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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2월 22일 일요일

존 메이너드 케인스-경제학자, 철학자, 정치가

첫번째는 프레시안의 강양구 기자가 쓴 서평기사다. 스키델스키가 쓰고 고세훈이 옮긴 <존 메이너드 케인스>라는 책.

원문은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220174228&section=04

 

두번째는 한겨레신문의 한승동 선임기자가 쓴 서평기사다. 이 기사에는 번역자인 고세훈 교수의 인터뷰도 실려 있다.

원문은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34010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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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는 모두 케인스주의자다(Now, we are all keynesian!)." (리처드 닉슨)

1971년 당시 미국의 대통령 리처드 닉슨의 이 말은 케인스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예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닉슨이 이 말을 한 시점부터 케인스의 영향력은 줄어들기 시작했다. 특히 1980년대 초부터 약 20년간 케인스는 낡은 경제 정책을 비판하는 수식어로 쓰일 정도로 '죽은 개' 취급을 당했다.

이렇게 케인스가 세상으로부터 외면을 받기 시작할 때, 아이러니하게도 서른한 살의 역사학자 로버트 스키델스키가 이 경제학자의 삶을 정리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한 2년 정도면 이 작업을 마무리할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 이때 그는 짐작도 못했을 것이다. 이 작업이 2년을 예상했던 자신의 짐작과 달리 30년이나 걸리는 대장정이 되리라는 것을….

결국 스키델스키는 이 과업을 완수했다. 덕분에 우리는 "20세기 가장 위대한 경제학자"의 명성에 걸 맞는 "20세기 최고의 전기"를 읽을 수 있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전2권, 고세훈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는 바로 이 스키델스키의 역작을 약 4년에 걸쳐 1600쪽 분량으로 옮긴 책이다.

애초 스키델스키는 1983년부터 2000년까지 케인스의 전기 3권을 펴냈다. 그는 "세 권 분량을 읽을 엄두를 낼 수 없었던" 독자를 위해서 이 세 권 분량을 40% 가량 줄인 "하나의 일관된 통일성을 갖춘 별개의 새로 쓴" 케인스의 전기를 펴냈다. 이번에 국내에 소개된 책이 바로 이것이다.

케인스의 死後 경고 "이명박, 난 당신에게 반대요"

"케인스의 사상은, 세상이 그것을 필요로 하는 한, 살아 있을 것이다."

2003년 스키델스키는 이 책을 이런 문장으로 마무리했다. 이때만 하더라도 그는 불과 5년도 못 돼 케인스가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로 호출되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한국어판 서문'에서 밝혔듯이 이미 그 때부터 위기의 징후는 또렷했다. 그리고 그 징후야말로 케인스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였다.

"일본, 독일의 장기 침체, 1997~1998년의 금융 붕괴, 그리고 2001년의 월가 폭락은 무자비한 탈규제 전략이 안고 있던 문제를 드러냈다. 이런 현상을 '자본주의 일반적 위기'의 징후로 볼 수는 없지만, 그것은 많은 분야에서 자본주의가 잠재력을 밑도는 실적과 불안정을 드러내주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으며, 그런 문제야말로 케인스가 관심을 기울인 주제였다."

스키델스키는 "케인스가, 사후 63년 만에, 마침내 한국을 방문하게 된 것 같다"며 지금 이 시점에서 "케인스가 제시했던 세 가지 원리가 특히 부각된다"고 소개한다. 우선 케인스는 이른바 전 세계적 경제 통합에 "신중한 절제"가 필요함을 역설했다. 스키델스키는 이를 놓고 "한국의 조급한 세계화 추진에 대한 아주 적절한 경고"라고 강조한다.

둘째, 불확실성의 문제다. 케인스는 국민 경제는 물론이고 기업 경영을 놓고도 항상 이렇게 불확실성을 강조했다. "계산 가능한 확률을 만들어 낼 만한 과학적 근거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스키델스키는 "금융 불안정이 시장 안에 근본적으로 내재돼 있으며, 금융 혁신 기법 역시 새로운 규제 조치로 제어해야 한다는 경고"라고 설명했다.

셋째, 환율 문제다. 케인스는 국가 간 협의를 통해 조정할 수 있는 고정 환율을 선호했다. 또 앞에서 잠시 언급한 대로 그는 자유무역 맹신을 경계하며 자급자족 경제를 선호했다. 스키델스키는 이런 맥락을 염두에 두고 "아마 케인스가 살아 있었다면 저평가된 통화를 수단으로 수출 주도 성장을 촉진하려는 정책에 적대적이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케인스가 스키델스키의 입을 빌려 내놓은 세 가지 경고는 의미심장하다. 케인스가 살아 있었다면 이명박 대통령이 추진하려는 경제 정책의 핵심을 모두 다 부정했으리라. 어쩌면 케인스는 FTA, 금융화, 고환율 등을 외치는 이 대통령에게 이 위기를 계기로 수출보다는 내수에 기반을 둔 자급자족형 경제로의 체질 전환을 주문했을지 모른다.

케인스가 남긴 세 가지 교훈

이 책은 경제학자 케인스뿐만 아니라 철학자, 정치가로서의 그의 면모를 종합적으로 검토한다. 케인스의 삶을 통해서 얻어야 할 교훈은 무엇일까? 스키델스키의 안내를 받으면서 이 책을 읽다 보면 세 가지 교훈을 찾을 수 있다.
'불확실성을 기억하라', '선한 삶을 지향하라', '지금 여기서 행동하라.'

첫째, 불확실성을 기억하라. 이 책을 옮긴 고세훈이 잘 요약했듯이 케인스 경제학은 "화폐와 시간이 개입되는 한, 경제 주체로서 인간 행위는 무지와 불확실성을 피할 수 없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이런 불확실성을 염두에 두지 않는 경제학이 올바른 진단과 처방을 내릴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인식 때문에 케인스는 경제학에 과도한 수학 기법을 차용하는 데 적대적이었다. 그는 이 불확실한 세상에서 "명확하고 계산 가능한 미래"를 찾는 "수학 모델"을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계량경제학은) 마치 사과가 땅 위에 떨어지는 것이 (…) 사과 쪽의 계산 실수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같은 맥락에서 케인스는 정부 경제 정책 역시 늘 불확실성이 있음을 부인하지 않았다. 이런 불확실성을 염두에 두면 어느 시대, 어떤 국가에서도 적용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 경제 정책은 있을 수 없다. 1960~70년대 케인스를 추종했던 경제학자들이 실패했던 이유도 바로 이런 불확실성을 외면한 오만과 무관하지 않다. "인간의 오만의 결과는 바로 신의 복수이다."

둘째, 선한 삶을 지향하라. 케인스는 평생 '선한 삶'을 이루려는 목표를 포기하지 않았다. 케인스는 "수단보다 목적이 높이 평가되고, 유용성보다는 선이 선호되는" 그런 선한 삶이야말로 경제학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여겼다. 스키델스키는 "오늘날, 문화와 정신적 가치가 '돈에 대한 사랑'에 제물로 바쳐지는 무분별한 상업주의는, 그를 말할 수 없이 불편하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셋째, 지금 여기서 행동하라. 케인스는 이 선한 삶을 향한 도전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도전은 늘 '지금 여기'서 시작되었다. 그의 일차적 관심사는 자신이 발 딛고 선 땅의 삶을 개선하는 데 있었다. 스키델스키가 지적한 대로 "(케인스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실현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자신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을 언제라도 기꺼이 희생할 준비가 돼 있었다."

케인스를 넘어서라!

이런 세 가지 교훈을 염두에 두면 최근의 좌우를 막론한 케인스의 재조명은 나태하기 짝이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케인스가 20세기 초반 영국과 세계를 염두에 두고 내렸던 처방을 추종하는 게 아니다. 지금 여기의 맥락과 불확실성을 염두에 둔 치열한 고민, 궁극적으로 선한 삶을 지향할 해법, 이것이야말로 케인스가 지금 우리에게 주문하는 것이리라.

스키델스키는 책의 말미에서 케인스의 삶을 호머의 영웅 오디세우스에 빗댄다. "그는 사이렌의 아름다운 노래 소리를 들었지만 난파의 가능성을 경계했고, 그의 재능과 세계의 상황이 운명 지워 준 경로를 충실히 따라갔다. 능숙하게도 그는, 삶과 일에서 가능한 최상의 세계를 위해 분투했으며, 기적적으로 거기에 가깝게 다가갔다."

호머의 <오디세우스>가 단순한 영웅담이 아니듯이 20세기 오디세우스의 삶을 기록한 이 책 역시 단순한 찬양을 위한 영웅담이 아니다. 아직 이 책을 읽지 않은 경제학자는 케인스의 삶을 통해서 세상의 필요에 화답하는 '21세기의 경제학'을 내놓을 자극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일반 시민은 그런 경제학을 구별할 감식안을 갖는 즐거움을 맛볼 것이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케인스주의자가 되는 일이 아니다. 케인스를 넘어서는 일이다.

 

■ 케인스에 대해 궁금한 몇 가지 것들

1. 케인스는 국가의 경제정책을 통해 경제를 성공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흔히들 케인스가 정부의 재정 정책의 역할을 강조했다고 해서 그가 정부의 역할을 전지전능한 것으로 보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케인스가 시장 체제를 포함한 시민사회의 자율적 메커니즘 대신 권력과 명령의 경제학을 들여놓았다는 비난은 크게 과장된 것이다. 불확실성이 자유방임된 시장경제의 성과를 위축시킨다면, 그것은 정부 정책의 효과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는 개인과 국가 행위의 적정한 영역을 설정하는 문제는 추상적으로 결정될 수 없으며 각 시대에 맞는 선택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케인스 경제학에서 중요한 것은 국가 개입이 있어야 하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국가 개입이냐의 문제였다.

하지만 케인스의 제자들, 특히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정책 입안자들이 행동하기 시작했을 때, 실제로 그들은 경제에 대한 경제학자들의 권한이 사실상 무제한적이라는 신념에 차 있었다. 그들은 케인스의 도구는 상속받았지만, 그 도구의 범위와 효율성의 한계에 대한 그의 철학은 물려받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의 오만이 인과응보의 재앙을 만나는 것은 불가피했다.

2. 케인스는 경제학자가 경제의 작동을 정밀하게 과학적으로 수량적으로 관찰하고 예측 및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케인스는 계량경제학의 방정식들에 실수(實數)를 채워 넣는 일의 위험성에 대해 신랄한 경고를 남겼다. "그것은 마치 사과가 땅 위에 떨어지는 것이 사과의 동기, 땅에 떨어지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인지의 여부, 그리고 땅이 사과가 떨어지기를 원하는지의 여부, 자신이 지구의 중심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에 대한 사과 쪽의 계산 실수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스키델스키는 1936년 9월 옥스퍼드에서 열린 계량경제학대회를 기점으로 <일반이론>은 "명확하고 계산 가능한 미래"를 가정하는 "수학적 모델"로 환원되기 시작했고, 케인스 경제학이 고전주의의 주류적 인식과 방법론에 포획되는 현상이 비롯됐다고 암시한다. 방법(론)이 내용을 규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로 <일반이론>의 태동 과정에 누구보다도 깊이 개입했으며 케인스가 가장 총애했던 두 제자 리처드 칸과 조앤 로빈슨은 옥스퍼드 대회 이후 케인스 혁명의 발전 과정에서 사실상 배제되었다. 훗날 칸은 <일반이론>이 "도식과 하찮은 대수"로 환원된 것은 커다란 비극이라고 간주하기에 이르지만, 그 점에 대해 가장 통탄해 마지않았던 사람은 케인스 자신이었다.

3. 케인스는 좌파 경제학자다?

케인스는 마르크스가 죽던 해인 1883년에 태어났다. 사람들은 이를 통해 케인스와 마르크스를 상징적으로 연결시키곤 한다. 하지만 그는 마르크스주의에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다. 1930년대 케임브리지는 히틀러의 집권이 준 충격으로 마르크스주의자들로 들끓고 있었다. 마르크스주의는 "가장 총명하고 뛰어난 사람들"에 의해 전쟁·파시즘·실업의 치유책으로 환영받았다. 하지만 모든 도그마를 거부했던 블룸즈버리 구성원들과 마찬가지로 케인스 역시 마르크스주의를 거부했으며 그것이 자기 세대가 파멸시킨 기독교가 떠난 빈 공간에 침입해 들어온 영혼의 질병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에 감염된 젊은 세대에게 이렇게 반문하곤 했다. "모든 것 중에 최악이며, 늙은 리카도가 저지른, 그리고 내게 시간이 주어진다면 바로잡았을, 어리석은 오류 위에 세워진 것이지. 결국 더 이상 경제적 시련이 없을 것이라고? 그러면 그 다음에는?"

기본적으로 그는 자본주의 자체를 파괴하기보다는 수정하는 길을 택했다. 그는 타당성이 입증되지 못한 사회주의에 의존하지 않고도 자본주의의 병리현상을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러시아 혁명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그는 자유방임주의자들이나 사회주의자들 모두 자본주의와 자유시장 체제를 동일시하고 자본주의의 변화 가능성을 외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에게 혁명은 불황의 치유책이 아니라, 그것이 몰고 올, 피해야 하고 또 피할 수 있는, 가능한 결과일 뿐이었다.
그는 에드먼드 버크의 논거를 빌려 세 가지 구체적인 이유를 들며 혁명에 반대했다. 첫째, 기존의 질서는 개혁이 불가능할 정도로 불량한 것이 아니며, 둘째, 혁명이 가져다 줄 훗날의 체제가 현 체제보다 낫다는 확신이 없고, 셋째, 설사 새로운 체제가 전복된 그것에 비해 낫다는 것이 증명됐다 할지라도, 과연 그것이 혁명 과정에서 치르게 될 희생을 보상할 만한 것인지 누구도 확답을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분명 케인스는 급진주의자였지만, 결코 변혁을 추구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에게 자본주의는 폐절의 대상이 아니라 구원해야 할 대상이었다.

또한 그는 러시아 볼셰비즘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혹평했다: 러시아는 "행정적으로 무능하고 인생을 살 만하게 만드는 거의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한다는 점에서, 유례없는 최악의 사례를 보여 준다…." 그것은 "광적이고 불필요한 조급증을 지닌 악폐들의 가공할 만한 전형"이었다. "스탈린으로 하여금, 실험을 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공포의 화신이 되도록 하라."

그는 소련 경제학자들 앞에서 집단주의적 기조를 따라 개조된 자유주의만이 무정부주의적 자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적 공산주의 모두에 대한 진정한 대안이라는 내용의 연설문 "나는 자유주의자인가?"를 낭독하기도 했다.

하지만 케인스의 초기 히트작 <평화의 경제적 귀결>은 그를 "그가 결코 속한 적이 없던" 좌파의 영웅으로 만들어 놓은 상태였다. 그는 좌파와 우파를 '넘어선'('절충'이 아닌) 중도의 입장에서 노동당과 보수당 모두에게 말을 건넬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는 케인스 혁명을 일구어 내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한편으로 그는 노동당에게는 실행 가능한 통치 철학이 없다고 비판했지만 한때는 자유당의 진정한 회복과 노동당과의 연립정부를 염원했으며, 이런 연대를 위한 행동 강령을 마련하는 데 엄청난 지적 에너지를 쏟아붓기도 했다.

그는 좌파/우파로 정의하기보다는 현실주의자로 보는 편이 옳은 인물이었다.

4. 천재 경제학자 케인스는 주식 투자에 성공했을까?

블룸즈버리 친구들과 달리 케인스에게는 상속받은 자산이 없었으며, 교류 범위가 넓어진 생활 방식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했다. 케인스의 소득 가운데 3분의 1은 저술 활동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나, 그 외에 오스월드 포크와 주식 중계 회사를 차려 돈을 벌기도 했다. 또 그는 환투기를 하기도 했는데, 스키델스키는 "투기는 그의 경제학을 발전시켰고, 경제학은 그의 투기를 부추겼다"고 농담 반 진담 반 말한다. 사실 1930년대 그의 투자 철학은 경제 이론에 맞춰 변화했다. 그는 부란 쌓아 놓는 것이 아니라 문명화된 생활을 위해 소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를 그대로 실천했는데 환투기로 벌어들인 수익 일부를 그림 구입을 위해 따로 책정해 두기도 했다.

또 그 역시 투기 열풍에 가담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도 확실성에 도박을 건다고 느꼈다. 그는 따든 잃든 고수익이 걸린 도박에서 즐거움을 느꼈다. 한때 파산 지경에까지 이르렀는데, 이때 그가 진 부채는 2만 파운드에 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케임브리지 재무관으로서 그 재산을 열 배나 불려 주기도 했으며, 많은 유산을 남기는 등 결국은 성공한 투자가였다는 것이 중론이다.

5. 케인스는 동성애자였다?

케인스는 '활발한' 동성애자였다. 그가 속했던 블룸즈버리 그룹이 오히려 이성애를 기이한 것으로, 이성과의 결혼을 배반으로 간주할 정도였으니, 그의 동성애적 편력을 특별한 기행으로 볼 필요는 없다. 스키델스키는 이러한 동성애의 만연을 당시 많은 젊은 남성들이 여성이 배제된 환경에서 청년기와 성인기 대부분을 보낸 데서 찾고 있다. 어쨌거나 당시 케인스를 비롯한 케임브리지 남성들은 젊은 남성에 대한 사랑이 여성에 대한 사랑보다 윤리적으로 더 우월하다고 간주했다.

하지만 훗날 시장 자유주의자들은 그의 성적 취향을 그의 이론적 성취를 폄하하거나 그의 이론적 '탈선'을 조롱하는 기회로 삼기도 했다(슘페터는 케인스가 '단기'에 치중한 것은 자손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그래서 한때 케인스 경제학의 숭배자들은 일종의 방어 행위로 그의 사상을 삶에서 분리시키기도 했다.

물론 스키델스키는 이 책에서 그의 동성애 편력과 이후 리디아와의 결혼 생활을 균형감 있게 다루고 있다. 그는 케인스의 생애를 지배했던 두 연인인 덩컨과 리디아가 모두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이었다는 데서 공통점을 찾는다. 스키델스키는, 이들이 신선하고 의외의 생각을 가진 인물들이었으며 케인스가 찾던 대상은 자신보다 열등한 모델이 아니라, 자신의 지성을 보완하거나 균형을 잡아 줄 사람이었다고 말하면서 이를 인습을 벗어난 케인스의 사고와 상상력과 연결 짓고 있다. 스키델스키는 리디아와의 결혼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는 도박꾼이었고, 리디아는 그에게 가장 큰 도박이었다."

(출처 : <존 메이너드 케인스>, 제공 : 후마니타스)

/강양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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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메이너드 케인스- 경제학자, 철학자, 정치가〉
로버트 스키델스키 지음·고세훈 옮김/후마니타스·1권 3만5000원, 2권 3만원

경제학자 스키델스키 30년간 쓴 전기
“미·유럽도 케인스 제대로 취급안해
정부의 시장개입·보호주의 문제
한국경제에도 적용될 개혁주의 소개”

 

1970년대 초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이젠 우리 모두 케인스주의자”라고 했다. 하지만 달러 태환정지를 선언한 그의 시대 때 케인스가 쌓아올린 브레턴우즈 체제가 무너졌고 케인스는 급속히 잊혀졌다. 영국 경제평론가 윌 허튼은 심지어 “케인스 혁명은 결코 일어나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곳곳에서 케인스의 부활을 알리는 소리들이 요란하다. 케인스주의를 대체한 신자유주의가 미국발 금융공황과 함께 무너지고 있는 지금 다시 그 신자유주의를 케인스주의로 대체하겠다는 얘기인가?

» 케인스의 동성애 상대였던 미술학도 덩컨 그랜트가 그린 25살 때의 케인스(1908년). 후마니타스 제공

일반인들에겐 ‘뉴딜’정책과 함께 기억되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1883~1946). 하지만 사람들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경제학자라는 이 유명한 영국인이 정작 어떤 사람인지, 그의 경제학이론이 뭔지 잘 모른다. 미국 존스홉킨스대와 영국 워릭대에서 역사학과 정치경제학을 가르친 로버트 스키델스키는 영어권 사람들조차 그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드물다고 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량실업을 동반하는 경제불황을 정부가 나서서 예방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1천명 가운데 단 한 사람도 이러한 사상이 케인스한테서 나온 것임을 알지 못한다. 정부가 이런 문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관한 케인스의 생각을 그런대로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10만명 중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가 누구이고 어떤 시대를 살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 그가 만든 이론이 지금 이 시대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보여주는 케인스 전기가 번역 출간됐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맥밀런, 2003). 스키델스키가 썼다. 그가 맥밀런 출판사와 계약을 맺은 것은 케인스의 시대가 기울어가던 1970년 초. 1983년에야 제1권이 나왔고 제3권을 끝으로 3부작이 완성된 것은 2000년. 무려 30년이 걸린 노작이다. 공인이 기록을 남기지 않는 것은 범죄가 된다는 나라 영국에선 전기나 자서전·회고록·일기·편지의 출판이 산업화돼 있지만, 이 책은 그 양과 주제의 방대함, 지적 깊이에서 통상적인 전기류들과는 다르다. 번역된 것은 이 3부작 분량을 40%나 줄이고 고쳐 쓴 단행본. 그럼에도 1, 2권 합해 1600쪽이 넘는다. 케인스의 이론이나 삶의 편린들은 이따금 소개됐지만 이런 묵직한 케인스 종합판이 국내에 소개되기는 처음이다. 지은이는 “케인스가 사후 63년 만에 마침내 한국을 방문하게 됐다”고 했다.

 



» 케인스와 아내 리디아. 후마니타스 제공
가문 역사부터 케인스가 63살에 타계하기까지의 모든 과정, 그리고 동반자였던 러시아 발레리나 출신 리디아 로포코바의 그 뒤 말년까지 자세히 다뤘다. 영국에서 태동한 경제학, 케임브리지학파, 케인스 경제학의 역사와 그의 이론작업이 어떻게 공적 활동과 연결되는지가 유기적으로 기술돼 있고, 영국에서 가장 유력한 문화동인 모임 블룸즈버리 그룹을 중심으로 한 중상류계급의 생활, 제대로 밝혀진 적 없는 케인스의 동성애까지 다뤘다. 이는 지은이가 품었던, “사상가의 삶은 그의 사상과 도대체 어떤 연관이 있는가?”라는 의문에 맞닿아 있다. 번역자 고세훈 교수는 “빅토리아조의 번영이 어떻게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고, 이것이 다시 대공황, 파시즘, 스탈린 체제의 발흥과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반세기의 냉전으로 연결됐는지, 그리고 20세기 전반기 영국 지식·문화계가 어떠했는지 그 분방한 실상을 들여다볼 수 있다”고 했다. “경제학 비전공자들에게 경제학적 사유에 눈을 뜨게 할 만큼 충분히 경제학적이며, 경제학자들에겐 자신들의 학문적 지식·가정·방법론뿐만 아니라 나아가 인생관과 역사를 다시 한 번 깊이 성찰할 계기를 줄 정도로 충분히 교양적이다.”


» 케인스와 밥 브랜드 영국 재무부 대표(1946년). 후마니타스 제공

‘케임브리지 문명: 시즈윅과 마셜’ 편을 읽어가노라면 입시용 단답식의 지식조각으로만 남아 있는 요령부득의 직관주의와 공리주의가 어떤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며 어떤 맥락에서 등장한 이론체계인지가 비로소 자명해진다.

 

2차대전 때 영국 재무부에서 일했던 케인스는 경제계의 윈스턴 처칠이었다. 그는 독일이 1944년 말에 항복하고 일본이 1945년 말까지 버텨주기를 바랐다. 그래야 종전 뒤 미국 원조에 대한 의존도를 줄일 수 있는 조처를 취할 시간을 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빚더미 위에서는 영국이 대국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었다. 하지만 히틀러는 해를 넘기며 버텼다. 미국이 핵폭탄을 개발했다는 낌새도 채지 못했던 케인스는 “일본이 너무 일찍 항복해서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기를” 고대했다. 결국 희망은 깨졌고 그것은 영국이 굽실거리며 워싱턴을 찾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무렵 케인스는 채권을 소유한 불로소득 생활자를 고리대금업자나 샤일록과 다름없는 존재로 혐오했다. 그때 영국은 미국에 무이자 대출을 호소하고 있었다. 하지만 케인스 자신은 환투기와 증권거래로 재미를 보기도 했다. 상속받은 재산이 없었던 그는 수입의 상당부분을 글쓰기와 저술, 강의, 연설, 펠로십 등으로 충당했으나 환투기로 번 돈으로 쇠라와 시냑, 피카소, 마티스, 드랭, 르누아르, 세잔의 작품들을 샀다. 그의 블룸즈버리 친구들 중에는 이따금 그를 찾아와 점심이나 저녁을 들며 논쟁과 한담에 참여한 버지니아 울프도 있었다.

케인스는 1929년 대공황을 예측하지 못했다. 월가 주가폭락 직후의 사태 전개도 제대로 내다보지 못했다.

브레턴우즈 체제를 출범시키기 위해 미국과 밀고 당기는 장기간 협상을 벌이면서 누적된 피로가 그의 심장근육을 망가뜨렸고, 일요일 아침 침대에서 심장발작을 일으켜 몇 분 만에 운명했다. 그가 만든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은 지금도 남아 있지만 그가 주장했던 고정환율과 자본통제 체제는 1970년대에 해체됐다. 완전고용을 유지하고 불황을 피하기 위한 관리경제의 논리와 실천인 ‘케인스 혁명’은 그가 창안한 그대로 현실에서 수용됐던 적은 없다. 윌 허튼이 케인스 혁명은 일어난 적 없다고 한 것도 그 얘기다. 비록 우리는 ‘워싱턴 컨센서스’로 너무 성급하게 달려가버렸지만, 케인스 사상의 가치와 적실성을 둘러싼 논란은 여전히 진행중이며, 그 점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케인스의 그늘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불황기 케인스는 못가진 계층 재분배 중시”

■ 옮긴이와 함께 | 고세훈 교수

» 고세훈 교수

“한 천재의 이론적, 정책적 활동과 치열하고 엄정한 책무의식, 그리고 그것들을 둘러싼 온갖 논쟁과 사건들을 들여다 보면서 나 자신을 포함한 한국 지식사회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역겨움에 가까운)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정치경제학, 복지국가론 등을 가르치고 있는 고세훈(54) 고려대 공공행정학부 교수가 <존 메이너드 케인스>를 읽은 것은 2004년. 안식년을 맞아, 영국 노동당 정치에 관한 논문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모교 오하이오 주립대에 가 있을 때였다. 3부작 중 가장 많이 팔린 제3권은 미국은 물론이고 출판사(맥밀런)에 연락해도 구할 수 없어서 오스트레일리아에 주문해서 읽었다. 그 사이 다른 책 2권을 따로 냈지만, 그때부터 줄곧 번역일에 매달렸다. “단행본 번역에 걸린 시간을 생각하면, 애초 3부작을 번역해 보겠다고 나섰던 내 성급한 제안을 극구 말렸던 스키델스키가 새삼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읽으면서 “공적인 일에 대한 치열한 정신이 우리에겐 결여돼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그는 했다. “아마 케인스는 이른바 애국주의라는 것이 진지하고 또 숙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전형적인 학자일 것이다. 미안하지만, 우리를 추동하는 것은 엄숙한 공적 책무가 아니라 거의 언제나 사적 동기가 아닌가. 나아가 경제학자들이 방법론적 정밀성에 경도되거나 주류 경제학의 틀 속에서 사고하다 보니 거시적 차원에서 정부와 기업의 문제를 사유하려는 의지, 성향, 도구가 원천적으로 없는 실정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케인스를 하나의 국면전환용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되짚어 보려는 시도가 아닌가 한다. 예컨대 재분배 체계, 안전망 체계, 노동시장 문제, 기업지배구조 조정 등 제도적 인프라를 형성하기 위한 근본적 성찰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가능할까. 도무지 자신할 수 없다. 암담하다.”

맹목적 성장론자들이 그를 오용하고 있지는 않은지? “문제는 성장 자체가 아니라 성장을 추구하는 방식이다. 투자를 기업 쪽과 가진 자들에 혜택을 주는 방식(규제완화, 노동유연화, 감세 등)으로 추진할 것인가, 아니면 다양한 재분배 체제와 정부지출을 통해 못 가진 계층의 구매력을 끌어올리면서 추진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케인스는 오늘날과 같은 불황 때 전자의 방식을 택하면 유동성은 더욱 퇴장하여 투자와 고용, 성장은 어려워진다고 봤다. 토목건설 등을 배제할 순 없지만 그것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과연 구매력 확보를 우선순위에 둔 것인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 지금 정부의 정책 동기와 순수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 아닌가.”

비판은 혹독했다. “이명박 정권의 문제는 문제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점이다. 예컨대 신자유주의를 밀고 나간다 하더라도 그게 신자유주의를 역사적 맥락에서 상대화시킨 뒤에 신자유주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사고 외의 태도나 입장은 아예 처음부터 배제한 채, 즉 역사에서 탈각된 신자유주의를 무작정 받아들인 상태로 진행하고 있다. 사실 신자유주의조차 자유주의, 사민주의, 복지국가 등 방대한 역사적 경험의 축적 위에 조성된 이념적 태도이기 때문에 우리에겐 과분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적 실험이나 정책적 축적 없이 교조적으로 신자유주의를 밀고 나갈 때 한국은 훨씬 급박하고 심각한 위기 국면으로 빠져들 수도 있다. 내가 보기엔 현 정부의 정책결정자들은 ‘몽롱한 신자유주의자들’이다.” 한승동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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