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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7일 토요일

박정희와 5.16과 노무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못 다 쓴 회고록'이라는 <성공과 좌절>(2009.9.22 초판, 학고재)에 나오는 이야기다. 자신의 성장기를 반추하는 가운데 4.19와 5.16에 대해 이야기하는 '4.19와 5.16의 기억'이라는 꼭지(120-126쪽)의 한 부분이다.

 

5.16 하면 가장 크게 남아 있는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 마을과 이웃마을에는 6.25 당시 보도연맹 사건으로 죽은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4.19 이후 마을 사람들이 집단으로 학살당한 이들이 묻힌 곳에서 시신을 다시 거두었습니다. 우리 마을에도 그 살마들의 가족들이 있었는데, 다녀와서 하는 말이 신원을 확인할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치아로 또 어떤 사람들은 옷 다누를 가지고 확인을 하는데 대다수는 도저히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뒤에 뼈의 주인을 하나하나 구분할 수가 없어서 결국 큰 무덤을 하나 만들어 합장하고 합동 위령제를 지냈습니다.

 

김해에 있는 이모님 댁이나 누님 댁에 버스를 타고 가다보면 오른쪽에 큰 묘가 하나있었습니다. 바로 그 묘입니다. 그 묘지를 보면서 그 일을 떠올리고는 했는데 5.16이 일어난 뒤에 누군가 그 묘를 파헤쳐버렸습니다.

 

싸하올렸던 견치돌 間知石 들을 모두 뽑아 이리저리 팽개치고 묘의 봉분까지 다 파헤쳐버렸습니다. 봉분만 파헤친 것인지, 아니면 뼈까지 꺼내 어디로 흩어 놓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부마국도변, 버스에서 볼 때 20-30미터 떨어져 있는 그곳을 다 파헤쳐놓은 것입니다. 당시 어린 생각으로도 묘의 봉분을 파헤친다는 것은 아주 끔찍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그것이 5.16에 대한 기억으로 저에게 남아 있습니다. 그런 것이 5.16의 실체입니다.

 

지금도 박정희 대통령 이야기를 하게 되면 그 일이 머리에 떠오릅니다. 저 역시 박대통령에 대해서는 공과 과를 따로 평가해야 한다고 하다가도, 당시 파헤쳐진 묘의 모습이 떠오르면 '어떻게 공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하며 생각이 바뀌어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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