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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13일 금요일

`미션 임파서블`?


  

 

"한국문학이 고정된 객관적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한국의 근현대문학도 확정적인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살아 움직이는 역사적 운동 양태이며, 문학 연구자들의 특정한 개념과 논리가 만들어내는 담론화 과정이다. " 유종호의 <변두리 양식의 주류화>라는 글 가운데 첫 대목이다.  이 완고한 문학에세이가 유종호 평론의 한 정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변두리가 중요하다. 변두리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럼 중심은 어디인가"를 물어야 한다. 중심이 있는가? 시의 중심은? 소설의 중심은? 지금 한국 문화예술의 중심은 있는가? 나는 이런 질문 앞에 멍하다.

 

'중심의 착각'이라는 것을 하나의 명제로 만들어보자. 세상이 미국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착각을 할 때에도 아프리카의 어린이는 성장하고, 세상이 유럽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역사학자들이 정리할 때에도 인디언들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아프라카나 인디언들의 저항은 사실상 역사상 '멸절'의 위협 앞에 굴복했다. 이 도저한 근대사, 자본주의 발전사는 그러하다.

 

조영일이라는 친구(?)의 글을 아직 세밀하게 읽은 적이 없지만, 그래서 뭐라 할 수 없지만, 제도 밖의 것조차 사실 제도화되어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제도 밖의 것이라는 착각 속의 것이 제도를 견고히 한다는 점에서 언제나 변두리는 쓸쓸하다, 그런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변두리여, 그냥 변두리로 남자. 주류화하려고 하지 말자. (이 멍청한 청유형!)

 

조영일의 한국문학 분류는 너무나 정치적이거나 너무나 문학사회학적이다. 그래서 비문학적이다. 도대체 이게 뭔가? 이 트라우마는.

 

나는 그게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싶지만, 문학 '판'-- 조영일은 '장'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에서 조영일은 살아남고 싶은 것이다. 내가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당신부터 당신이 말한 한국문학 분류 밖으로 빠져나오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문학적으로는 "죽으라"는 것이다. 그것이 문학의 변두리다. 그리고 그곳에서 문학이 생성된다. 김종철 녹색평론 편집인처럼. 며칠 전 신문서평 난에서 조영일의 비평집--그 제목이 '한국문학과 그 적들'이라는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제목이다--이 출간된 것을 알았는데, 이런 글은 그 비평집의 기본논지를 무화시키는 것은 아닐까?  '역사적 운동 양태'로서의 문학에 대한 실체에 핍진하지 못하다. 조영일! 한국문학은 닫혀 있지만, 문학은 열려 있다는 것을 잊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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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출처: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7753

 

[문화비평] 미션 임파서블  

조영일(문학평론가)

몇몇 글(특히 창비 비판과 관련된)을 발표하고 난 후, 나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조만간 창비에서 청탁이 올 것입니다. 문지나 문동은 그렇지 않지만, 창비는 자기를 비판하는 이들까지 포용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하니까요.” 맞는 말이다. 확실히 창비 만큼은 외부의 비판에 귀를 기울이는 편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점이 소위 비주류의 비평가들이 창비에 신뢰를 거두지 못하는(또는 창비에 미련을 갖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거꾸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만약 당신이 창비를 비판하고서도 창비로부터 청탁을 받았다면, 그것은 어쩌면 창비가 감당할 만한 비판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 비판이 그들이 크게 변하기 전에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면, 청탁은 아마 불가능했을 것이다.” 예컨대 ‘진보적 상업주의’라는 비판 정도는 창비가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비판한 이들이 창비의 청탁을 받아들이는 순간, 비판까지도 포용하는 제스처와 중화작용을 일으켜 상업주의라는 비판 자체가 저절로 소멸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조중동’이 양적으로 한국 언론을 장악하고 있다면, 한국 대중음악은 SM, YJP, YG가, 한국 문단문학은 창비, 문학과사회, 문학동네 등이 장악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한국 문학계와 한국 대중음악계는 많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상품의 생산관리시스템적인 면에서 점점 유사해져가고 있다. 문제는 한국 문단문학에 <한겨레>나 <경향신문>, <시사인>처럼 이념상 그리고 체질상 주류와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세력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실천문학>, <세계의문학>, <문학수첩>, <현대문학>, <문학사상> 그리고 최근에 창간된 <자음과모음> 등등의 면모를 일별해 보자. 그러면 우리는 그들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문학적 당파성)를 발견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곳의 필자들은 모두 창비, 문사, 문동과 공유(교환) 가능하다. 아니, 모두 창비, 문사, 문동에 글을 쓰고 싶어 한다.

다른 곳의 청탁은 이런저런 이유로 거절하더라도 이들의 청탁만큼은 모두들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이들의 청탁을 거부하는 일, 그것은 어쩌면 문필가들에게 영원히 ‘불가능한 일(Mission Impossible)’인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하는 한국문학이란 1) 문단문학(메인문학), 2) (문단문학에 의해 보통 무시되는) 비문단문학(즉 서브문학)은 물론, 3) 번역문학, 4) 에세이(인문학적 산문)까지를 포함한 것이다. 따라서 나의 관점에서 (문학)비평가는 이 모두를 포괄하면서 넓게 활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이제까지 한국의 비평가들은 1)로 제한된 영역에서 뒹굴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2), 3), 4)에 대해서 전혀 관심을 기울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었고, 그 조차도 항상 1)로 수렴됐다. 문학교육시스템의 발전과 더불어 문화의 상징권력이 1)에 집중됐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문단문학의 위기’란 그들의 눈에는 한국문학 전체의 위기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는 문단문학이 한국문학의 場에서 주도권을 잡은 것(즉 메인문학으로 등장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전후)로, 그들이 처음 출현할 당시는 그들 자신이야말로 서브문학이었다(당시 메인문학은 당연 漢文學이었다). 따라서 근대초기에 문단문학이란 엘리트 남성지식인이 일생을 걸만한 일이 결코 아니었다(즉 소설쟁이, 문학쟁이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자명한 사실 확인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특정 문학형태도 자신이 현재 차지하고 있는 위치의 지속성을 주장할 근거가 어디에도 없다는 것과 또 그것을 문학일반의 것으로 확대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근대문학의 종언’에 대해 문단비평가들은 ‘문단문학의 일반화’라는 연금술을 통해 획득한 ‘문학의 영속성’으로 대항하는데, 그것은 사실 자신들에게 날아오는 화살을 피하기 위해 잠시 가장무도회를 벌이는 것으로, 그들이 진정으로 옹호하고자 하는 것은 한국문학이라기보다는 한국문학에서 문단문학이 차지하고 있는 지위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가 무도회에 참석할지, 아니면 손 안의 초대장을 찢고 ‘미션 임파서블’을 수행할지는 ‘한국문학’에 대한 각자의 입장에 달려 있다.  


교수신문/  2009년 03월 02일 (월) 16:5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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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출처: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29684.html

 

 

“특정 문학지 소속 신씨 객관비평 불가능…칭찬평론 안주”

신형철씨(오른쪽)의 첫 평론집 <몰락의 에티카>가 불러일으킨 반향은 예상대로 뜨거웠다. 주요 일간지에 대서특필되고 방송 뉴스에까지 소개된 데 이어 평론집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인문 분야 베스트셀러 목록에도 올랐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칭찬 일색인 것은 아니다. 또래 평론가 조영일씨(왼쪽)가 압도적인 찬사에 맞서 외롭게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조씨는 자신이 운영하는 인터넷 포털 다음의 문학 카페 ‘비평고원’에 지난 16일 ‘비평의 에티카 Ⅱ: 2008년 한국문학 소묘’라는 글을 올려 신씨의 비평관을 정면으로 공격했다.

 

조씨는 <근대문학의 종언> <언어와 비극> <세계공화국으로>를 비롯한 가라타니 고진의 저작을 우리말로 옮겼으며 <가라타니 고진과 한국문학>이라는 비평집을 내기도 했다. 가라타니의 논의에 바탕해 당대 한국문학을 비판해 온 그가, 가라타니의 근대문학 종언론에 부정적인 신형철씨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긴 하다.

 

조씨는 한동안 일본 소설의 기세에 눌렸던 한국 소설이 최근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되찾고 신씨의 평론집이 화제를 낳는 등의 상황을 두고 ‘한국문학의 부활’ 운운하는 견해에 회의적이다. 그것이 도리어 ‘몰락의 징조는 아닐까’ 하는 게 그의 문제의식이다.

 

‘부활’을 말하는 이들은 “(황석영, 신경숙, 공지영 같은) 소수 작가의 (상업적) 성공을 한국문학의 르네상스로 착각하는” 것일 뿐이며, 오히려 “올해 한국문학계는 사실상 ‘문학의 몰락’을 실감할 수 있는 해였다”고 그는 주장한다.

 

조씨는 특히 신형철씨로 대표되는 문단 주류 평론가들의 비평관을 문제삼는다. “(신형철씨를 비롯한) 문단비평가들의 뇌수 깊숙이 존재하는 ‘비판은 칭찬보다 생산적이지 못하다’는 이념”은 “문학 생산의 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입장에서 나온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는 게 조씨의 생각이다. “‘비평가가 자기가 관계하는 문예지나 그 문예지를 내는 출판사에서 나온 작품집을 냉정히 비판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딜레마를 ‘비판보다 칭찬이 생산적이다’라는 절대명제(당위)로 돌파한 후, 그것을 ‘생활이념’(예를 들어, 아이들에게는 꾸지람보다 칭찬을!)으로 탈색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계간 <문학동네> 편집위원인 신형철씨가 그 잡지를 내는 출판사 문학동네에서 나온 작품에 대해 객관적인 비판을 하기 어렵기 때문에 ‘비판보다는 칭찬을’이라는 구호 뒤로 숨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는 물론 신씨만이 아니라 주요 계간지 편집위원을 맡고 있는 비평가들에게 두루 해당하는 지적이다.

 

이와 관련해 조씨는 최근 한국 소설 가운데 문학적 평가와 상업적 성공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거머쥐었다는 황석영씨의 <개밥바라기별>과 신경숙씨의 <엄마를 부탁해>를 비판한 별도의 글들 역시 자신의 카페에 올려놓았다.

 

그는 우선 두 소설이 나란히 타블로와 이적이라는 유명 대중가수의 추천사를 받았다는 사실은 작가들이 “시장의 평가를 강하게 의식했다”는 증거라고 본다. 그의 판단에 <개밥바라기별>은 ‘낭만적 자기동일시’에 근거한 “성장소설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퇴행소설(노년소설)”이며, <엄마를 부탁해>는 “잘 씌어진 통속소설”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 두 소설을 주된 근거로 한국문학의 부활을 말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조씨는 가라타니 고진의 말을 받아 “무언가 새로운 것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제대로(확실히) 몰락할 필요가 있다”며 현재 한국문학의 몰락을 통한 재탄생을 주장하기도 했다. “평가에 있어 다름을 서로 토론(대화, 논쟁)을 통해 풀어가야” 한다는 조씨의 문제 제기에 신형철씨를 비롯한 주류 비평가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주목된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기사등록 : 2008-12-25 오후 06:5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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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09. 03. 11) 한국문학을 위한 젊은 평론가들의 고언

 

왕성한 비평활동을 펼치는 두 소장 평론가가 나란히 신작 비평집을 냈다. 조영일(36) 씨는 지난해 펴낸 첫 비평집 '가라타니 고진과 한국문학'에 이어 '한국문학비판 3부작'의 2부로 '한국문학과 그 적들'(도서출판b 펴냄)을 출간했고 고명철(39) 씨는 3년 만에 신작 비평집 '뼈꽃이 피다'(케포이북스 펴냄)를 묶어냈다. 두 평론가 모두 소위 '주류' 평단에서는 다소 비켜서 있긴 하지만 둘의 시각에는 자못 큰 차이가 있다. 다만 조씨와 고씨 모두 한국문학의 발전적인 미래를 위해 쓴소리를 아끼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통한다.

조씨의 책에는 2006-2008년 각종 문예지에 발표한 글과 지난해 그가 운영하는 인터넷 비평공간 '비평고원'에 올린 글들이 담겼다. 그는 일부에서 제기된 '장편소설 대망론'이 하나같이 '공적 지원금' 확대 논리로 귀결되며 '국가는 시장으로부터 문학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는 담론을 공공연하게 펴는 것과 관련해 "보호해야 하는 것은 문학이 아니라 문학정신"이라며 "그와 같은 정신을 훼손하면서까지 문학을 보호하고자 한다면, 차라리 문학을 하다 죽어버리라"고 말한다.


'한국문학의 르네상스'라는 말이 들렸던 지난해 문단의 화제작이나 문제작들도 냉철하게 살펴본다. 지난해 가장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은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에 대해서는 "잘 쓰인 소설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통속소설로만 그러하다"고 말했으며 황석영의 '개밥바라기별'의 경우 "노년에 수반되는 '회고'의 성격을 띠고 있어 최소한의 거리두기에도 실패하고 있다"고 말한다. "모두가 칭찬해마지 않는 작가"인 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부터 서점가에 돌풍을 일으킨 타블로의 '당신의 조각들', 표절 논쟁으로 회자됐던 주이란의 '혀'에까지 거침없이 분석의 메스를 댄다.

전작에서 백낙청에 대한 매서운 비판을 시도한 데 이어 김우창, 도정일의 비평관에도 비판적으로 접근했다.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조씨는 서문에서 "나는 한국문학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끝났다고 보는 것은 '한국의 문단문학'이다. 그리고 나는 그 바닥을 가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현재 계간 '실천문학'의 편집위원을 맡고 있는 고씨는 '뼈꽃이 피다'에서 "한국문학 안팎에서 불어닥치는 거친 바람에 한데 어울려 피는 강한 생명의 '뼈꽃'을 피워내자"고 말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최근의 '탈주체적 성향의 비평'이 갖는 한계를 지적하는 한편 분단체제를 넘어서는 문학의 움직임 등에 대해 살펴본다. 지난해 출간된 김연수, 손홍규, 김중혁, 공선옥, 박상륭 등의 작품을 비롯해 김훈, 김별아, 전경린의 역사소설, 황석영의 20세기 3부작 등도 꼼꼼히 읽었다.  

고씨는 "한국문학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다종다양한 '상상'이 아니라 우리들 삶의 저 깊숙한 곳에 어떤 파문을 일으키는 '상상력'"이라며 "지금까지 낯익은 삶에 조종을 울림으로써 어떤 신생의 가치를 욕망하도록 미적 전율을 일으키는 그런 '상상력'을 꽃 피워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두 평론가 모두 얼마 전 첫 비평집 '몰락의 에티카'를 출간해 문단 안팎의 주목을 한몸에 받은 젊은 평론가 신형철 씨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시도했다는 점도 눈에 띈다. 조씨는 "좋아하는 텍스트를 칭찬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라는데 만만한 텍스트를 두들겨 패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는 신씨의 말을 인용한 후 "거의 대부분의 문단비평가들이 갖고 있을" 이 '입장'은 "그저 문학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입장에서 나온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즉 "'비평가가 자기가 관계하는 문예지나 그 문예지를 내는 출판사에서 나온 작품집을 냉정히 비판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딜레마를 '비판보다 칭찬이 생산적이다'라는 절대명제로 돌파한 후, 그것을 '생활이념'으로 탈색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고씨는 복도훈, 허윤진, 신형철 씨의 비평을 비판적으로 접근한 글에서 "신형철의 비평 곳곳에서 '뉴웨이브'의 시들에 대한 텍스트의 미학에 대한 세밀한 점검은 이루어지고 있되, 그 시들의 제도적 권력 양상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고찰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고미혜기자)

09. 0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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