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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 11일 토요일

[서예로 찾은 우리미학](10) 연가칠년명금동여래입상 명문

ㆍ은은한 부처님의 미소 뒤 꿈틀대는 ‘생명력’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12061954375&code=960202

골동의 미학을 제대로 음미하기란 쉽지 않다. 어지간한 전문적 식견과 실물 경험이 없이는 그 실체적 아름다움에 다가서기 어렵다. 종교 유물의 경우 그 엄숙성, 경건성 때문에 한 곱절 더하다.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국보 83호)이 지금 미국 뉴욕에서 전시 중이다. 1500여년의 세월을 머금은 영원한 미래불의 미소로 뉴요커들을 홀리고 있다. 

여기에 비하면 ‘연가칠년명금동여래입상(延嘉七年銘金銅如來立像)’(국보 119호)은 우리 역사에서 처음 등장하는 부처님임에도 불구, 정당한 미학적 평가는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다. 시대가 앞서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래서 그 완성도에서도 미륵보살보다는 떨어지는 것으로 보는 것은 당연하다. 처음 발견될 당시 전문가들이 ‘조각기법과 주물이 다소 거칠고, 광배의 기법도 일정한 패턴이 없다’고 평가할 정도다. 사실이고 옳은 말이다. 하지만 이 여래입상의 아름다움을 이렇게만 평가하고 입을 닫는다는 것은 1500여년 후의 우리가 무식하거나 안목이 모자라는 것을 실토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도 아니면 언표될 수 없는 어떤 신의 경지에 가 있을 수도 있다.

‘연가칠년명금동여래입상’ 광배 뒷면에 새겨진 명문이다. 1963년 경남 의령군 대의면 하촌리의 도로공사장 돌무더기 속에서 발견됐다. 고구려 평양에서 만든 이 유물이 어떤 연유로 신라 가야 지역인 의령 땅까지 전래됐는지는 미스터리다. 둥근 연꽃 대좌 위에 중생들의 고통을 풀어주는 시무외인과 여원인의 수인을 하고 있는 부처님이 소용돌이치는 불꽃 문양의 배모양 광배와 한 몸으로 주조됐다.

여래입상은 16.3㎝ 정도의 키에 손바닥에 잡힐 만큼 자그마하다. 필자와 같은 문외한에게도 끝없는 환희심으로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힘이 느껴진다. 그래서 금동여래불은 범접할 수 없는 부처님이 아니라 친근한 인간불로 다가온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의 실체에 대해선 평가가 인색하거나 얼버무린다. 인색하다는 것보다 단어가 모자란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앞서 본 미륵보살이 삼국시대 말기의 절대미·균제미의 세계 기준이고, 8세기 통일신라에서 만든 석굴암 본존불은 화엄불국의 원융무애한 아름다움의 결정으로 모두들 입을 모으고 있는 데에 비하면 더욱 그렇다.

여느 부처님과 같이 이 여래불도 잡힐 듯 말듯 한 미소만 머금고 있지 도무지 말이 없다. 그 아름다움에 대해 즉답을 할 수 없다면 일단 광배 뒤에 있는 명문으로 돌아가 보자. ‘延嘉七年歲在己未高麗國樂良 /東寺主敬第子僧演師徒四十人共 /造賢劫千佛流布第卄九 因現義 /佛比丘怯類所供養’이라고 4행 47자가 새겨져 있다. 정자로 새겨진 해서다. 하지만 필획에 있어 한일자(一) 쓰기의 정칙인 마제(말발굽)와 잠두(누에머리)가 분명한 통일신라 글씨와는 다른 과도기에 해당한다.

중국과 비교하면 필법적으로 완성을 본 당나라 해서가 아니라 그 이전에 유행한 남북조시대 글씨다. 미학적으로는 좋게 말하면 비정형의, 변화가 심한 짜임새를 가졌다고 하겠지만 보통 보면 초보자들의 막 쓴 글씨로 평가하기 십상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 여래입상의 명문은 필요 이상의 오해를 받아왔다고 생각된다. 잘 봐준다고 해도 명문의 내용 정도만 풀어내고는 글씨 조형의 아름다움은 지나치고 만다. 명문 텍스트를 여러 사람들이 풀어놓은 것을 모아서 보자. ‘연가 7년 기미년, 고려국(고구려) 낙랑(평양)의 동사(東寺)주지 경(敬)·제자스님 연(演)·사도 40인이 함께 현겁천불(賢劫千佛)을 조성해 유포합니다. (이 불상은) 제29불인 인현의불(因現義佛)로 비구 겁류(怯類)가 공양합니다.’ 

이 명문 정보로만 봐도 글씨조형을 쉽게 지나칠 수가 없다. 절집에서 흔히 있는 불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동사의 주지인 경과 제자 스님 연, 사도 40인이 천불을 조성한 내용이다. 천불을 만드는 것은 과거·현재·미래를 하나로 제도, 영원히 오가는 부처님을 신앙하는 행위다. 그 중에서 스물아홉 번째 해당하는 이 부처님은 인현의불이다. 이 글은 공양주인 비구 겁류의 간절한 발원문이 되고, 글씨는 고려시대 같으면 일자삼배(一字三拜)하는 사경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백번양보해 사경이 아니라고 해도 그냥 지나쳐도 좋을 막 글씨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여래입상이 당시 한 사람의 손이나 한 공장에서 만들어진 것이 분명하다면 혹 있을 수도 있는 부처님과 광배문양, 그리고 명문글씨의 미학적인 상관관계를 조형적 입장에서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예컨대 歲, 己, 未, 子, 人, 布, 所, 養과 같은 글자를 보자. 붓이 아니라 칼로 미끈한 필획을 주저 없이 대담하게 죽죽 내리 새기고 있다. 마치 중국 남조의 양나라 ‘예학명’ 필치와도 방불하다. 백제시대 부여의 부소산성 출토 ‘정지원명불상(鄭智遠銘佛像)’의 필획이나 서풍으로 볼 때 한 사람의 필에서 나왔다고 할 정도다. 이 유물의 글씨는 여래불의 시대미를 비정하는 척도가 된다. 또 6세기 초반 당시 중국, 고구려, 백제는 물론 신라 글씨의 같고 다름을 파악할 수 있게 하는 중요 단서를 제공해 준다. 이런 맥락에서 여전히 단정하지 못한 연가 7년 기미년은 599년보다는 539년이 더 옳다고 생각된다. 여래입상의 조각기법과 주물이 다소 거칠다고 했지만, 글씨에서 우러나오는 맛으로 보면 대륙적이고도 야성적인 힘을 말하는 것이다. 생명력이 넘친다고도 할 수 있다.

이 여래입상의 아름다움은 결국 광배 뒷면의 글씨 미학과 연결시켜 보면 훨씬 더 많은 말을 할 수 있다. 명문이 있는 고고유물은 글씨 내용은 물론 조형미학적 가치까지 당시 사람의 눈과 마음으로 돌아가서 해독될 때 온전히 살아서 우리 앞에 다가오는 것이다. 글씨는 모든 미학의 바로미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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