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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5월 27일 월요일

내 마음속 초모룽마, 눈앞의 북한산…

  
 ▲ 초모룽마.
사진 출처: www.project-himalaya.com ⓒ
 
 

<모래시계 古今- 5.29> 1953년 5월 29일 당시 서른세 살의 에드먼드 힐러리와 네팔인 세르파 텐징 노르가이가 세계의 최고봉 에베레스트를 '정복'하였다. 이를 기념하는 갖가지 행사가 네팔에서 열리고 있다.

최근의 외신 보도에 따르면 힐러리의 아들 피터 힐러리와 텐징 노르가이의 손자 타쉬 왕축 텐징이 다른 이들과 함께 줄지어 에베레스트에 올랐으며, 미국의 내셔널 지오그래픽 방송이 이들의 등정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소식을 접하면서 웬일인지 내 가슴 깊숙한 곳에서는 눈물이 흘러나온다. 슬픔의 눈물이!

단독산행으로 유명한 등반가인 라인홀트 매스너는 <산은 내게 말한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더 높이 오를수록 나 자신을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된다. ……나는 에베레스트 산이든 어떤 산이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산에 올라야겠다는 야망 때문에 산에 오르는 것은 아니다"라고.

순수한 열정에 사로잡힌 인간의 말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자신을 더 깊이 들여다본다는 선적인 혹은 영적인 목적이라면 굳이 에베레스트를 택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우리는 매스너보다 더 깊이 자신을 들여다본 이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또한 1924년에 에베레스트 정상을 향해 떠난 뒤 행방불명된 산악인 조지 멀로리는 "산이 거기에 있으니까"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과연 에베레스트가 거기 있기 때문에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것일까.

나는 묻는다. 왜 사람들은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에 오르려 했는가. 왜 오르려 하는가 하고.

우선 오늘날 우리가 일상 용어로 쓰고 있는 등산(登山)이라는 말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 한다.
등산은 산에 오르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행위를 말한다. 이 말은 물론 이전부터 쓰인 용례가 있지만, 지금 우리가 쓰는 뜻의 등산이라는 말은 서양의 알피니즘(영어의 alpinism 프랑스어의 alpinisme, 독일어의 alpinismus 등)을 번역한 말이다.

알피니즘이란 유럽의 지붕인 알프스산을 '정복'한 역사와 관련이 있으며 그것은 철저하게 근대적인 자연관, 즉 자연이 정복의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현재와 같은 의미를 가진 등산이 이루어진 것은 1760년 스위스의 자연과학자 H.B.소쉬르가 프랑스의 샤모니를 방문하고, 알프스의 최고봉 몽블랑의 첫 등정에 현상금을 걸었고 1786년 의사인 M. 파카르와 J.발마가 몽블랑 등정에 성공함으로써 알프스 등산의 막이 올랐다고 한다.

'알피니즘'의 기원은 이렇듯 현상금과 관련이 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순수한 목적으로'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사람은 없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정상에 선 산악인들은 깃발을 흔든다. 그 깃발은 국기이거나 혹은 자신을 후원해준 기업과 언론 매체의 깃발이다.

세계 최고봉에 에베레스트라는 이름을 붙이고 여기를 경쟁적으로 오르고자 했던 이들은 영국인들이었다. 에베레스트를 '정복'하고자 했던 그들의 의식은 다름 아닌 식민지를 개척하려고 하는 제국주의자의 모험심이며 도전의식일 것이다.

에베레스트의 원래 이름은 '초모룽마(Chomolungma)'이다.
초모룽마라는 말은 초모(Chomo)는 여신, 룽마(Lungma)는 산골짜기. 우리말로 하자면 '대지의 여신'이라고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노자가 <도덕경> 제6장에서 말한 "곡신불사, 시위현빈(谷神不死, 是謂玄牝 골짜기 신은 영원불멸하여, 이를 신령스러운 암컷이라 이르고) 현빈지문, 시위천지문(玄牝之門, 是謂天地根 신령스러운 암컷의 문을 하늘과 땅의 근원이라 이른다)"고 했을 때의 그 '곡신'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 듯싶다.

이런 뜻을 가진 초모룽마가 에베레스트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인도를 지배하던 영국이 히말라야를 측량하면서 세계 최고봉에 당시 식민지 인도의 측량 담당관이었던 조지 에베레스트(George Everest)의 이름을 붙이면서부터다.

사실 이것은 우리의 고유한 지리 개념인 '백두대간'에 일본인들이 태백산맥과 같은 '산맥'의 이름을 붙인 것과 마찬가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아직도 우리의 교과서에 실려 있는 여러 산맥이 우리가 우리 나름으로 우리의 국토를 바라보던 시각을 표현하던 <산경표>다운 이름을 되찾아야 하듯이 에베레스트는 대지의 여신 '초모룽마'라는 이름을 되찾아야 한다.

이것은 단지 이름을 되찾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름을 바꾸어 부른다는 것은 세계관의 변화를 의미한다. 그것은, 자연이 정복의 대상이라는 서구의 근대 합리주의적인 자연관, 기계적 자연관, 일직선의 자연관에서 자연이 우리들 삶의 근원을 이룬다는 자연관으로의 회복을 의미한다.
단지 산꼭대기에 한번 발을 디딘다고 해서 그것을 정복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은 자연을 정복할 수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인간은 자연 속의 인간이다.

자연 속의 인간은 산을 정복하지 않는다. 산에 들어간다. 산에 들어가 속세의 온갖 때를 벗고 산을 닮기 위해 마음을 닦는다. 등산이 아니라 입산(入山)이다. 하지만 산에 오르며 나는 본다. 펄럭이고 있는 플래카드, '입산금지'라고 씌어져 있는 플래카드를. 산사에 몸을 담고 있는 스님들조차도 등산은 할 수 있어도 입산은 안 된다. 등산과 입산의 뜻이 뒤집어져 있는 것이다.

올해는 국제연합(UN)이 정한 '세계 산의 해'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산 사람이다(We are all mountain people)", 이것이 '세계 산의 해'의 표어이기도 하다. 산이 높든 낮든, 우리는 모두 산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산 사람인 우리들이, 세계 최고봉을 에베레스트가 아니라 초모룽마로 바라보는 시각은 이 땅의 현실에서도 중요하다.
지금 서울 외곽순환도로를 뚫으면서 북한산 관통도로를 내려고 하고 있다. 직선적 자연관, 개발 우선의 자연관과 인간의 삶을 품고 있는 존재로서 자연을 대하는 자연관이 충돌하고 있다. 북한산을 지켜내려고 하는 시민단체의 시각은 바로 에베레스트를 초모룽마로 바라보는 시각인 것이다.
북한산은 서울 시민의 '초모룽마'이다.

내 마음속의 초모룽마여, 눈앞의 북한산이여,
부디 우리의 눈물을 거두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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