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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14일 토요일

서평의 제목 달기

이런 서평은 그 자체로 공부거리다. 장정일의 내공이 온전하게 묻어나는 듯하다.

 

특히 "그래서 <비포 아담>과 <버닝 데이라이트>를 젖혀두고 그것부터 손에 잡았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새로운 산책로보다 한번 걸어 봤던 길을 더 선호하는 법이다. 그러면서 어제는 미처 보지 못했던 구석구석과 먼 산을 다시 보는 것이다. 과연 20여 년 만에 다시 읽은 <강철군화>는 어땠을까?"라고 묻는 대목이나, 과두지배 체제의 본질을 꼬집어 언급하는 대목. 그리고 '진지한 작가생활'을 언급하는 대목 등등은 읽기와 쓰기가 어떻게 연관을 맺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과두지배 체제의 본질을 꼬집어 언급하는 대목은 다음과 같다.

 

제2롯데 월드와 삼성 에버랜드는 이들이 어떻게 국가와 정부를 '서비스 기관'으로 만들고 '로펌'으로 만들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리고 공권력을 일개 '용역 회사'로 만드는 문제는 이렇다. 용산 참사의 경우, 지금은 경찰이 용역회사의 직원을 불러 물대포를 잠시 잡고 있으라고 했을 뿐이라고 말하지만(기껏 그게 문제 되지만), 조금 있으면 일개 '용역 회사'의 말단 계장님이 용산경찰서 서장을 불러 '너 물대포 잡아!'라고 시키게 된다. 이게 과두계급의 지배다.

 

그런데 이 서평이 실은 프레시안의 제목달기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100년 전 한 소설가의 경고…'결국 전쟁인가?' "라는 제목은 너무 선정적이다.

 

어떤 제목을 달아야 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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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출처: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313132040&section=04

 

▲ 잭 런던(Jack London·1876~1916). <강철군화>를 비롯한 그의 소설이 약 20년 만에 새번역으로 재간되었다. ⓒ궁리
궁리에서 기획한 '잭 런던 걸작선' 가운데 1차분 세 권을 읽었다. 연번대로 나열하면 <비포 아담>(1907)·<버닝 데이라이트>(1910)·<강철군화>(1908)인데, 괄호 속은 작가가 작품을 발표했던 연도다.

책을 좀 읽은 내 또래의 독자들은 1989년도에 한울에서 출간된 <강철군화>의 강렬함을 아직도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때 같은 출판사는 의욕적으로 <마틴 에덴>·<잭 런던 모험소설>을 연이어 펴냈고, 마지막엔 <잭 런던의 조선사람 엿보기-1904년 러일전쟁 종군기>까지 내놨다. 여담이지만, 잭 런던에 혹해 그 책을 번역한 역자는 "순식간에 읽고 난 후 남은 것은 허전함이었다. 아니 배반감이란 표현이 더 솔직한 감정일 것이다"라는 실망감을 역자 서문에 솔직히 적어 놓았다.

실제로 그 여행기는 잭 런던의 우생학적인 백인 우월주의가 고약하게 드러나 있으며, 제국주의 일본·러시아·중국에 끼어 신음하는 조선의 운명에 대한 고려가 전무하다. 행여 이 책을 찾아 읽으실 독자는, 조현범의 <문명과 야만-타자의 시선으로 본 19세기 조선』(책세상 펴냄)을 함께 읽으시라. 알고 보면 잭 런던의 기분 나쁜 '조선 관찰기'는 그만의 것이 아니라, 19세기 서양 지식인이 아시아를 바라보는 보편적인 한계였다.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에 반짝 소개된 잭 런던은 오랫동안 새로운 번역이 나오지 않다가, 몇 년 전에 잭 런던의 미완성 유고인 <암살주식회사>(문학동네 펴냄)가 출간되었다. 여담을 더 하자면, 이 소설이 쓰인 계기가 재미있다. 당대의 최고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그는 엄청나게 씀씀이가 늘어났던 반면, 스물네 살 때 첫 단편집을 낸 이래로 쉬지 않고 작품을 쓰다 보니 상상력과 소재가 고갈됐다. 그래서 돈을 주고 이야깃거리를 샀는데, 34세의 베스트셀러 작가에게 소재를 판 사람은 25세의 무명작가 싱클레어 루이스였다.

<암살주식회사>는 1910년 3월에 잭 런던이 싱클레어 루이스에게 70달러를 주고 샀던 열네 편의 짧은 소설 개요 가운데 하나다. 그는 개요를 받자마자 반 넘어 썼던 이 소설을 중도에 포기했는데, 사후 40여 년이 훨씬 지난 1963년에 추리소설 작가 로버트 L 피시가 결말을 완성하여 출간했다. 이 소설은 잭 런던의 화제작 <강철군화> 이후, 작가의 변화를 살필 수 있는 결정적인 자료다. 참고로 싱클레어 루이스는 훗날 미국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된다.

▲ <강철군화>(잭 런던 지음, 곽영미 옮김, 궁리 펴냄). ⓒ프레시안
다시 '잭 런던 걸작선'이다. 나는 세 권의 책을 받고나서, 국내 초역된 두 권의 책이 궁금하기보다, 재간된 <강철군화>가 더 반가웠다. 그래서 <비포 아담>과 <버닝 데이라이트>를 젖혀두고 그것부터 손에 잡았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새로운 산책로보다 한번 걸어 봤던 길을 더 선호하는 법이다. 그러면서 어제는 미처 보지 못했던 구석구석과 먼 산을 다시 보는 것이다. 과연 20여 년 만에 다시 읽은 <강철군화>는 어땠을까?

<강철군화>가 처음 번역되었던 1989년 7월, 이 소설은 일개 문학 작품이 얻기 어려운 '소설 자본론'이란 명망을 얻었다. 그 만큼 이 소설은 소설의 줄거리보다, 소설 속의 정치·경제적 분석이 더 많은 주목을 받았다는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소설 자본론'에 대한 뜨거운 관심과는 반대로 흘러갔다. 번역서가 나오고 난지 불과 몇 달 뒤인 11월, 베를린 장벽이 철거되고, 몇 년 뒤인 1991년 8월 소련이 해체됐다. 그러면서 <강철군화>는 시나브로 절판의 수순을 밟게 되고, 우리의 기억 속에서 망각됐다.

이 소설은 공상적 사회주의가 완성된 2632년, 우연히 발견된 미국 혁명 투사들의 기록을 발굴하게 된 형식을 취한다. 부연하면 이 소설의 시간적 무대는 사회주의 혁명 투사들이 미국의 과두지배 계급에 대항해서 일으켰던 1차 봉기가 실패하고, 새로 준비된 2차 봉기를 목전에 둔 1912년과 1932년 사이다. 소설 속의 과두계급은 의회·법원·군대는 물론이고 언론·학교·교회까지 물샐 틈 없이 장악하고 있는 독점 자본가들이다. 향후 300년간 지속될 작중의 과두계급 체제 아래서 노동자들은 절대적 빈곤·실업·산업 재해에 무방비인 채 노예로 살아가며, 언론인·지식인·종교인들은 끽 소리 없이 과두계급에 기생한다.

대부분의 미국 역사서를 펼치면 <강철군화>가 재현하고 있는 묵시록적인 풍경이 작가의 공상이 아니라, 잭 런던이 생존했던 시대(1876~1916)의 가감 없는 반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작가가 살았던 시대는 미국 사회가 계급사회로 분화하면서 최초의 양극화를 맞이하는 시기였으며, 독점이 가속화되던 때였다. 중산층은 나날이 몰락하고 노동자들은 빈곤에 허덕였다. 당연히 노동운동이 불타올랐으나, 독점재벌의 사주를 받은 파업 파괴자들의 총격에 쓰러져 갔고, 경찰과 언론이 그런 불법을 비호했다.

<강철군화>는 앨런 브링클리가 쓴 방대한 저서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휴머니스트 펴냄)에 쓰인 것처럼 "미국 역사에서 1900년에서 1914년 사이의 시기보다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급진적 비판이 많은 지지를 받은 때는 없었다"(2권, 501쪽)던 그 시절에 나왔다. 하므로 이 소설은 열아홉 살 때 사회당과 처음 접촉하고 스물다섯 살 때 사회당 후보로 오클랜드 시장에 출마하기도 했던 사회주의자로서의 작가의 이력, 1860년대 초부터 번성한 폭로작가들(muckrakers)의 전통, 그리고 1900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고작 10만 명도 되지 않던 사회당 지지자들이 1912년에는 100만으로 늘어났던 그 시대의 혁신주의 정신이 낳은 혼합물이다.

하지만 이 책을 다시 읽으며 깜짝 놀라게 되는 것은, 잭 런던의 사회주의적 지식과 사태 분석이 이루어낸 예언의 정확성이다. 그는 국내의 독점과 시장을 찾지 못한 잉여생산이 한 나라의 파시즘을 추동하게 되며, 출구를 찾지 못한 파시즘 세력들 사이에 전쟁이 벌어진다고 분석하면서, 미구에 있을 제1차 세계 대전을 미리 예언했다. 길지만 인용한다.

"(미국의) 과두지배체제는 독일과의 전쟁을 원했다. 그들이 전쟁을 원하는 이유는 열두 가지쯤 되었다. 그러한 전쟁으로 발생하는 사건들을 조작하는 과정에서, 국제적인 카드를 다시 섞어 새로운 조약과 동맹을 맺는 과정에서, 과두지배체제는 얻을 게 많았다. 더 나아가, 전쟁은 국가의 많은 잉여를 없애주고, 모든 나라를 위협하는 실직자 군단을 줄이고, 과두지배체제에게는 그들의 계획을 완성하여 수행할 수 있는 숨 쉴 여유를 줄 것이다. 그런 전쟁은 사실상 과두지배체제가 세계시장을 장악하게 해줄 것이다. 또한 전쟁은 해산할 필요가 없는 대규모 상비군을 창출한 것이며, 대중의 머릿속에 '사회주의 대 과두지배체제' 대신 '미국 대 독일'이라는 쟁점을 심어줄 것이다."

잭 런던은 1907년에 쓰고 1908년에 발표한 <강철군화>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1912년 12월 4일에 미국 공사(公使)가 독일 수도를 철수했다. 그날 밤 독일 함대는 호놀룰루를 급습해 미국 순양함 세 척과 밀수 감시선 한 척을 침몰시키고 도시를 폭격했다. 다음 날, 독일과 미합중국 둘 다 전쟁을 선포"했다고 건조하게 써놓았다. 2년 뒤에 벌어진 제1차 세계대전을 거의 적중시킨 것이다.

이 무슨 역사의 장난이란 말인가? 20년 만에 새 번역으로 재독한 <강철군화>는 과두지배와 파시즘에 대한 20세기 초의 공포를 비웃게 하는 게 아니라, 훨씬 더 현실적으로 느끼게 해준다. 이 책을 읽으며 또 다른 세계 대전을 점치는 것은 무리이겠지만, 석유와 군산업체의 이익에 휘둘린 미국 정부의 대 이라크 전쟁을 보건대, 독점과 시장을 찾지 못한 잉여생산이 국지적인 저강도 전쟁을 잦게 하리란 우려는 할 수 있다.

<강철군화>에 자세히 설명되었듯이 과두계급이란 한 나라의 부를 몽땅 차지한 한줌의 독점재벌과 그들의 정권을 가리킨다. 이들은 국가의 행정기관을 자신의 업무를 효율적으로 처리해 주는 무료 '서비스 기관'으로 축소시키고, 국가의 사법기관을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고 불법을 무마해주는 '로펌'으로 전락시키며, 국가의 공권력은 '용역(깡패)회사'로 만든다.

제2롯데 월드와 삼성 에버랜드는 이들이 어떻게 국가와 정부를 '서비스 기관'으로 만들고 '로펌'으로 만들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리고 공권력을 일개 '용역 회사'로 만드는 문제는 이렇다. 용산 참사의 경우, 지금은 경찰이 용역회사의 직원을 불러 물대포를 잠시 잡고 있으라고 했을 뿐이라고 말하지만(기껏 그게 문제 되지만), 조금 있으면 일개 '용역 회사'의 말단 계장님이 용산경찰서 서장을 불러 '너 물대포 잡아!'라고 시키게 된다. 이게 과두계급의 지배다.

오치 미치오의 <와스프(WASP)-미국의 엘리트는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살림 펴냄)를 보면, 헤밍웨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잭 런던의 소설이 교과서에 실린 것을 알게 된 그의 어머니가 학교 이사회에 나가 "이런 책을 읽히는 것은 올바른 기독교도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항의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전후 맥락이 모자라긴 하지만, <비포 아담>을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강철군화>가 '소설 자본론'이라면 이 소설은 '소설 진화론'이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잭 런던은 자서전적인 소설 <마틴 에덴>이 출간된 1909년 이후, 진지한 작가 생활을 포기했다고 본다. 무명의 작가에게 작품의 소재를 양도받은 행각이 그런 심증을 갖게 하는데다가, 쓰다가 말았던 <암살주식회사>가 암살단을 만들어 비윤리적인 사업가를 한 명씩 제거한다는 '윤리적 광인'들의 순진 소박한 문제 해결에 안주하고 있지 않은가? 한때 레닌과 트로츠키를 애독자로 거느리기도 했던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문학적 후퇴다.

▲ <버닝 데이라이트>(잭 런던 지음, 정주연 옮김, 궁리 펴냄)
<마틴 에덴> 이후로도 잭 런던은 많은 작품을 썼지만, 타작에 불과하다는 게 중평이다. 하지만 전작에 이어지는 또 한 편의 자서전적 소설 <버닝 데이라이트>는 누구나 흉내 내고 싶은 태양 같은 남자 주인공이 나온다. 남자라면 자신의 힘으로 도시를 건설해 봐야 한다! 그런데 버닝 데이라이트는 무려 두 개의 도시를 세우고, 마지막엔 사랑하는 사람과 자신만을 위한 아르카디아를 만들어, 거기에 은거한다.

미혼모의 사생아로 태어나 스토우 부인과 마크 트웨인을 잇는 미국 최대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잭 런던은 '미국의 꿈'을 실현한 행운아이면서, 자신의 꿈을 스스로 거스르는 '빨갱이'가 됐다. 성공한 부르주아이면서 프롤레타리아의 이상을 추구했던 그는 입방아를 찧기 좋은 먹이였다. 내가 본 미국 문학사는 잭 런던을 거의 난외로 처리하거나, 소략하게 다룬다. 그러면서 예의 '자기모순에 빠진 작가'라느니 '알코올 중독자'면서 '무절제한 쾌락주의자이자 나르시스트'였다는 인물평을 앞세운다.

이런 꼬투리는 미국의 역사 속에서 마르크시즘의 영향력과 프롤레타리아 작가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원천 소거하기 위한, 강단 연구가들의 정직하지 못한 술책이다. 대체 자기모순이라곤 없으며, 술독 근처에도 가보지 않은데다가, 무절제한 쾌락주의자이자 나르시스트가 아니었던 작가가 어느 세상에 존재하는가? 주류 미국 문학사가 떠받들고 있는 헨리 제임스·헤밍웨이·피츠제럴드·포크너도 알고 보면 더했다.

작가에 대한 풍문을 제거하고 나면, 훨씬 윤택해지는 텍스트가 잭 런던이다. 특히 그가 살았던 시기가 자국의 양극화와 20세기 최초의 세계화로 몸살을 전운(戰雲)을 앓던 시대였던 만큼, 그것과 똑같은 국내 문제와 21세기의 세계화를 온 몸으로 맞고 있는 우리들에겐 더욱 각별한 텍스트가 되어 줄 것이다.

/장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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