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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 2일 목요일

[김종철의 수하한화]문명의 지속가능성과 민주주의

새해 첫날, 경향신문 신년기획 ‘문명, 그 길을 묻다’의 첫회 대담을 흥미롭게 읽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문명의 붕괴> 등 몇 권의 중요한 책으로 한국 사회에서도 잘 알려져 있긴 하지만, 왜 하필 이 시리즈의 선두에 내세워졌는지 궁금하다. 아마 신문 편집자도 지금 이 문제를 가장 절박한 문제로 느끼고 있는지 모른다. 이 문제라는 것은 물론 문명의 지속가능성 여부다. 아니, 이 지상에서 인간 생존의 지속가능성 자체의 문제라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다이아몬드 교수의 이야기 중 가장 심란한 대목은, 지금과 같은 상황이 계속된다고 할 때 현재의 어린 세대나 장차 태어날 아이들이 2050년쯤 맞이할 세상이 어떤 세상일지 생각해보자는 말이다. 자기가 생물학자에서 생태주의자로 변신하게 된 결정적인 동기도 자신의 쌍둥이 자식들의 나이를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다이아몬드 교수 자신은, 지구환경이 생태적으로 황무지가 되어 있을 2050년쯤에는 이미 저세상 사람일 것이지만, 마실 물을 비롯하여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기초적 인프라가 거의 모두 소멸된 상황에서 아들딸, 손자손녀들이 과연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을지 심히 염려하고 있다.

2050년쯤이라면 30여년밖에 남지 않았다. 다이아몬드 교수의 이야기에서 문득 내 나이를 생각해보았다. 나 자신도 그 무렵에는 세상에 살아있을 가능성은 없다. 그러나 내게도 자식들이 있고, 어쩌면 그들에게도 그들 자신의 자식들이 생겨나 있을지도 모른다. 그 모두에게 앞으로 수십년 후에 닥칠 상황이란 어떤 것일까?

되돌아보면, 나는 소년 시절부터 줄곧 이 비슷한 불안과 두려움에 시달려왔다. 중학생 때 우연히 <제7 지하호>라는 소설을 읽은 이후 더 그랬던 것 같다. 이 소설은 한 인간집단이 사전에 건설된 거대한 지하도시로 대피함으로써 핵전쟁에서 살아남았으나 결국은 온갖 첨단 기술에도 불구하고 쓰레기 처리라는 난문제에 봉착하여 실패하고 마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었다. 이 소설을 읽은 후 나는 한동안 가위눌려 지냈다. 

그러나 나중에 어른이 된 다음 나는 내 어렸을 때의 경험이 결코 철없는 소년이 황당한 픽션을 읽고 느낀 비현실적인 공포감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핵무기는 말할 것도 없지만, 원자력이든 화석연료든 재생 불가능한 에너지와 지하자원을 기반으로 하여 유지되는 문명이 근본적으로 자멸적이며 지속 불가능하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인데도, 세상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돌아가고 있었다. 내게는 이런 현실이 늘 신기하고,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졌다. 지금도 그렇다.

그러나 어쨌든, 마음속 깊은 곳의 불안과 공포심에도 불구하고 나와 우리 세대가 삶을 영위해온 이 세상 자연은, 거두절미하고, 한없이 아름답고 풍요로운 품이었다. 문제는, 이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의 체험이 우리 다음 세대와 그들의 자식들에게도 이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다이아몬드 교수는,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은 경제성장이라는 맹목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데 여념이 없는 세계의 지도자들이 하루빨리 각성하는 데 달려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그 점에 대해 어느 정도 낙관적인 것 같다. 그 근거는 자기가 아는 많은 기업 경영자들이 자손들의 미래 생존에 대해 진심으로 걱정하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과연 그럴까? 다이아몬드 교수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게 아니다. 내가 보기에 그의 생각은 지나치게 나이브하다. 

개인적으로 인류의 장기적인 생존기반에 관심을 갖는 정치 지도자, 경영자들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문제는 그들의 관심이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실제로 국가운영과 기업경영의 기본원리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오늘날의 상황에서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가장 핵심적인 걸림돌은, 말할 것도 없이, 이윤 추구에 혈안이 돼 있는 자본주의 경제 논리, 그리고 그것과 긴밀히 결합되어 있는 뿌리 깊은 ‘국익’ 관념이다. 더욱이 지금은 신자유주의와 자유무역이라는 이데올로기를 통해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약육강식 논리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신제국주의’ 시대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우리의 현실을 보더라도 그렇다. 지금 우리는 철도, 의료, 가스 등 국민 생활의 필수불가결한 기초적 인프라인 공공 서비스 시스템이 기업의 사적인 이익창출 수단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해 있음을 목도하고 있다. 정부는 민영화(사유화)가 아니라고 강변하지만, 말이 아니라 실제로 취하는 행동은 민영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 근본적으로 모순적인 정책을 거센 여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결국 대기업 혹은 다국적기업의 이익이 걸려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생산과잉과 자본과잉으로 기능부전에 빠진 세계경제 상황에서 자본가들에게 남은 마지막 ‘프런티어’는 공공 인프라의 사유화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내의 농민들과 빈민, 그리고 중국이나 인도 등 신흥개발국의 노동자들을 착취·약탈해온 구조도 이미 수명이 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국가권력과 공모하여 자본가들이 공공 인프라를 사유화하여 돈을 더 벌어봤자 그게 과연 언제까지 지속 가능할까? 다수 국민이 걷잡을 수 없이 빈궁화의 수렁으로 빠져 들어가는 상황에서 어떤 경제가 안정성과 지속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이런 식으로 가면 확실한 것은, 시간을 특정할 수는 없지만, 우리 모두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비참한 공멸밖에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권력자, 자본가라고 해서 예외일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공생의 원리가 지금처럼 절실한 때가 없지만, 지금 국가와 자본은,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힘, 즉 타성에 깊이 젖어 있다. 따지고보면, 더 많은 성장과 축적을 향한 자본의 운동이건 부국강병을 겨냥하는 국익 논리건 그것은 모두 시대착오적인 논리다. 이 완고한 벽을 파쇼적 강권통치로 넘어설 수 있을까? 암울한 세상을 회피하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결국 모든 지혜를 모아서 가장 옳은 선택이 무엇인지 이성적으로 합의하기 위한 틀의 확보다. 구원의 가능성은 우리가 얼마나 질 높은 민주주의를 향유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1012050215&code=99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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