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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 11일 토요일

[서예로 찾은 우리 미학](5) 낙랑 동인과 조선 어보

ㆍ‘쓰기 쉽게’ 문자의 진화와 거꾸로 간 ‘장식미’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10252122065&code=960100

1950년, 6·25 난리통에 미군 병사가 서울 종묘에 잠입하여 어보를 탈취해 갔다. 어보의 임자는 <여인천하>에서 전인화의 표독연기가 지금도 눈에 선한 문정왕후다. 최근 LA카운티뮤지엄은 이 유물이 절도품임을 이유로 반환을 발표했다. 62년 만의 귀환이다. 왕조시대 왕의 국새나 왕후의 어보는 나라와 맞먹는 무게다. 비근한 예로 고대 동아시아 외교무대에서는 위(魏), 진(晋)과 같은 나라가 한(韓), 예(穢), 부여(夫餘)의 백장(佰長: 백 사람의 무리를 다스리는 수장)에게 내린 책봉인(冊封印)과 같은 도장이 있다. ‘진솔선예백장(晋率善穢佰長)’ ‘위솔선한백장(魏率善韓佰長)’ ‘진부여솔선백장(晋夫餘率善佰長)’ 따위다. 일본 국보인 ‘한왜노국왕(漢倭奴國王)’ 인장도 마찬가지다. 한의 광무제가 왜 노국왕에게 책봉을 준 것으로 <후한서>에는 “건무 중원 2년(26)에 왜의 노국이 조공을 해 왔다”고 기록돼 있다. 옛날에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상대로 살아가는 길이란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는 관계를 어떻게 형성하는가에 달렸던 것이다. 책봉인은 국가와 국가 간의 신표(信標)다. 

좌우지간 어보의 실종은 국망의 반증이다. 그래서 혜문 스님의 어보 환수는 우리 문화재 제자리 찾기를 넘어 구천에서 떠도는 민족혼의 환수이자 우리 정신을 본자리로 되돌리는 일이다. 이렇게 보면 문화전파에 있어 역설적이지만 전쟁만큼 강력한 수단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불과 100여년 만에 동에서 서로 바뀐 우리 일상이나 의식구조를 보면 알 수 있다. 식민지와 전쟁이라는 것이 우리 문화를 깡그리 말살시키고 부지불식간에 왜색이나 서구 문화를 이식시키고 만다.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불가항력으로 내 삶의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우리가 겪은 수백 차례 전쟁 중 한(漢)나라의 위만조선(B.C. 194~108) 침공만큼 영향력이 큰 전쟁도 없었을 듯싶다. 그 이유는 한의 문자인 한자(漢字)가 한반도에 유통되고 사용됐기 때문이다. 서예의 역사나 문자문화는 물론 우리 사유의 근간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 한자 아닌가.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이 한 무제의 침략으로 망한 때부터 313년 낙랑군이 고구려에 패퇴할 때까지 420여년의 시간은 고려나 조선 역사 500년에 진배없는 긴 시간이다. 당시 한자는 고고유물로 보면 동경(銅鏡: 구리거울) 인장과 전폐(錢幣), 봉니(封泥: 인장이 찍힌 점토덩어리), 와전(기와와 벽돌) 등에 다양하게 전해진다. 

1545년(인종1)에 제작된 중종대왕(中宗大王) 금보(10×10×8㎝·위쪽 사진). ‘中宗 徽文昭武 欽仁誠孝 大王之寶’라는 존호(아래쪽)가 새겨져 있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낙랑의 봉니와 인장은 고고유물이 증거하는 우리나라 인장의 시작인데, 모두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관리들의 손에 수습되었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평양에서 출토된 관인 성격의 봉니는 200여점이다. 여기서 낙랑군 25개 현 중 22개의 관직명이 확인됨으로써 그 치지(治地)의 단정 근거가 되었다. ‘조선우위(朝鮮右尉)’ ‘낙랑태수장(樂浪太守章)’과 같은 인문(印文)의 서풍은 한인풍(漢印風)의 무겁고도 전형적인 모인전(摹印篆) 계통이다. 이 서체는 ‘진(晋)’만을 크게 하여 한 행으로 잡고 나머지를 세 자씩 두 행으로 인면공간을 경영한 ‘진부여솔선백장(晋夫餘率善佰長)’에서 보듯 서체 변천의 과도기답게 전법과 예법이 서로 통하고 있다. 

그렇다면 ‘성열대왕대비(聖烈大王大妃)’라는 존호가 새겨진 문정왕후 어보와 같은 인문의 서체는 어떤 스타일일까. 아무리 꼼꼼히 살펴봐도 도저히 읽어낼 수가 없다. 구절양장같이 꼬불꼬불한 필획이 어디서 시작되고 끝나는지, 한 자인지, 두 자인지조차 구분하기 어렵다. 문자만큼 현실적인 놈도 없다. 이것은 오직 간단하고 쉽고 빠르게 쓰도록 바뀌어온 서체 역사가 말해준다.

하지만 어보 국새의 인문은 이것과는 정반대로 간다. 조선만 해도 500여년 동안 시종일관 같은 스타일이다. 이것이 바로 보수의 종결자라 할 구첩전(九疊篆)이다. 붓으로 즉석에서 써낸 일상의 실용문자와는 달리 의례용 장식서체다. 한나라를 전후해 문자의 성격은 두 갈래 길로 나누어져왔다. 요컨대 갑골문, 종정문, 대전, 소전 같은 전서그룹 글자들이 현실에서 밀려나자 권위의 신성(神聖)문자는 어보, 국새 등의 도장 글씨나 부적 문자로 자리를 옮겨 잡는다. 그리고 역사가 거듭될수록 위엄에 위엄을 장식으로 더한 것이다. 이런 인장문화는 각 시대마다 뚜렷한 특질을 가지고 삼국시대는 물론 통일신라, 고려, 조선을 거쳐 일관된 맥락으로 전개되어왔다. 

한나라 문자사정을 보면 중요한 암시를 얻을 수 있다. 보수와 진보의 공존이랄까, 파격의 붓의 시대에도 전형의 전서가 공존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건강한 문화의 필수조건인 다양성이고 공존논리다. 100년이 넘도록 여전히 서구에 물꼬를 대고 있는 문자디자인계가 어떻게 힘 있는 한글의 글자조형을 할 것인지 고민한다면, 이제 한인이나 구첩전과 같은 한자의 바다에 한글을 던져 넣어야 한다. 문정왕후 어보의 철 늦은 귀환은 뿌리를 어디에 내릴지 모르는 우리나라 타이포그래피의 한 가지 향방을 제시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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