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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 11일 토요일

[서예로 찾은 우리 미학](6) 광개토대왕비 (上)



ㆍ우리 글씨의 ‘마이 웨이’ 선언한 기념비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11012159445&code=960202

말과 그림이 만나 문자가 만들어진 이래 중국을 넘어 우리의 존재를 글씨미학으로 만천하에 처음 증거한 것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다. 이후 고비마다 8세기 김생, 12세기 탄연, 15세기 훈민정음, 19세기 김정희 등 서예사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거장과 문자문명이 전개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우리 서예 역사의 ‘마이 웨이’라 할 이 비는 414년에 세워졌으니 내년이면 1600주년이 된다. 기원전 1500년쯤 그림문자가 만들어진 이후로 따지면 1900여년 만이다. 필자는 414년이 아니라 1900여년에 방점을 둔다. 광개토대왕비가 평지돌출이 아닌 이상 성취만큼이나 과정도 중요하다는 뜻이다.

글씨무대에서 ‘나’라는 존재를 웅혼하고 고박한 고예(古隸)의 서체미학으로 금석문에 각인시키는 일이란 제단, 시장, 공사판, 전쟁터에서 갑골(甲骨), 종정(鐘鼎), 엽전(葉錢), 와전(瓦塼), 봉니(封泥), 죽백(竹帛) 등의 서예현장을 뒹굴면서 수용과 재해석의 담금질 과정을 겪어낸 이후에나 가능하다. 이런 맥락에서 광개토대왕비를 생각하면 먼저 안타까움과 분노가 치미는 것은 당연하다. 위조 여부를 놓고 일본과의 100년 역사논쟁에 골몰하다 정작 이 비가 가진 본질적인 가치를 다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신묘년에 왜가 쳐들어오자 고구려는 바다를 건너가 왜를 쳐부쉈다. 그런데 백제가 왜와 (연합하여 신라로 쳐들어가) 그들의 백성으로 삼으려 했다’(정인보)는 대목을 ‘신묘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 백제와 신라를 치고 백성으로 삼았다’라고 조작하여 ‘임나일본부설’을 입증하려 한 사실 말고 더 이상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이 비의 궤적이나 서체미학의 독자성을 꿰뚫고 있었다면 일인의 조작이나 중국의 동북공정이 무슨 대수일까. 역사왜곡이나 조작보다 더한 걱정은 우리 자신이 너무 우리 것에 대해 무지하다는 사실이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나라가 망하자 조선광문회에서 ‘만천하 지사(志士) 인인(仁人)들이 광개토왕비의 글자만을 가지고 웅혼한 민족정기를 되살리자’고 냈던 광고(개인 소장)의 일부분이다. 조선광문회는 민족 전통의 계승을 위한 고전 간행과 보급을 위해 최남선·현채·박은식 등이 조직했다.
5세기 동아시아 서예 역사는 양쯔강을 경계로 광개토대왕비 서체와 북위글씨 중심의 북쪽, 왕희지 중심의 남쪽 글씨로 나뉜다. 글씨뿐만 아니라 위·진에다 남북조로 갈라진 당시 중국 역사도 마찬가지다. 남북조시대 진의 강남 천도로 동진이 되었고 혼란의 강북은 120년 뒤 북위로 통일되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서예란 줄곧 왕희지를 중심으로 한 단선적인 전개가 대세다. 그런데 ‘광개토대왕비’를 대항마로 내세우다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의아해할 수도 있다.

응당 중국 서예는 동진(317~419)시대의 서성(書聖) 왕희지가 나와 귀족적이고도 운치있는 해·행·초의 각체를 완성하여 예술로서 서(書)의 위치를 확립하였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한국 서예는 계통이 다르다. 서예사 전개에 대한 이 같은 이원론적 시각이나 자각은 청나라 금석고증학의 대부인 완원(阮元)의 ‘남북서파론(南北書派論)’에서 일찍이 거론되고 있었다. 북파는 중원의 고법(古法)으로 치졸하면서도 힘차 비방(碑榜)에 으뜸이라 하여 비학(碑學)으로 숭상받았다.

물론 19세기에 와서 이 이론을 토대로 북과 남의 글씨를 하나로 제대로 녹여낸 성취물은 중국이 아닌 조선의 추사체이다. 아무튼 북쪽 글씨는 종요에서 왕희지로 정착된 남쪽 글씨와는 분명 다른 갈래다.

요컨대 왕희지가 동진에서 해서와 행초로 첩파의 전형을 완성해내고 있을 때 북쪽에서는 육조해나 광개토대왕비와 같은 장엄한 고예가 고구려, 백제, 신라는 물론 ‘칠지도(七枝刀)’가 증명하듯 일본열도까지 세력을 뻗어가며 또 한 갈래의 주류서풍으로 구사되었다. 더욱이 고예는 서한에서 구사된 전서 필획에 예서의 짜임새를 가진 글씨체로 기원전 200여년쯤 태동기부터 따지면 낙랑의 와전문을 거쳐 광개토대왕비에 이르기까지 그 역사가 600여년에 이른다.

그렇다면 왕희지가 확립한 동진의 글씨와 광개토대왕비의 고구려 글씨를 맞비교하여 전자를 선진이고 후자를 후진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문화라는 것이 과연 그러한 성질의 것인가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역설적이지만 조작과 왜곡은 그 대상의 가치가 뛰어남을 반증하는 것이다. 백번 양보해서 이런 논리와 잣대라면 고구려 문화는 동진에 비해 현저하게 후진적이고, 광개토대왕비는 그냥 덩치만 큰 허울 좋은 돌덩어리일 뿐이다. 그러나 이런 시각으로는 고구려가 시조 추모왕의 천제지자(天帝之子) 혈통을 계승한 천하국가로서 세계경영을 했다는 사실을 설명할 도리가 없다. 광개토대왕비의 글씨가 후진적인 것이라면 일본이 비문을 조작하거나 중국이 동북공정을 통해 광개토대왕비를 자신들의 역사 안으로 집어넣으려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낙랑군이 위만조선을 함락시키고 85년에 세운 ‘점제현신사비’만 해도 여전히 전형적인 한나라 서풍이다. 또 ‘조선우위(朝鮮右尉)’ ‘낙랑태수장(樂浪太守章)’과 같은 도장은 한인풍(漢印風)의 무겁고 전형적인 모인전(摹印篆) 계통이다. 예컨대 ‘진(晋)’만을 크게 하여 한 행으로 잡고 나머지를 세 자씩 두 행으로 인면공간을 경영한 ‘진부여솔선백장(晋夫餘率善佰長)’에서 보듯 전법과 예법이 서로 통하고 있다. 
하지만 낙랑명문전 400여년의 역사 중 마지막에 해당되는 황해도 신천 출토의 ‘영화팔년이월사일한씨조전(永和八年二月四日韓氏造塼)’(352년)과 같은 와전에 가서는 이미 서체의 양상이 초기의 전서와 고예의 과도기를 넘어서고 있다. 필획의 파임이나 해서의 필의까지 가미되었는가 하면 글자의 짜임새도 고예를 벗어나고 있다. 

해서와 행·초서까지 다 섞여 있는 광개토대왕비의 글씨와 비슷해진 것이다. 요컨대 광개토대왕비의 글씨 조형 미감과 정신은 천하를 경영한 고구려의 힘과 직결된다. 고구려가 당시 한(韓)·패려(稗麗)·예(穢)·숙신(肅愼)은 물론 백제·신라·왜까지 아우르며 요동 중심의 중원천하를 조공과 책봉으로 경영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광개토대왕비는 고구려가 글씨의 힘에서도 더 이상 한나라의 고예가 아닌 ‘광토비체’로 평정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설사 글자는 조작되어도 글자의 기상이라 할 서체미학은 조작될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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