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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월 5일 목요일

여의도정치에서 시민정치로

오마이뉴스 2012년 1월 5일자 정태인(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원장)이 2012년을 전망하는 10회 연재 글 가운데 첫번째 글, 대통령만 바꾸면 만사형통? 순진하시군요--정권교체 넘어 시대교체의 거대한 전환 준비하자 라는 제목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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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우리는 양대 선거를 앞두고 있다. 꼭 이겨야 한다는 당위를 확인하기 전에 우리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역사의 좌표를 확인해야 한다. 미국의 경제학자 스위지는 이런 역사의식을 "역사로서의 현재"라는 말에 담았다.

우리의 역사적 현재는 1929년 대공황 이래 자본주의 최대의 위기이다. 1990년대 말 미국정부는 IT 버블이 붕괴하자 재빨리 부동산 버블로 바꿔치기 했다. 그 수단은 금융규제완화와 금리 인하였고, 그 결과가 2008년 리먼브라더스 파산을 계기로 초래된 현재의 세계 금융위기이다. 2009년 전 세계적 금융완화정책과 재정확대정책으로 각국의 성장률이 회복기미를 보이자 G20의 세계적 차원의 개혁도, 또 오바마의 미국 내 금융개혁도 흐지부지 끝났다. 대신 미국은 소비와 재정을 재무성 증권으로 조달하고 있다.

2010년 그리스, 아일랜드, 포르투갈에서 시작된 유럽의 재정위기로 제2차 위기가 촉발되었다. 유럽의 재정위기는 같은 통화를 쓰면서도 경쟁력이 취약한 나라에 대한 보조금을 거부했기 때문에 생긴 사태다. 비유하자면 우리 정부가 강원도에 대한 지역교부금을 주지 않겠다고 선언해서 서울이 강원도로부터 막대한 교역 이익(경상흑자)을 거두고 있는 것이다.

즉, 현재의 유럽 위기는 내부의 위기이다. 유럽 집행위원회는 재정통합을 하는 대신 그리스나 이탈리아가 유로화 표시 국채를 발행해서 독일이나 프랑스 등 역내 강대국의 은행들이 이를 인수하도록 했다. 재정이 해야 할 일을 금융으로 해결한 것이다.

이제 미국과 유럽, 그리고 일본은 대규모 적자로 인해 재정확대정책도 쓸 수 없고 이미 0%에 이른 금리 때문에 금융완화정책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다. 선진국 전체가 일본형 장기침체에 빠져들고 있다. 바야흐로 '대침체'(Great Recession, 대공황과 비교하기 위해 학자들이 2008년 위기에 붙인 말)는 '장기침체'(Long Recession)로 전환되고 있다.

위기 이후의 패러다임과 헤게모니 불분명

또한 세계경제는 글로벌 불균형과 국제통화체제의 위기도 동시에 맞고 있다. 이 위기는 새로운 국제통화와 국제청산시스템을 도입하기 전에는 해결될 수 없는데, 달러를 포기할 수 없는 미국의 힘은 여전히 강하고, G20는 IMF 기금을 조금 늘리는 정도밖에 합의하지 못했다.

하지만 위기 이후에 어떤 세상을 펼쳐야 할지에 관한 그 어떤 새로운 정책체계도 나오지 않았다. 1945년 이후의 복지국가를 뒷받침한 케인즈이론이 1930년대에 출간됐고, 1980년대를 풍미한 통화주의이론이 1960년대에 정립된 것에 비하면 위기 이후의 사회의 이론은 오리무중이다. 학문의 제국주의를 일삼으며 오만을 떨던 경제학은 이미 붕괴했다.

중장기 비전이 없는 상태에서 당장 무역적자와 재정적자에 허덕이는 미국은 '환율법'(환율을 조작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나라에 무역보복을 할 수 있게 한 보호무역법안)과 제3차 양적 완화(금리 인하를 통한 경기부양 효과가 한계에 달하면 중앙은행이 국채를 매입하여 시장에 통화량을 공급하는 정책, 즉 달러 발행을 늘리는 것)로 또 한편의 환율전쟁을 예고하고 있다. 

100년이 넘는 주기를 갖는 패권 주기도 최저점을 향해 치닫고 있다. 구사회주의권의 몰락으로 정점에 올랐던 미국의 단일 패권은 쇠퇴 기미가 역력한데 이를 대체할 패권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금융위기 이후 G2로 급부상한 중국이 새로운 헤게모니 체제를 구축하는 데는 아무리 짧게 잡아도 20년 이상 걸릴 것이다. 이 기간 세계는 중미간의 위태로운 힘겨루기를 목도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한반도는 그 한복판에 있다.

시장경제만으로 해결 불가능한 위기의 중첩

그런데 여기 또 하나의 위기가 도사리고 있다. 석유의 생산이 정점에 이르는 오일피크가 눈앞의 현실이 되고 있으며(전문가들은 2015년경으로 예측한다) 글로벌 기후변화 역시 다음 세대의 재앙을 예고하고 있다. 멀지 않은 장래에 에너지·석유 위기가 겹칠 가능성 또한 점점 높아지고 있다. 시장의 자동조절기능이 해결해주리라고 믿기에는 너무나 큰 위기들이 첩첩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주기가 다른 위기, 즉 시간대(time span)가 다른 위기가 중첩되고 있다는 것은 해결의 주체와 영역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로서의 현재"는 2012년 총선과 대선이라는 구체적인 한국 상황에서 중첩적인 과제의 해결을 요구하고 있다.

즉, 우리는 위기의 각 영역에 고유한 해결 방향을 찾아내고, 2012년 한국이라는 정세 안에서 그 방향을 당장 실현할 하나의 가치와 비전으로 제시해야 하는 지난한 과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하나 하나의 위기 해결 방향조차 확실하지 않은 가운데 이런 작업은 고도의 추상성과 상상력을 요구한다.

한국경제의 폭탄, 가계부채와 높은 대외의존도

세계경제뿐 아니라 한국 내부에도 시한폭탄이 째깍거리고 있다. 2003년부터 본격적으로 부풀어 오른 부동산 버블과 이에 긴밀히 묶여 있는 가계부채가 바로 그것이다. 2009년 세계적 경기부양정책의 가장 큰 수혜자는 한국의 수출대기업이었고 상대적으로 높은 성장률은 버블 붕괴의 초침을 잠깐 묶어두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제 시작된 세계경제의 장기침체는 90%를 넘나드는 대외의존도를 보이는 한국경제를 바로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반도체 가격이 하락하고 자동차의 내수는 거의 늘어나지 않고 수출 증가율 역시 반토막 날 지경에 이르렀다. 1100원대에서 방어해 온 환율마저 무너진다면(현재는 유럽위기의 여파로 달러가 강해지고 있지만) 실물침체가 금융경색으로 이어지고, 부동산 버블 붕괴가 다시 금융위기를 불러올 위험마저 있다. 내부에서 파들거리고 있는 부동산 가격이 급락할 경우에도 1980년대 후반 미국의 S&L 위기처럼, 제2금융권으로부터 시작하는 금융위기가 발생할 수 있다.

87년 민주화는 신자유주의의 완성으로 이어져

1990년대 중반 이후로 진행되어 온 양극화는 사회 전체에 절망, 즉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금융자유화와 가계신용의 확대, 민영화와 규제완화, 그리고 부동산과 증권 투기는 소득과 자산의 불평등 지표들을 가파른 비율로 상승시켰다. 주거, 교육과 보육, 일자리, 노후, 건강 걱정이라는 이른바 '5대 불안'은 그 직접적 결과이다.

한국 정부의 시장만능주의는,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와 외환위기, 뒤이어 IMF의 강요와 내부의 적극적 협력으로 진행된 김대중 정부의 노동유연화, 민영화와 규제완화, 그리고 노무현 정부의 한미FTA 추진과 이명박 정부의 비준으로 그 정점에 이르렀다.

군부독재를 종식시킨 "6월 항쟁"으로 시작된 "87년 체제"는 군부독재를 종식시켰을 뿐, 새로운 사회경제체제 모델이 자리를 잡지 못한 체제였다. 19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정권을 잡은 "민주정부"는 자기 고유의 사회경제모델을 실행하지 못했다. 아니 그런 모델을 상상하지 못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이 시기에 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 여겨졌던 클린턴-블레어 정부가 그랬듯이 적나라한 신자유주의에 약간의 훈기를 불어 넣었을 뿐 시장만능으로 치닫는 시대를 역전시키지 못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이 한탄했듯이 민주정부는 새로운 시대의 장자가 아니라 구시대의 막내였던 것이다.

정부의 정책, 그리고 재벌들이나 보수언론만 문제였던 것은 아니다. 우리 스스로 치열한 경쟁 속에서 "나와 내 가족만은 승리하여 대박을 터뜨릴 것"이라는 주문에 빠져들었다. 2002년 카드회사의 "부자 되세요"라는 광고 문구와 삼성의 "아무도 2등을 기억하지 않는다"는 카피는 이런 세태 변화를 단적으로 표현했다. "묻지 마" 투기 심리는 2007년 이명박 후보에 대한 "묻지 마" 투표로 이어졌고, 곧이어 2008년 총선에서 수도권의 양대 정당이 똑같이 "뉴타운 유치"와 "특목고 유치"를 내거는 희비극으로 치달았다.  

그러나 2010년 지방선거에서 상황은 급전했다. 무상급식을 매개로 보편복지가 화두로 떠올랐고 진보 쪽으로 선회한 야당이 대승했다. 이제 국민은 "나와 내 아이도 '루저'가 될 수 있다"는 공포를 상상하게 되었다. 대박의 탐욕에서 최소의 안전에 대한 요구로 돌아선 것이다. 국민들은 이제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론'과, 장하준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서 새로운 비전을 찾으려 한다. 정치가 말해야 할 가치와 비전, 그리고 리더십을, 결코 쉽지 않은 책들 속에서 스스로 캐내려는 것이다.  

시장국가서 복지국가로, 여의도정치서 시민정치로

세계적 위기가 한국에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는 가운데 우리 내부의 문제, 1990년대 중반 이래의 세계적 흐름에 휩쓸려간 정책기조, 그리고 대중의 적극적인 동조가 만들어낸 양극화, 특히 붕괴직전의 부동산-금융 버블이 폭발 직전에 있다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다행인 것은 무엇보다도 시민들이 어쨌든 과거 시스템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제는 루저가 되어도 살 만한 세상, 즉 복지국가를 요구하게 되었다는 것이고 경제위기는 또 다시 진보개혁세력에게 기회의 창을 열었다는 사실이다. 

일반시민들이 금년의 양대선거를 통해 '정권교체'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두 민주정부 때처럼 대통령과 청와대만 일부 바뀐다면 재벌-관료-보수언론의 3각 동맹에 휘말려 새로운 체제의 화두인 최소한의 '보편적 복지국가'도 이룰 수 없게 될 것이다. 우리는 '거대한 전환기'를 맞고 있으며 양대 선거는 이 더 긴 시대를 바꾸는 것이어야 새로운 사회경제체제 모델을 실행할 수 있다. 즉 우리는 '정권교체'를 통해 '시대교체'를 해야 하는 것이다.

지난해 아랍에서 시작해서 "월가를 점령하라"까지 터져나온 민중들의 숨가쁜 목소리는 시대교체, 즉 신자유주의의 대체가 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1920년대의 제국주의적 자유주의는 1929년의 대공황으로 끝이 났고 '거대한 전환'은 불행하게도 전쟁을 겪은 후에야 복지국가체제로 귀결되었다.  

1930년대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였고 세계의 대격변 속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는 수동적 존재였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지금 우리나라가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6% 수준이지만, 시민의식으로 본다면, 감히 세계 최고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또한 떠오르는 중국 옆에 있다는 지경학적 위치도 무시할 수 없는 이점이다. 하지만 중국이 전후의 유럽 복지국가처럼 새로운 사회경제모델을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1980년대에 각광을 받았던 일본 모델 역시 노쇠할 대로 노쇠했다.

올해의 양대 선거는 아시아 주도의 세계에서 우리가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는 첫걸음이 되어야 한다. 사회경제적으로나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보편적 복지국가', 나아가서 '지속가능한 보편적 복지의 동아시아공동체'가 가능하다. 이런 체제는 남북의 장점을 아우르고 배가하는 것이 될 터이다.

2012년은 이런 세계사적 '거대한 전환'의 첫 해가 될 수 있다. 시민이 주도하는 새로운 정치를 열어야 한다. 단순히 한나라당에서 민주당으로의 정권교체가 아닌 시장국가에서 복지국가로, 여의도의 정치에서 시민의 정치로 넘어가는 시대교체가 되어야 한다.

서구의 사회경제체제, 그들의 정신과 문화를 학습하고 모방하는 시대를 넘어서야 한다. 시대교체를 위해서는 진보진영이 적극 참여하는 '연합정부'가 필수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기서 또 실패한다면 우리는 대전환 속에서 또 다시 방향을 잃고 그예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질지도 모른다.

이번 새사연의 2012년 전망 시리즈는 양대 선거라는 격전이 벌어지는 전쟁터의 상황을 묘사하고 나아가서 시민들에게 제시할 정책 방향을 제시할 것이다. 단순히 조금 더 나은 정책이 아니라 시대교체로 나아갈 때 반드시 거쳐가야 할 길목을 보여드릴 요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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