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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4일 수요일

20년 동안 쉬지 않고 달려온 계간지 <황해문화>

20년 동안 쉬지 않고 달려온 계간지 <황해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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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 장수영 편집부원, 이희환 편집위원, 김명인 편집주간,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 김진방·김진석 교수, 이광일 박사.<사진제공ㆍ새얼문화재단>
ⓒ 한만송

서울 중심의 구심력이 대한민국의 정치·문화·언론·교육 등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현실에, '주인 없는 도시'라는 오명을 가진 인천에서 20년 동안 한 차례도 쉬지 않고 발간된 계간지가 있다. 바로 새얼문화재단(아래 새얼)이 발행하는 <황해문화>다.

20년 발간의 힘, 어젠다 형성과 확산에 있었다

<황해문화>는 1993년 겨울 창간했다. 상업적 수지타산을 고려하지 않고 만들었다. 대한민국에서 많은 계간지들이 '돈' 문제로 명멸해왔음에도, <황해문화>는 지금도 수지타산을 크게 고려하지 않는다. 

특히 유명 계간지들도 '경박단소'(가볍고 얇으며, 짧고 작음)의 매체 문화와 단행본 중심의 출판문화로 명맥을 유지하기 힘든 상황에서, <황해문화>는 20세 청년으로 성장했다. <황해문화> 독서모임이 전국적으로 생겨났고, 먼 미주에서도 독자가 생겼다.

그 힘은 어디서 비롯됐을까? 발행 주체인 새얼의 저력 덕분이다. 새얼은 40년 가까이 인천에서 뿌리를 두고 성장한 민간 문화재단이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지원금 한푼 받지 않고, 회원들의 회비와 후원으로 운영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문화 불모지라 일컬어진 인천에서 백일장(28년), 국악의 밤(20년), 가곡과 아리의 밤(30년), 새얼아침대화(28년) 등을 지속하면서 인천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한국의 잡지 저널리즘의 쇠퇴는 극단적 흑백논리 혹은 상호모순적인 대중적 억설들이거나 아니면 고답적인 원론들일뿐, 여론의 합리적 변증과 조정의 과정은 생략되거나 실종존 데서 비롯됐다. 그 결과 '보수꼴통'의 논리와 '종북좌빨'의 논리만 남는 '지적 야만'의 상태에 빠져들게 됐다.

많은 어려움에도 명실 공히 한국을 대표하는 풀뿌리 지역문화재단으로 성장한 새얼에, 지역을 넘어 전국적 어젠다(agenda·의제)를 형성하고 확산하는 시사문화계간지 <황해문화> 발간 사업은 다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자부심이다." 

<황해문화> 편집주간인 김명인 인하대학교 교수의 한국 잡지의 저널리즘에 대한 진단과 <황해문화>에 대한 애착이다.

'김소연'으로 시작해 '김소연'으로 끝난 20주년 기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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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해문화 20주년 기념호(81호) 표지. 황해문화가 인천에서 발간되고, 계간지임에도 20년 동안 발간될 수 있었던 힘은 어제던 형성과 확산에 있다.
ⓒ 한만송

지난 1일 발행된 이번 20주년 기념호(81호)의 타이틀은 '20년,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이다. <황해문화>가 첫 선을 보인 1993년부터 20년 동안 이 땅에서 각 분야에서 치열하게 살아온 마흔여섯 사람의 이야기가 '벌거벗겨진 삶' '추방당한 사람들' '이 땅에 살기 위하여'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는 주제로 분류해 담았다.

해고 노동자인 방종운 전국금속노동조합 콜트악기지회장, 박경석 장애인이동권연대 공동대표, 탈북자 김형덕, 한인덕 월미도원주민귀향대책위원장, 박래군 '인권중심사람' 소장, 곽현숙 배다리 아벨서점 대표, 박시환 전 대법관 등이 각자의 분야에서 살아온 삶을 꼼꼼히 기록했다. 일종의 집단적 자서전인 셈이다.

특히 이번 호는 '김소연'으로 시작해서 '김소연'으로 끝난다. 둘은 동명이인이다. 앞의 김소연은 이제 스물세 살의 젊은이로 현대미포조선 현장노동자투쟁위원회 의장 김석진의 딸이다. 뒤의 김소연은 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장이다. 둘의 나이 차는 20년이다.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은 "그럴 의도로 청탁했던 것은 아니지만, '20년,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이란 주제를 이처럼 잘 보여줄 만한 인물들도 드물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23세 김소연은 노동운동가로 살아온 아버지의 삶을 어려서부터 지켜보면서 겪었던 가족의 아픔과 어느덧 낯설어진 아버지와의 화해 등을 솔직하게 서술했다.

"아버지는 투쟁을 하고자하는 자는 방법을 찾고, 투쟁을 회피하고자 하는 자는 구실을 찾는다는 말을 자주 했다, 나 역시 살면서 겪는 어려움을 회피하려고 했던 적이 많았다, 이제는 진정을 지켜야할 가치를 잃지 않고 나를 사랑하며 살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정말 간절하다"고 자신을 북돋웠다

14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이틀 앞둔 1992년 3월 22일 군(軍)의 부정선거를 고발한 이지문씨는 '인간의 얼굴을 한 따뜻한 정의를 꿈꾸며'라는 제목의 글에서 자신의 겪은 20년 인생을 파노라마처럼 펼쳐놓았다. 내부고발로 삼성 특채가 무효화되고, 5년 동안 공직에도 나갈 수 없으면서 겪었던 아픔과 내부고발자운동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과정을 소개했다.

이씨는 "나를 되돌아보면서 남게 되는 것은 사람이지 않나 싶다. 나 역시 지난 20년을 돌아보면 그렇다. 앞으로 20년, 또 20 후에는 내가 쓰는 글들에 좀 더 사람이야기를 담고 싶다"며 "인간의 얼굴을 한 따뜻한 정의주의를 꿈꾼다"고 희망을 노래했다.

끝으로 김소연 전 기륭전자분회장은 아래와 같이 서술했다. 

"기륭전자 6년의 시간을 통해 아무리 힘겨워도 주체가 포기하지 않는 한 돌파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비정규직투쟁뿐 아니라, 장애인·철거민·이주노동자·성소수자·대추리·강정·밀양까지 일터와 삶터에서 생명과 평화를 기키며 인간답게 살기 위해 투쟁하는 많은 이들과 만나고 연대하면서 투쟁 사안은 다르지만 그 원인은 모두 '돈'이라는 것. 쉼 없이 경쟁하고 착취하지 않으면 유지가 불가능한 자본주의를 넘어, '사람과 생명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온몸으로 배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사인천(isisa.net)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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