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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 8일 수요일

학술출판 살리기, 저자들 자율적 연구체계가 해답

2012년 2월 8일 한겨레 최원형 기자의 보도,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와 이승우 도서출판 길 기획실장이 나눈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학술출판 살리기, 저자들 자율적 연구체계가 해답

인문·학술 출판인들의 진단

출판계가 어렵다는 건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학술 출판은 눈에 띄게 쭈그러들고 있다.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교양서는 스타 저자를 기반으로 삼아 꾸준히 팔려나가지만, 본격적인 학술서 출판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도 못하는 사이에 사라지고 있다는 위기의식이 점차 강해지고 있는 것이다.

지난 6일 양질의 사회과학 서적을 펴내온 후마니타스 박상훈 대표와 묵직한 인문·학술서를 주로 펴내온 도서출판 길의 이승우 기획실장을 서울 합정동 후마니타스 사무실에서 함께 만나 국내 인문·학술 출판의 현황과 전망에 대해 들어봤다.
 
두 사람은 “출판사마다 사정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의 이야기가 출판계 전체를 대변할 수는 없다”면서도 현재 상황과 전망에 대해 비교적 일치된 견해를 내놨다.
 
본격적인 학술서, 1000부도 못 찍어낸다 두 사람은 교양서와 구분되는, “국내 학자가 장기적인 관점으로 내실있게 연구해서 내놓는 학술서”의 출간이 지식생산 체계의 선순환을 위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당장 두 출판사만 하더라도 학술서를 낼 때 초판에 1000부 정도 찍던 암묵적인 기준이 600~700부 정도로 급격히 내려갔을 정도로 위태롭다고 입을 모았다. 학술서가 점점 더 ‘출혈 출판’이 되고 있다는 것.
 
지난해 길이 낸 김유동 경상대 교수의 문명사 연구인 <충적세 문명>은 초판을 600부 찍었다고 한다. 재판 부수도 고민을 거듭하다 300부를 찍었는데, 그나마 거의 안 나가는 상황이다. 공들여 만든 학술서가 겪는 현실이 대부분 이렇다고 한다. 후마니타스도 지난 한 해 1000부 판매를 넘긴 책이 절반도 안 된다. 이 출판사 신간의 30%가량이 학술서인 점을 고려하면, 학술서 출판은 본전도 찾기 힘든 현실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초판 1천부도 안팔려 한숨
스타급 저자는 교양서 매진

여기에 시중에 나오는 책들의 학술적 가치에 대한 우려가 겹친다. 이 실장은 “90년대 후반부터 한국사, 철학 등에서 대중적 글쓰기를 하는 젊은 필자들이 나타났지만, 긴 호흡과 긴 관점으로 학술적 연구를 담은 책은 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곧 알고 있는 지식을 대중들과 나누는 글쓰기에 성공한 유명 필자들은 연구를 통해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는 학술적 활동에는 소홀하다는 것이다. 몇 년 동안 연말에 각종 매체들이 발표하는 ‘올해의 책’ 목록만 봐도 진중한 학술적 성과를 담은 책은 찾아보기 어렵다고 한다. 이 실장은 “학술서와 교양서가 함께 가야 하는데, 출판계가 스타급 저자를 ‘소진’시키다시피 하면서 학술서 출판은 외면한 채 교양서 출간에만 목을 매고 있다”고 비판했다.

국가 앞에 줄선 지식생산 체계가 문제 두 사람은 “학술서를 써낼 만한 조건을 갖춘 필자도 찾아보기 힘들다”고 안타까워했다. 학계에서도 스스로의 호흡으로 장기적인 연구를 진행하고, 이를 책으로 써낼 수 있는 여력을 갖춘 학자가 없다는 것이다. 박 대표는 “논문을 보고 참신한 문제의식이나 새로운 접근법에 끌려 ‘책을 써보라’고 권유·제안했던 학자도 많았는데, 다들 책 쓸 여력이 안 된다며 거절하더라”고 말했다.


이승우 ‘도서출판 길’ 실장
“대학내 교수경쟁 체제로
저술보다 논문 우선순위”

단행본 저작보다도 우선순위에 놓이는 일들은 무엇일까? 논문과 프로젝트, 학회나 연구소 등에서의 행정업무 등이라고 한다. 이 실장은 “교수 경쟁체제의 도입 등 대학 사회의 급격한 변화에 따라 계량적 업적 산정이 자리를 잡은 뒤로 저술이 사라져가고 있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저술보다는 논문 점수가 더 중요해졌다는 것. 단행본 저술이나 번역서가 잘 나오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한다. 박 대표는 “한 해 16편의 논문을 써내는 역사학자를 본 적도 있다”고 덧붙인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논문과 프로젝트는 기본적으로 출판으로 이어지기 힘들다. 공동연구의 결과물 등이 간혹 ‘편저’로 나오기도 하지만, 여러 사람의 문제의식을 섞어 담았다는 한계를 벗어나기 어렵다고 한다.
 
출판인 두 사람의 이런 지적은 사실 낯설지 않은 문제 제기다. 학계 일각에서 이미 ‘학진 시스템’이라는 이름으로, 국가가 주도하는 연구비 지원을 중심으로 지식생산이 이뤄지는 현실을 비판해왔다. 이젠 출판인들까지 이런 현실에 비판을 거드는 모양새다. 박 대표는 “90년대 이후로 국가가 예산이나 정책을 통해 지식 생산에 미친 영향이 크다”며 “학자 스스로의 연구가 어려워지면서 출판계에도 의미있는 ‘인풋’이 줄어들고 있다”고 풀이했다.
 
출판 문화가 지식생산 주도해야 두 사람은 “70~80년대 출판문화가 지식생산과 사회운동 모두를 주도했던 경험을 되새겨봐야 한다”며 ‘장기적 관점’과 ‘자율성’을 강조했다. 지식생산 체계에 자율성을 강화해, 장기적 관점의 연구를 유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야 출판계도 여기에 호응해 학술 출판에 적극 나설 수 있다는 얘기다. 또 상업 출판에 치중하는 대형 출판사들이 본격적인 학술 출판에도 나서야 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영미권에서는 대학 출판사가 그런 구실을 하는데, 우리 현실에서는 그 기능을 대형 출판사들이 떠안을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
“국가 주도 연구비 지원이
학자 자율연구 어렵게 해”

서평과 논쟁 등 학술 토론의 공간이 더욱 확대될 필요성과 중소 규모 출판사들의 자기 혁신도 중요한 과제로 제기됐다. 박 대표는 “5000부에서 1만부가량 팔리는 다양한 학술서들이 교양서들과 함께 공존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모습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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