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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9월 8일 일요일

Nazism and the German economic miracle

Nazism and the German economic miracle
By Henry C K Liu

히틀러의 경제 기적

나치는 1933년에  전쟁 배상금 지불의무와 외국 투자나 신용의 전망이 0이었기 때문에 그 경제가 완전 붕괴 중인 시기에 권력을 잡았다. 그럼에도 독립적인 주권 신용 통화 정책과 완전 고용 공공사업 프로그램을 통하여 제3 제국은 , 착취할 수 있는 해외 식민지를 다 빼앗기고도 ,군비 지출을 확대하기 전에 ,4년 이내에 유럽에서 가장 강한 경제로 일어 설 수 있었다.  사실상, 독일 경제 회복은 , 미국 경제와는 대조적으로 ,독일 재무장 전에 일어났고 ,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1933년에 독일은 1945년의 독일과는 아주 차이가 많았다. 1945년에 독일은 물리적으로 피폐되어 있었지만, 1933년에는 그렇지 않았다.1933년 독일은 정치경제 제도들이 피폐되어 있었다. 1933년에 독일은 마셜 플랜의 혜택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 전쟁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고, 신용 평가가 작동하지 못했다. 1933년에 독일이 가진 것은 경제 민족주의를 백분 발휘할 수 있게 해주는 정책들을 채택할 수 있게 해준 완전한 주권이었다. 1945년에 독일은 주권을 빼앗겨서 미국과 소련의 지정학적 의도들에 맞추어 국가 정책들이 조정될 수밖에 없었다. 경제적으로, 외국 투자와 신용에의 의존으로 서독은 주요한 시장인 미국의 입맛에 좌우되는 수출 경제를 채택하는 수밖에 없었다.

25년간의 신자유주의 시장 경제 개혁 후에도 ,중국은 나치가 집권한 후 4년 만에 이룩한 것 즉 수출의 필요성이 없이 주권 신용으로 금융이 제공된 활기 찬 경제를 가진 완전 고용을 여전히 이루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중국이 자신의 주권 신용을 쓰지 않고 외국 투자에 의존하는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중국이 받는 벌은 필요하지도 않는 외국 자본에 지불하기 위해 생산한 부를 수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25년 이상의 결과란 중국이 미국에 대해 엄청난 무역 흑자를 기록하고 있지만, 미국에게 투자 자본을 여전히 구걸해야 한다는 것이다.

1,2차 대전 사이의 기간은 근대 유럽 경제사의 시기와도 달리, 독일과 소련에서 중앙 계획 경제의 성공이 이루어졌다.  미국은 제2차 대전의 지배적인 승자로서 경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발흥을 저지하기 위해 세계 각지의 국가 계획들을 억압함으로써 자신의 헤게모니를 영구화 하려고 하였다.  미국은 미국 경제에 다른 모든 경제들을 봉사시키기 위해 , 전 세계 시장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자유 무역을 촉진하였다.

완전 고용의 경제적 힘

히틀러의 그가 집권하자마자 독일 국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히틀러는 공격적인 완전 고용 캠페인을 벌렸다.  1933년1월에서 1935년 7월까지 고용된 독일인의 수는 반 이상 , 1170만에서 1690만으로 증가했다. 생활비를 지불하는 새 일자리가 500만개 이상 창출되었다. 실업은 독일 경제에서 사라지고 전 독일이 재건에 생산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임금 동결과 가격 통제로 인플레는 통제되었다. 이 외에도 , 1914-1918년 동안에 배운 교훈을 명심하여 , 히틀러는 외국 자본과 공급으로부터 독립되고 또 다른 경제 봉쇄와 경제 전쟁으로부터 잘 보호될  경제를 창조하는 것을 겨냥하였다. 독일인들에게, 위의 모든 것들은 히틀러는 독일을 경기 공황으로부터 구출한 자일뿐만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번영으로 이끌 인물이라는 증거였다. 독일인들의 지도자( the Fuehrer)에 대한 신뢰는 극적으로 높아졌다.

4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히틀러의 독일은 전쟁의 패배로 인해 피폐되고 , 무거운 전쟁 빚과 새 외국 자본이 전혀 이용가능하지 않았음으로 경제가 파산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의 자유주의적 정책에 의해서 국가가 병에 걸린 상태에서 유럽에서 가장 강한 경제와 군사 강국으로 일어설 수 있었다. 독일은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는가? 그 중심부는 1933-36의 독일의 일자리 창출 프로그램인데, 그것은 재무장보다 앞섰다. 70년 후의 전 세계의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고용은 절대적으로 중요하고 , 생계 임금이 국가 번영에 열쇠라는 것을 아직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완전 고용으로 이끌지 않는 어떠한 경제정책도 자기 기만적으로 반-생산적이며 , 국제 임금 아비트러지를 허용하는 어떠한 정책도 반역적이다. 1930-32 사이의 독일의 경제정책들은 잔인할 정도로 디플레-성이었는데 , 높은 실업률에 무관심했다. 1933년 히틀러는 사회경제적 혼란 시에 당선되었다.

나치 경제 회복 프로그램의 금융은 히틀러가 수상으로 임명되기 전에 이미 실험된 주권 신용 창조 테크닉에 의존했다. 1933년 후에 바뀐 것은 막대한 단기 주권 신용을 창조하고 그 신용에 의해 창조된 빚을 전부 다 갚으려는 확고한 정부의 의지였다. 단기 주권 신용은 정부 신용에 대한 일반적인 불신 풍조를 변화시키는데 중요하였다. 단기 정부 채권의 빠른 롤오버로 몇 달이 안 돼서 독일 주권 신용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창조 되었다.

히틀러는 1933년5월에 독일 산업가들에게 경제 회복은 국가와 민간 부문 양자의 행동을 요한다고 말하였다. 정부의 역할은 주로 세금 인센티브를 통하여 민간 부문 투자를 격려하는데 국한되었다. 그는 산업이 아니라 고속도로 프로젝트만을 위한 상당한 공공기금을 제공할 용의가 있음을 표명하였다. 소비자들이 지출할 돈이 없든지, 또는 직업의 불안 때문에 생산된 제품을 사는데 돈을 지출하기를 꺼려하게 되면 투자가 이루어지기 어렵다. 그러므로 히틀러는 노동자들이 건강한 소비자들이 되기 위해서는 버젓한 소득이 있어야 됨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완전 고용이 경제 순환을 굴러가게 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이웃보다 더 잘 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의 사회적 결과에 대한 전통적인 독일인들의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 나치 프로퍼갠더는 소비자들의 욕망을 개발함으로써 경제를 심리적으로 자극하려 하였다.

히틀러는 1933년5월 31일에 제3제국의 예산은 수지균형이 맞아야 된다고 강조하였다. 수지가 균형 잡힌 예산은 , 히틀러가 필요한 민간 투자를 촉진하기 위해 사업세를 감세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사회 프로그램 비용들을 줄이는 것을 의미하였다. 사회 프로그램 축소를 피하기 위해, 히틀러는 “일자리 창출 어음”(Arbeitsbeschaffungswechseln)이라는 재정적 딜레마를 다루기 위한 고전적인 통화 수법에 의거한 “전- 금융”("pre-financing" (Vorfinanzierung))에 의지했다.

일자리 창출 어음의 “전-금융” 기획 하에서, 제3제국 재무부는 이 WCBs(3개월, 5년까지 갱신 가능)을 참여한 신용기관들과 공공 기관들에게 배포했다. 일자리 창출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 돈을 요구했던 계약자들과 공급자들은 그 일을 추진하던 기관이나 적절한 신용 기관들에게서 어음을 받아갔다. 그 신용기관들은 그 어음(청구서)에 대한 지불의무를 받아들였는데, 그 어음은 이제 상업 어음처럼 취급되고, 중앙은행에서 재할인 될 수 있었다. WCBs를 발행하고 받아들이고 재할인하는 이 전 과정으로 계약자들과 공급자들에게 지불하는데 필요한 현금을 융통할 수 있었다. 3개월마다 성공적으로 롤오버 한 경험으로 급속히 신용 가치가 정착되었다. 제3제국 재무부는 1934-1938까지 매년 총 액수의 1/5를 되샀는데, 경제와 납세가 회복되어 갔기 때문이었다. 그 어음(청구서)에 대한 안전장치로, 제3제국 재무부는 그에 상응하는  세금 증명서(tax vouchers (Steuergutscheine)) 또는 다른 채권들을 신용기관들에 예치했다. 재무부가 WCBs를 되삼에 따라, 그 세금 증명서는 다시 재무부로 되돌려졌다. 히틀러는 고용을 위한 특별한 돈을 창조함으로써 독일 경제에 화폐 공급을 늘렸다.

1907년의 미국 은행 패닉에서, J P Morgan (1837-1913)도 똑같은 일을 하였다. 그는 미국 은행들에게 현금이 아니라 그가 발행한 clearinghouse certificates로 그들 사이에 정산하라고 강요함으로써 정부를 개입시키지 않고  불법적으로 화폐 공급을 늘렸고, 그 자신의 종이로 지불하여 금융 부문의 훨씬 더 큰 비중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 차이점은 경제적 혜택은 나치 독일에서와 같이 나라 전체에 돌아감 것이 아니라, 모건 개인에게 돌아갔고, 사적인 화폐가 실업자들을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은행들을 구제하기 위해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나치의 경제 전문가들은 직업 창출을 목적으로 하는 주권 신용 창조는 인플레를 일으키지 않으며 ,정부 예산 균형을 맞추기 위해 세금을 올리고 복지를 삭감하는 보수주의적 접근법보다 훨씬 더 책임 있는 정책이라는 것을 알았다. 외채를 갚기 위해 ,정부 예산 균형을 맞추려고 통화 억제와 사회-지출 감축이라는 천치 같은 정책은 현재도 IMF에 의해 전 세계의 채무국-미국은 예외-들에 강요되고 있다. WCBs를 되사는 것은 1934-39 제국 예산에 부담을 주었지만, 완전 고용의 회복의 결과로 복지비용과 다른 세금 보조금 비용이 하락함으로써 그 부담은 상쇄되고도 남았다. 남은 돈은 공공 부채와 세금을 줄이는데 사용되었다.

600만 명의 독일 실업자들을 일터로 되돌려 보내는 방법으로서 자원들을  WCBs에 사실상 강제했던 Reichsbank의 범위에는 독일이게 독특했던 법적, 정치적 그리고 제도적 제한들이 있었다. 그러나 WCBs의 원리들은 비정상적으로 높은 실업 수준에 대항하기 위해 오늘날 미국, 중국 또는 여타의 나라에 의해 응용될 수 있다. 슬프게도, 이 상식적인 밥법은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불분명한 인플레 이론들에 의해 정당화되는 확고한 반대에 직면하고 있다. 진짜 이유는 높은 실업률과 저임금이 곧바로 기업 이윤으로 이어지는 경제에서 은행 부문은 높은 실업률을 외부효과로 취급함으로써 과도한 이윤을 수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높은 실업률에서 나오는 이윤은 사적인 손에 들어가는 반면, 그 높은 실업률의 비용은 정부 비용으로 사회화 된다.

1933년에 , 히틀러는 독일 재계 대표들에게 나치 지배는 자유-시장 시스템과 합치함을 강조하였는데, 그것은 그가 그 산업가들의 지지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회복기에 임금을 낮춤으로써 그 지지를 살 수도 있었지만, 가격과 이윤을 억제하는 강한 정책들은 재계를 등 돌리게 만들고 경제 회복의 속도를 늦추게 만들 소지가 충분했다. 그 대신에, 히틀러는 일반적인 가격 상승을 통해서가 아니라 생산량과 판매량의 증가에 의해 얻어진 단위 비용 감축을 통하여 독일 비즈니스에 이윤을 되살리려 시도하였다. (Mengenkonjunktur, niche Preiskonjunktur - output boom, not price boom) .“성과급”((Leistungslohn - payment on a price-rate basis))의 채택으로 생산성이 올라가고 , 따라서 비용을 낮추고 이윤은 올릴 수 있었다. 이 “가격 붐이 아니라 산출물 붐”과 “성과급” 원리는 많은 경제들에서 인플레와 싸우기 위해 오늘날에도 적용될 수 있다.

히틀러는 구제 프로그램들과 농산물 가격 보조를 통하여 과도한 부채를 짊어진 독일 농가들을 구하였다. 안정적인 농가 소득은 중간상들을 희생하고 얻어졌다. 그러나 , 히틀러는 소비자들에게 생계 소득을 제공함으로써 국민의 지지를 계속 얻었다. 나치 독일이 WTO의 회원국이었다면, 이 옵션은 닫혀져 있었을 것이었다.  히틀러는 국가 경제에 그리고 궁극적으로 재무장  목적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부문에서만 가격 안정을 추구했다. 독일은 경제적 권력을 괴링의 손에 집중시키고 규제된 자유-시장 정책들을 종식시킨 1936년 4개년 계획 전까지는 전반적인 가격 정책이 없었다.

기업 사장들은 신규 주문에 대한 전망에 대한 그들의 판단에 기초하여 투자와 고용 결정들을 내린다. 히틀러 치하에서의 독일의 경제 회복과 루즈벨트 치하에서의 미국의 경제 침체 사이의 차이는 재화에 대한 신규 주문에 대한 불확실성의 정도였다. 히틀러는 1936년 후에 , 주요한 재무장 프로그램으로 수출 필요가 없이 독일의 내구재와 자본재에 대한 막대한 수요가 생길 것임을 분명히 했다. 그런 보장을 받고, 독일 산업은 자신감을 갖고 사업 확장을 계획할 수 있었다. 루즈벨트는 그런 “자신감”을 산업들에게 제공할 수 없었고 진주만 사태 전까지 빈혈 상태의 시장 제력들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다.

마셜 플랜: 화폐 정복을 위한 트로이 목마
마셜플랜은 1947년에 선포된 , 전 세계 공산 정권들에 대항하여야 하는 미국의 도덕적 의무를 강조하는 트루먼독트린으로부터 나왔다. 마셜플랜은 130억$(1947년의 미국 GDP는 2440억$ , 즉 5.4% , 2004년 달러로는 6320억$)를 지출했다. 그 돈은 전부 다 미국 정부 예산에서 온 것이 아니라, 미국 주권 신용에서 왔다. 마셜플랜의 가장 중요한 면은 유럽에 투자하는 미국 투자자들에게 약한 유럽 통화들로 표기된 그들의 이윤을 보장된 고정 비율로 달러와 교환할 수 있게 미국 정부가 보증했다는 것이다.

마셜플랜은 미국 달러를 세계 기축통화로 만드는데 일조하였다. 마셜플랜은 국제무역이 재개되도록 하였고, 달러가 1971년에 금에서 떨어져 나온 후 50년 이상의 달러 패권의 기초를 놓았다. 마셜플랜은 독일 경제 회복에 일조했지만, 그것은 승자가 패자에게 주는 전적으로 사심 없는 선물은 아니었다. 그것은 도리어 화폐 정복을 위한 트로이 목마였다.  그것은 독일 경제를 미국 경제에 종속된 위성 경제의 지위로 만들었다.

마셜플랜은 2004년 달러로 6320억$를 유럽에 빌려 주었다. 일본의 2004년 9월의 외환보유액만도 8300억$였다. 다른 말로 하면 , 일본은 2004년에 미국이 1947년에 마셜플랜으로 빌려준 것보다 더 많이 미국에 빌려주고 있다. 그리고 일본은 그 대가로 아무 것도 얻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그 대출은 미국이 마음대로 찍어낼 수 있는 달러로 표기되어 있고, 달러는 엔화로 바꾸지 않고는 일본에서는 전혀 쓸모가 없는데 , 그것은 달러 헤게모니 때문에 일본은 엔화 공급을 줄이지 않고서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엔화 공급을 줄이면 일본 경제는 위축되고 엔의 외환 비율은 올라가면서 일본의 수출 경쟁력은 떨어지게 된다.

서독의 전후 경제는 수십 년간 잘 기능했고 유럽에서 가장 강한 경제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 성공의 많은 부분은 비스마르크 시대까지 거슬러 가는 독일의 강한 사회 복지 전통과 공장에서의 노동자들에게 경영에 관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하고 서독 산업들에게 오앤 기간 동안의 노동평화를 제공했던 공동결정 시스템 덕분이었다. 냉전의 경제학은 또한 서독에게 미국 시장을 보장해 주었다. 1957년의 유럽경제공동체 창설로 서독의 수출 지향 경제는 또 다른 추진력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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