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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7월 20일 화요일

박은희 감독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시들어가는 노년기를 성장기보다 늘이려 애써왔다. 그러니 노년에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그리고 노년은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생각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 101살에 유명을 달리한 전설적인 편집자 다이애나 애실은 200691살에 <어떻게 늙을까>(2016) 쓴 이유를 이렇게 썼다. “청춘에 관한 책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오고 출산 경험을 다룬 책들도 쏟아져 나오는데노년을 다룬 책은 별로 없어서다. 애실이 책으로 보여준 것처럼 할머니들의 기록이 늘어나고 있다. 이 할머니들은 정형화된 틀로 가둬지지 않는, 몰랐던 미지의 할머니들이다.

김영옥 페미니스트 연구활동가는 늙은이를 가리키는 대명사가 아직 발명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노인도, 노년도, 어르신도, 시니어 선배도, 할머니나 할아버지도, 할매나 할배도 다 온전한 자긍심을 담기에는 역부족이다.”(<흰머리 휘날리며, 예순 이후 페미니즘>) 올바른 이름이 발명되기 전, 그나마 비슷한 할머니의 정의는 날로 풍부해지고 있다. <진짜 멋진 할머니가 되어버렸지 뭐야>의 김원희씨는 유골이라면 운송비도 그다지 들지 않는다며 세계 곳곳을 여행하고, 박막례 할머니가 유튜브에서 순발력과 유머감각을 뽐낸 지 어언 4년이 지났고, 유튜버 밀라논나는 엘레강스의 대명사가 됐다.

젊은층도 할머니에게 열광한다. 김연수는 다이애나 애실의 책을 읽고 쓴 글에서 그때 어떤 분이 장래희망에 대해 물었는데 얼떨결에 할머니라고 대답해버렸다. 얼결이라고는 했지만, 지금도 마찬가지 생각이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세상에는 멋진 할머니들이 정말 많다. 할아버지들은, 글쎄 잘 모르겠다.”(<시절일기>)

이런 마음에서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까. 무루는 어른을 위한 그림책 읽기책의 제목을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라고 달았다. “나의 쓰기가 할머니의 바느질 같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다. “(할머니의) 손은 오래된 것들을 쉽게 버리지 않는 손이고, 때로는 그것들을 모두 꺼내 과감히 자르는 손이며, 끝내는 섬세하고 다정하게 깁고 이어 아름다운 무늬를 만들어낼 줄 아는 손이다. 나이 든 어느 날의 내 손이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손이기도 하다.”

여기 다정하고 과감한 미지의 할머니들이 있다. 어느 날 내 모습이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그 세계로 떠나보자._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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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뭐 찍는 거야? 어디서 왔어? 영화에 나오고 나 유명해졌어. 이 동네에서만 50년 살았어. 여기서 슈퍼 하는데 여길 재개발하려고 한다잖아. 동네를 보존해줘야 해. 음료수라도 먹고 가.”

지하철역(지하철 8호선 산성역이나 신흥역)에 내려서 걸어갈 수 없을 만큼 높은 지대에 자리잡은 오래된 마을, 경기도 성남시 태평동. 그 동네에 들어서자마자 영화처럼영화 <태평동 사람들>에 등장했던 할아버지가 말을 건넸다. 다큐멘터리영화이니 별도의 세트장이 필요 없었겠지만 간판 속 글자가 다 떨어진 방앗간도 미용실도 그대로라 영화 속에 들어온 듯했다. 물론 이 풍경이 언제까지 그대로일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기록을 남기는 일에 박은희(66) 감독이 나섰다.

그는 2020년 서울노인영화제에서 <태평동 사람들>로 노인감독 부문 대상을 받았다. 영화는 예전에는 시청도 있었고 가장 번화했던 그곳의 역사를 기억하는 노포 상인들의 삶을 담아냈다. “1969년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이 일대에 터를 잡고 산 상인들을 인터뷰했어요. (경남) 마산에서 태어났지만 결혼하고 1979년부터 성남에서 쭉 살았기 때문에 (인터뷰하면서) 잊었던 옛 시간이 생각나고 하나하나 공감되지 않은 부분이 없었죠. 재개발이 계속되는 성남 원도심을 영상으로 남기는 일을 계속하고 싶어요.” 202179, 태평동에서 만난 박 감독이 말한다.

공모전·영화제 수상작만 7

박 감독이 영상을 만난 건 2011, 성남문화원에서 영상편집을 배울 기회를 얻었을 때다. “컴퓨터에 사진 옮기는 것 정도나 할 줄 아는 수준이었죠. (프로그램) 프리미어로 영상을 편집하는 것을 배워야 하는데, 처음엔 집 컴퓨터에 프리미어를 까는 방법도 몰라서 선생님에게 물어봤어요. 정말 미쳤었죠. 하루에 16시간씩 영상편집을 했어요. 눈뜨면 컴퓨터를 켰고 밥을 먹었는지도 안 먹었는지도 잊고 빠져들었죠.”

201212월 문을 연 성남미디어센터의 시민제작단원으로 활동하면서 영상을 본격적으로 제작했다. 그 후 30여 편의 영화를 만들었고 이 가운데 공모전·영화제 수상작도 7편이나 나왔다(표 참조). “시민제작단 1기가 5명이었는데, 혼자 50대고 나머진 3040이었어요. 그들은 디에스엘알(DSLR·디지털일안반사식) 카메라를 잘 다루는데 나만 캠코더로 찍는 사람이라서 주눅 들었죠. 센터 계단 올라가는 길이 지옥 같기도 했어요.”

2019년 성남문화재단 지원을 받아 영화를 찍게 되면서 스태프로 참여한 젊은 친구들과 협업 경험을 쌓았다. 2019년엔 태평동, 2020년엔 산성동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고, 2021년엔 수지1동을 함께 찍고 편집하는 중이다. <태평동 사람들>처럼 성남의 오래된 마을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그동안은 캠코더로만 하다가 2020년부터 디에스엘알로 찍었어요. 혼자 유튜브를 보면서 배웠죠. 노안이 와서 돋보기를 쓰고 초점을 맞추다보니 시간도 오래 걸렸어요. 다른 스태프가 옆에 있으니 빨리빨리 못해서 눈치도 보였고 자존심도 상했죠. 그래도 천천히 내 페이스대로 하려고 합니다.”

여행 뒤 사진 붙인 동영상을 보고

애초 박 감독이 영상에 관심 갖게 된 것은 여행 때문이었다. “1979년 결혼했는데 식품대리점을 운영하던 남편 사업이 꽤 잘됐죠. 그러다 남편이 결혼 10년 만인 1989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어요. 이후 직접 대리점을 맡아 3년 정도 운영했는데 관뒀어요. 그때부터 여행을 많이 다니며 마음의 위로를 얻었죠. 그러다 2000년대 후반 스페인 여행을 다녀온 뒤 여행 가이드가 사진을 이어붙여 동영상으로 만들어준 것을 보고 호기심이 생겼어요. 나도 이렇게 영상편집을 해보고 싶다고요.”

박 감독에게 가장 의미 있는 작품은 2018년 서울노인영화제에서 장려상을 받은 <큰엉가>.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놨기 때문이다. “큰언니는 9남매 중 막내인 나보다 19살이 많았어요. 큰언니와 나는 같은 해에 남편을 잃었어요. 언니 54, 내가 35살일 때였죠. 당시 언니가 나와 남편을 중매했기 때문에 남편 떠난 뒤 언니가 너무 힘들어했어요. 큰언니가 세상을 떠나고, 언니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다보니 내 이야기도 자연스레 나왔어요. 나는 당당하게 잘 살고 있는데 사람들이 혼자된 나를 불쌍하게 보는 것이 싫어 아무에게도 내 이야기를 한 적 없었거든요. 영화를 찍는 동안 온몸이 다 아프고 살도 빠졌어요. 나를 내보이는 일이 너무나도 아프더라고요. 영화제에 내지 말까 고민도 들었지만 막상 작품을 상영하면서 빵 터뜨리고나니 괜찮았어요.”

꾸준히 하니 하나뿐인 아들의 반응도 달라졌다. “아들은 어머니 놀잇감에 돈을 많이 들인다하더군요. 사양이 좋아야 한다고 컴퓨터도 세 번 바꿨지, 디에스엘알도 샀지. 밥도 안 해주고 내내 컴퓨터 앞에 앉아 있으니 뭐가 좋았겠어. 그래도 꾸준히 상 받고 결과물을 내니까 아들도 이젠 나를 지지해줘요. 아들도 엄마 영향을 받았는지 하고 싶은 일 즐겁게 하며 살고 있어요. 아들에게 결혼하라고 잔소리도 하지만 꼭 결혼해야 하나 생각도 들어요. 어차피 인간은 이러나저러나 외롭다, 행복하고 니 좋아하는 거 하면 된다고 말해줬어요.”

꿈은 죽기 전까지 내 다리로 걸어다니는 것

박 감독의 꿈은 계속 영화를 찍는 것이 아니다. “죽을 때까지 내 다리로 걸어다니는 것이라고 한다. “체력을 위해 꾸준히 운동하고 있어요. 걷기와 스트레칭을 빼먹지 않죠. 여행도 좋아하고 영상도 찍어야 하는데 다리가 시원찮으면 안 되니까요.”

60대인데다 손자도 없는 그에게 노인이나 할머니라는 호칭은 어색하다. 코로나19 이후로 고령자라는 말에는 익숙해졌다. “고령자 처지에서 보면 70대도 청년이죠. 지금 우리는 원치 않아도 100살까지 살 수밖에 없잖아요. 70살에 시작해도 30년을 더 살아야 하니 충분히 시작할 수 있는 나이죠.”

박 감독은 스스로가 특별한 사람으로 비칠까봐 걱정했다. 평범한 사람이지만 그저 열심히, 꾸준히 했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원래 필름카메라로 사진 찍는 걸 좋아했고, 50살 넘어 영상이라는 재미있는 것이 나를 찾아왔어요. 젊은 사람보다 느린 속도로 독학했지만 끝까지 성실하게 하는 사람이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힘들기도 해요. 장비도 무겁고 요즘에 너무 덥잖아요. 최근에도 영화 그만 찍을까 고민했어요. 그런데 그럼 뭐 하고 놀래? 스스로 물었죠. 여행도 못 가는 이 시국에 내가 좋아하는 건 이것뿐인데. 그래서 또 카메라를 든 거죠.”

신지민 기자 godjimin@hani.co.kr


출처 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0657.html?_fr=mb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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