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2020년 7월 6일 월요일

일곱 해의 마지막 / 김연수 지음

김연수가 소설로 되살려낸 북한의 백석 시인
백석은 삶에서 실패했을지언정 시를 지켰다
 
백석(1912~1996)은 시인들이 사랑하는 시인으로 일컬어진다. 안도현 시인이 대표적이다. 그는 자신의 시집 <외롭고 높고 쓸쓸한>의 제목을 백석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에서 가져왔으며, 아예 그의 삶을 추적해서 <백석 평전>으로 정리하기도 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같은 백석의 시들은 후배 시인들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들 사이에서도 뜨거운 사랑을 받는다.
 
백석은 1988년 납·월북 문인 해금 때까지 남한에서는 금기로 묶여 있었다. 그러나 그는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같은 좌익 문학단체에 소속돼 활동한 바가 없으며, 작품에서도 특정한 이념적 경사가 보이지 않는다. 평안북도 정주가 고향인 그는 엄밀하게 말해서 납북이나 월북이 아닌 재북’(在北) 시인으로 분류된다. 해방과 분단 뒤 남쪽으로 내려오지 않고 북에 남은 것인데, 그 뒤에 쓴 작품들은 시집 <사슴>(1936)의 수록작들을 비롯해 1930~40년대 시들에 비해 질이 크게 떨어진다. 북한 체제의 이념을 대변하는 동시가 주를 이루었고, 시인으로서보다는 러시아 문학 번역가로 더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1959년 양강도 삼수군 국영협동조합으로 내려가서는 축산반에서 양을 치는 일을 맡았으며, 1962년 이후로는 작품을 내놓지 않았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이후 김연수가 8년 만에 내놓은 장편소설 <일곱 해의 마지막>1956년부터 1962년까지 백석의 문학적 생애의 마지막 7년을 다룬다. 1956년 초 소련에서 흐루쇼프가 스탈린 개인숭배를 비판하면서 조성된 해빙분위기는 북한 문학에도 영향을 끼쳐서, “경직된 도식주의에서 벗어나 문학의 감동과 개성을 되찾자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백석을 모델로 삼은 소설 주인공 기행(백석의 본명)도 그에 고무되어 한동안 쓰지 않았던 시를 다시 쓸 수 있겠다고 생각하지만, 이내 반동의 철퇴를 맞는다. “기행의 시가 낡은 미학적 잔재에 빠져 부르주아적 개인 취미로 흐른다는 비판에 맞닥뜨린 것이다.
 
<일곱 해의 마지막>은 쓰고 싶었던 시를 쓰지 못하고 쓰기 싫은 시를 쓰라는 압력에 시달리던 기행의 고뇌와 선택을 그린다. 중앙당 지도위원과 작가동맹 위원장 등은 그에게 체제 찬양 시를 쓰라는 압력을 줄기차게 가하고, 기행은 차라리 침묵과 수모를 감당하기로 한다. 그가 남들의 눈을 피해 썼을 시들은 공책에 담겨 러시아 시인 벨라에게 맡겨지는데, 우여곡절 끝에 결국 멸실되어 버린 그 공책 속 시들은 독자의 안타까운 호기심을 자극한다.
 
백석은 사회의 압력에 시달리다가 쓰지 않는 쪽으로 선택을 한 사람입니다. 삶에서는 실패했을지언정 시를 지키기 위한 행동이었지요. 경우는 다르지만 저도 백석과 비슷한 고민과 선택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가 변하면서 제가 알던 문학 개념에 변화가 생겼고, 작가에게 원하는 것도 달라졌어요. 제가 기획사에 소속됐다가 나온 게 그런 고민의 일단이었습니다.”
 
1일 오후 한겨레신문사 근처 찻집에서 만난 김연수는 이 소설을 쓰면서 문학에 대한 생각을 다시 다잡고 본래 내가 지녔던 문학관에 더 확신을 지니게 되었다고 말했다. 일찍이 김연수는 이상의 유품과 유작에 얽힌 이야기를 추리적 기법에 담은 소설 <꾿빠이, 이상>(2001)을 낸 바 있다. 이번 소설 <일곱 해의 마지막>에서도 비밀이 없는 사람은 가난하다고 말했던 친구가 누구였지?”라는 상허 이태준의 방백을 통해 이상이 다시 환기된다. <꾿빠이, 이상>을 가리켜 김연수는 왜 어떤 문학은 진짜가 되고 어떤 문학은 가짜가 되는가 하는 의문에 답해 본 소설로, 사실상 내 문학의 출발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소설에는 북한 문단의 실력자였던 소설가 한설야가 병도라는 본명으로 나오며, 백석의 친구들인 허준과 신현중도 각각 으로 등장한다. 기행이 러시아에서 온 시인 벨라의 통역으로 함흥을 여행하는 장면에서는 월북한 만담가 신불출이 신안남으로 동행해 특유의 입담을 선보인다. 신불출은 얼마 전에 나온 손홍규의 소설 <파르티잔 극장>에서도 유선생이라는 이름의 비중 있는 조연으로 그려진 바 있다.
 
백석의 독자라면 이런 주변 인물들보다는 그의 시 구절들을 책 속에서 찾는 재미가 더 쑬쑬할 법하다. “높은 시름이 있고 높은 슬픔이 있는 외로운 사람을 위한 마음이 불타오를 것이다라는 문장이 흰 바람벽이 있어에서 왔다면, “그러다가 어느 사이에 아내였던 경과도 헤어지고, 또 경과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을 강력하게 환기시킨다. “그는 모닥불에 담뱃잎을, 말린 오물(=바이칼 생선), 고기와 소금과 쌀과 밀가루를, 무명을, 성냥을, 빈병을, 혹은 그게 무엇이든 손에 잡히는 대로 던져 넣었다모닥불에 대한 오마주로 읽힌다. 이밖에도 여우난골족’ ‘’ ‘주막’ ‘여승’ ‘통영 1’ 등 백석 대표작들의 흔적이 책 곳곳에 뿌려져 있어 숨은그림찾기처럼 찾는 재미를 준다. 전체주의 체제 아래 예술가의 시련이라는 주제에서는 소련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삶을 다룬 줄리언 반스 소설 <시대의 소음>과 같이 읽어도 좋겠다.
 
김연수는 작가의 말에서 언제부터인가 나는 현실에서 실현되지 못한 일들은 소설이 된다고 믿었다그러므로 이것은 백석이 살아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자, 죽는 순간까지도 그가 마음속에서 놓지 않았던 소망에 대한 이야기다라고 썼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952088.htm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