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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 11일 토요일

[서예로 찾은 우리 미학](11) 영일 냉수리비

ㆍ바위 위에서 춤을 추는 곡직과 장단의 변화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12132029185&code=960202

2015년부터 모든 교과서가 전자책으로 바뀐다고 한다. 교육과학기술부는 기존 종이교과서를 전자교과서로 전환하고 개인용 컴퓨터와 태블릿PC, 스마트패드와 스마트TV 등 모든 단말기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2000년 넘게 인간의 지식 연마와 지적 유희의 장이었던 종이가 전자화면으로 전격 대체되는 것이다. 

되돌아보면 인간은 지구상에 던져진 이래 돌을 종이 삼아 혹은 짐승의 뼈나 쇠붙이, 점토판, 나무, 비단을 가리지 않고 칼로, 붓으로 닥치는 대로 그리고 새기고 써 재끼면서 지금까지 왔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의식 이전에 무의식으로 행해진 본능이다. 이러한 반복을 거듭하면서 지적으로 진화했고, 3만여년의 무문자시대를 깨고 5000여년의 역사시대의 문을 열었다. 그 중 종이의 발명은 붓과 짝이 되어 인간의 인지능력이나 지적 사고를 기하급수적으로 확장시켰다. 종이와 붓이 없었다면 지금의 디지털 혁명도 불가능했다.

그런데 앞으로 어느 것이 더 오래갈 것인지 따져보면 전자책이 상선(上善)이라는 데 동의할 수 없다. 디지털이라는 첨단이 눈길도 주지 않는 돌이나 쇠붙이보다 e북이 오래갈 것인가 하는 대목에서는 대답이 망설여진다. 근 600, 700년을 헤아리는 삼국시대 역사만 해도 남아있는 문자유물 중 지류(紙類)는 거의 없다. 다만 최근 발굴되고 있는 당시 목간(木簡)에서 다소 과장한다면 낙양의 지가를 걱정할 만큼 활발했던 문자생활을 짐작해낼 뿐이다. 그나마 돌이나 쇠붙이가 아니었다면 종이를 대신하여 수백년의 잃어버린 역사의 공백을 메울 재간이 없다.

영일 냉수리비(국보 264호) 후면으로, 초탁본이다. 3면에 글자가 새겨진 특이한 이 비석은 하변 너비 73㎝, 좌변 높이 47㎝, 우변 높이 66㎝, 두께 30㎝다.

지금 남아 있는 고신라의 금석문은 고구려나 백제와 같고도 다르다. 20여기라는 수량도 수량이지만 수록 내용도 재산분쟁이나 상속, 토목공사의 책임에 관한 것들이어서 당시 생활상을 생생하게 복원 할 수 있다. 예컨대 영일 냉수리비의 내용은 절거리(節居利)라는 사람의 소유 재산과 죽은 후 재산상속 문제, 재산분쟁 때 이를 해결하는 절차가 기록되어 있다. 전면의 제3행에서 후면의 제1행까지 지도로갈문왕(至都盧葛文王) 이하 중앙의 6부 출신 고위관리 7인이 계미년 이전에 있었던 두 왕의 결정사항을 재확인하면서 절거리가 죽은 뒤 제아사노(弟兒斯奴)가 재산을 상속할 것과 말추(末鄒), 사신지(斯申支)는 이 재산에 관여하지 말 것을 결정한 내용이다. 더욱 재미있는 사실은 후면 2행에서 마지막인 제7행까지로 중앙에서 파견된 전사인(典事人) 7인이 앞의 고위관리 7인의 결정 사항을 집행하면서 소를 죽여 제의를 지내고 이를 포고한 사실을 기록했다.

이런 사례는 울진 봉평비(524년·국보 제242호)에도 보인다. 당시 울진지역의 모반사건을 중앙정부군이 진압한 뒤 모즉지매금왕(법흥왕)과 신료 13인이 육부회의를 열어 칡소(얼룩소)를 잡아 의식을 행하고 현지 관련자들에게 장 60대와 100대의 형을 부과하고 다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지방민에게 주지시킨 것이다. 

이 두 가지 금석문은 공문서와 율령비 성격을 각각 띠고 있다. 흔히 비석 하면 고려의 선사탑비(禪師塔碑)나 조선의 신도비(神道碑)를 떠올리지만 이 금석문들은 지금의 법원 판결문이나 정부의 담화문을 연상시킨다. 이런 정보는 백제의 무령왕릉지석이나 사택지적비와도 다르고 고구려 광개토대왕비나 모두루묘지명과도 다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냉수리비나 봉평비의 서체는 일상에서 자유롭게 사용되는 통행서체다. 필획의 뿌리도 고구려 광개토대왕비 중원고구려비 같은 질박한 고예계통의 연장선상으로 읽힌다. 비정형적인 해서로 이행해가는 과도기적 글씨로 이해할 수 있다. 냉수리비의 필획이나 글자의 짜임새, 글자와 글자 간의 배치인 장법(章法)은 자연석을 있는 그대로 전면·후면·상면에 쪼아 새긴 삼면비의 특이성만큼이나 자유분방하다. 점획은 앞서 본 대로 광개토대왕비와 같은 고예계통을 토대로 변화가 심한 글자구조를 따라 장단의 변화나 기울기가 심하다. ‘盡令’ ‘前世’ ‘交用’ ‘干支’ ‘居伐’ 등과 같은 글자의 필획은 하나같이 자유롭다. 다만 광개토대왕비는 필획의 곡직(曲直)이 중후하면서도 절제가 있어 엄격하다면 냉수리비는 곡직의 혼용에다 장단의 변화까지 있어 더 자유롭다.

글자의 짜임새나 글자로 바위 면이라는 공간을 경영하는 데 있어서도 점획의 운용과 마찬가지로 자유롭다. 이러한 고신라비 글자의 조형미를 두고, 한편에서는 선진 중국글씨를 먼저 수용해 자기화한 고구려, 백제보다 후진적이라고 평가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장 우리다운 글씨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고도 한다. 하지만 필자는 한예의 고구려적 재해석인 광개토대왕비의 신라적 변용 내지 확장으로 보고 싶다. 국가나 왕실의 근엄한 권위가 글씨 속에 내장돼 장식성이 강한 광개토대왕비체를 토대로 신라 고비는 일상생활이나 사회상을 있는 그대로 기록함으로써 일상의 정서나 미감까지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영일지역은 신라가 동해안으로 진출하는 전초기지였으며 한동안 왜·고구려의 영향이 미쳤던 곳이자 낙랑시대 한인계통의 진솔예백장(晋率濊伯長) 동인(銅印)이 발견되기도 했음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요컨대 고신라의 글씨는 광개토대왕비체에서 영향을 받았으되 신라의 독자적인 미감으로 소화된 것이다. 이런 사실은 최근 발견된 포항의 중성리비(501)나 냉수리비, 봉평비와 같은 시기로 보이는 금관총 출토 이사지왕 환두대도 명문, 훨씬 이전인 호우총 호우명의 글씨풍도 증명해준다. 

이렇게 돌은 말없이 1500여년 전의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없이 전해준다. 일종의 타임캡슐인 셈이다. 그렇다면 1000년 뒤, 1만년 뒤 살아남은 2013년의 글씨는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까. 종이책일까, 전자책일까, 그것도 아니면 금석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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