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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29일 월요일

‘출판 자유’ 옥죄는 출판진흥원


백원근의 출판풍향계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이 이름에는 역경에 처한 우리 출판문화와 출판산업 발전에 중추적 구실을 해야 한다는 시대의 소명이 담겨 있다. 출판문화진흥법이 법정 진흥기관인 까닭도, 국민의 혈세로 기관 운영비와 사업비를 지원하는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기관은 지금 출판의 자유를 억누르는 검열기구이자, 출판시장의 황폐화를 방치하겠다고 대놓고 공언하는 공적(公敵)이 되어버렸다. 핵심 정책 고객인 출판계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출판의 가치를 짓뭉개는 행태를 언제까지 계속할 것인지 통탄스럽다.


지난 7월27일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를 개편해 새로 출범한 출판진흥원은 초대 원장의 ‘낙하산’ 임명 논란을 빚으며 애초 예정했던 출범식조차 못 치른 채 출판계와 극심한 갈등을 빚어 왔다. 그러더니 9월 들어서는 ‘사디즘’의 주인공인 프랑스 작가 마르키 드 사드의 소설 번역본을 유해간행물로 지정하여 전량 수거·폐기하는 21세기판 분서갱유를 자행했다. 나아가 문화체육관광부가 ‘출판문화산업 진흥 5개년 계획’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진흥원장은 ‘도서정가제의 중립적 재검토’ 망언을 함으로써 현행법이 보장하는 ‘무늬만 도서정가제’보다도 못한 공정거래위원회 대변인 같은 자세로 물의를 일으켰다. 도대체 출판진흥원은 무엇을 위해 탄생한 조직인가.


취향이 독특한 사드의 소설을 옹호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여하한 내용의 책이든 출판인이 발행인으로서 자신의 실명과 출판사 이름을 내걸고 발행한 책을 전량 수거해서 폐기하라고 명령하는 따위의 일은 출판진흥원이 주도해서 할 일이 아니다. 기관의 신설 개편과 함께 사라지거나 최소한 다른 곳으로 이전했어야 할 과거형 조직(간행물윤리위원회)이 출판진흥원 산하에 연명하며 출판의 자유를 가로막는 억압기구 노릇을 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다. 서구 문학의 고전 반열에 있다는 200여 년 전 쓰여진 소설의 문학적 상상력조차 수용하지 못하는 편협함과 경직성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하필이면 책을 죽이는 일을 출판진흥원이 나서서 하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사디즘’이 아닐까. 굳이 음란도서 등에 대한 규제가 필요하다면 현행 형법과 청소년보호법, 그리고 관련 기관에서 규율하면 될 일이다. 독자의 판단 대신 국가가 나서서 금서 지정과 시장 퇴출, 책의 사형을 결정하는 퇴행적이고도 시대착오적인 난센스는 국제적인 망신이자 수치이다. 비판 여론에 떠밀려 뒤늦게 청소년유해간행물로 판정 변경을 하며 수위를 낮췄다지만 심의제도의 문제점을 보여줄 뿐이다.


도서정가제에 대한 출판진흥원장의 태도는 더욱 문제이다. 저자와 출판·서점계, 독서 시민단체를 비롯해 책의 생태계를 온몸으로 지탱하는 이들이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숙원으로 손꼽는 도서정가제의 철저한 시행 요구를 현임 원장이 모를 리 없다. 출판계에 보낸 취임 인사 편지에서도 이 문제의 해결을 약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흠결 없는 정가제가 시행되도록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겠다는 다짐은커녕 ‘정가제에 대한 여러 가지 의견이 있다’ 운운하며 정가제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듯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건강한 출판시장 질서를 바라는 모든 이들에게 커다란 상실감과 상처를 주었다. 무능과 무소신, 철학의 부재, 심지어 눈치조차 없음을 스스로 증명했다. 날로 어려워지는 출판환경에서 그나마 출판진흥원에 실낱같은 기대를 걸었던 출판인들의 절망과 좌절감을 어찌할 것인가. 지금 책이, 우리의 출판이 오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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