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2009년 11월 9일 월요일

김정환과 5.16-쉼표와 등호

아침 출근 길에 김정환 시인의 <이 세상의 모든 시인과 화가>(삼인, 2009.8.31 초판)을 읽는다. 재미있다. 술술 넘어간다. 아니 김정환 시인의 표현 식으로 말하면, "술술 넘어간다, 가 아니라, 넘어가다, 걸리고, 걸려서 쉼표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쉼표는 사고의 호흡은 쉬게 하지만, 사고는 쉬지 않고 진행된다. 쉼표 속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빠져나오지 못하면, 책을 더 이상 읽을 수 없다. 쉼표는 생각과 회억과 반추의 늪이다."

 

김정환 시인의 문장 곳곳에 박혀 있는 쉼표들이 독자의 호흡을 잠시 차단하는 듯하다가 다시 사고의 회전을 통해 추스려지는 것을 음미한다. 거기, 바로 그 쉼표 속에서 내가 읽게 되는 것은, 쉽게 말들을 말로만 규정할 수 없는, 복잡한 회로를 가진 시인의 언어가 회오리치는 모습이다.

 

사회과학 서적들에서나 나와야 할 단어들이 불쑥불쑥 미학적 용어들과 뒤섞이며,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려고 애쓰는 것만 같던 김정환 시인의 문장들이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가를 이제서야 보여주는 것만 같다. 육체 때문이다. 육체적일 수밖에 없는 언어 때문이다. 황석영에 대한 글의 한 대목에서 김정환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좌우를 아우른다, 는 것은, 아무리 잘해도 정치적이다. 정치는 현실이기에 그렇다. 문학은, 비현실적이라서가 아니라 현실의 극복을 꿈꾸므로, 그런 얼개 혹은 범주에 원래 낯설다.(127쪽)

 

독자는 정치는 현실이라면 문학은 비현실적이겠지 하다가, "문학은, 비현실적이라서가 아니라 현실의 극복을 꿈꾸므로"라는 구절의 그 쉼표 때문에 사고의 회전을 겪을 수밖에 없다. 문장도 이런 문장은 오로지 쉼표 때문에 가능한 문장이다. "좌우를 아우른다, 는 것은, 아무리 잘해도 정치적이다."

 

아무튼 이런 쉼표들 속에서 5.16을 반추하는 대목을 만난다.

 

내 아버지는 육군본부 헌병감실 주임상사까지 올라간 경력의 직업군인 출신이다. 그리고 제대 후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외제 깡통(통조림) 장사로 꽤 재산을 모으다가 이승만의 '국산품 애용' 정책에 된서리를 맞았다. 5.16은 가족이 다시 먹고살게 된 계기로 작용했다. 아버지는 청와대 경호실에 들어가 경호실장 바로 아래 자리까지 올라갔다가 '아 새끼들 노는 거 눈꼴시어서' 때려치우고 사업에 나섰지만 옛날만 못했다. 아니 '주임상사' 시절이 제일 화려했을 게다.(35쪽)

 

또 하나 눈에 들어오는 것을 정말 문장으로는 말할 수 없는 '등호'다. 이것도 오로지 수식의 것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인성의 알몸'을 이야기하는 대목이다.

 

옷 입어도 알몸인 얼굴은 피골상접을 묘한 해골의 미학으로 전화하고 그것에 약간의 각선미를, 흑백 대비 선명하게 주면서 다시, 애매한 문학의 권위를 참칭, 미학이므로, 기묘하나마 어쨌듯 아름다움이라고 우기는 형용이다. 옷 벗어 알몸인 몸통과 팔다리는? 미이라의 미학이었다. 그런데 일순, 그의 몸이 대리석처럼 차갑게 빛나는, 광경이 내 눈을 스치고 지나갔다. 뭐지? 아아, 그의 소설의, 문체? 이 자리에서 그의 소설을 논할 수는 없다. 설령 있단들, 나는 그의 소설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소설을 다 이해한다는 발상은, 이인성 같은 소설가에게는 특히, 모종의 모멸이다. 그러나 이따금씩 나를 놀래키고 겁먹게 하고, 늘 주눅 들게 만드는 그의 소설의, 시보다 더 팽팽한 문제,의 '차가움=빛남'의 '몸=대리석!' 그가 시를 좋아하고 분석하고 소설에 인용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소설이 시를 지향한다고 말하는 것은 또한 모멸이다. 그는 시보다 더 팽팽하게 긴장한 문법과 문체로 세상보다 넓고 심오한 소설 '세계'를 구축한다. 그런 의미의 시와 소설 사이에서 그의 '차가운=빛나는' '대리석=몸'은 문체로 깎이고 또 깎인다. 그래서 그는 내게 좌파다.(70-71쪽)

등호는 사실상 부등호이기도 하다.

 

이 책의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등호의 좌변과 우변은 사실상 등호를 사이에 두고 만나기 어려운 말들이다(어렵지만 만나야 하는 말들이다), 하지만 등호로 엮여 있기 때문에 의미를 만들어내다가, 의미와 무의미의 사이를 가로지른다.

 

예를 들어 "사랑=죽음"(14쪽) "조형=영원=내용"(23쪽) "동심=죽음'(56쪽) "대리석=몸"(71쪽) "소설=식빵 굽는 시간"(75쪽) "시력=나의 생애"(106쪽) "가벼움=단순함'(186쪽) "삶=절망"(208쪽) "내용=형식"(228쪽) "뒤늦음=미학"(296쪽) "공간=풍경=생애"(297쪽) "몸=예술"(320쪽) "노래=이야기"(348쪽) "에로틱=장면"(351쪽) "마음=고향"(353쪽) 기타 등등. 그의 글(쓰기)가 그러하다. 그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떤 흐름을 붙잡는다.

예술 장르는 이 세상 모든 삶의 액정화이고, 그 액정화 속에 둘은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지만 양극단, 혹시 그 너머에까지 달하는지 모른다. 그 둘 사이를 춤이 춤답게 음악이 음악답게 소설이 소설답게 결국 흐른다. 그것은 안다면 우리는 모두 예술가다. 그 속에 자리 잡힌다면 우리는 모두 예술가다.(20쪽)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