출은 미국보다 낮고 공공병원이나 공공병상, 공중보건의의 수도 서유럽 국가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다. 결국 또 다른 전염병이나 사회적 재난이 닥쳐올 경우, 여전히 매우 취약한 구조를 갖고 있다는 말이다. 더구나 이제 시작된 대량실업 사태, 다가올 에너지·기후 위기 등에도 이번 방역 모델이 적용되기는 어렵다.
 
이천의 창고 화재로 38명의 노동자가 또다시 사망한 사건, 연간 900여명이 산재로 사망하는 한국의 모습은 방역 성공 이면의 불편한 진실이다. 방역이 치료는 아니며, 위험 자체의 차단도 사회적 안전망도 아니다. 여전히 한국에는 이익이 남지 않는공공부문을 유지할 수는 없다는 세력의 힘은 미국만큼 막강하다. 대구의 유권자들은 공공병원인 진주의료원을 폐쇄한 홍준표 전 지사를 또다시 선출했다. 공공병원이라고는 대구의료원 하나밖에 없는 메디시티대구에서 초기 감염 환자가 폭증하자 다른 환자들이 치료받지 못해 많이 사망했다. 재벌기업과 미래통합당은 이명박·박근혜 정부 이후 의료 상업화를 일관되게 주창해왔다. 나라 곳간 열쇠를 쥐고 있는 기획재정부 역시 같은 입장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3주년을 맞이해서 이제 세계 선도국가의 자신감을 내보였다. 지금 한국은 충분히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다. ‘전 국민 고용보험제의 기초를 놓겠다는 의지, 감염병 전문병원 설립 등 공공의료를 강화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도 높이 살 만하다.
 
그러나 포스트 코로나시대에 한국판 뉴딜을 말하기 위해서는 포스트 미국을 먼저 말해야 하고, 20세기 뉴딜과의 차별성도 강조해야 한다. 코로나 재난이 미국의 시스템과 서유럽을 포함한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방역·의료 시스템의 허점을 드러낸 것은 과도한 의료 상업화와 민주주의의 결핍, 사회적 응집성의 해체, 그리고 문명사적 차원에서의 인간의 지구자원 약탈로 인한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이 진정한 선도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미국식 의료·복지 시스템, 즉 국가가 기업에 포획되어 인간의 생명과 안전, 사회의 지속가능성과 관련된 영역을 영리추구의 시장으로 보는 사고를 재고하고 공공부문의 역할을 강조해야 한다.
 
문 대통령이 강조한 새로운 산업정책과 고용 안전망 확보는 경제적 강자의 양보와 사회적 타협, 그린뉴딜의 전망을 포함하지 않는다면' 21세기 뉴딜의 역사적 의미를 가질 수 없다. 고용보험 확대 계획만 빼면 이 뉴딜 선언이 이명박·박근혜 정부, 재벌과 경제부처 관료들이 지속적으로 요구해온 미래 산업 육성정책과 무엇이 다른지도 애매하다. 시민과 취약층이 진정한 주권자로서 국가 운영에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새로운 민주주의의 비전, 그것이 포함되어야 21세기 한국판 뉴딜이 될 것이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4469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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