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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 2일 목요일

땅을 ‘국유화’해라 / 윤구병

농사짓고, 고기 잡고, 산 살림 하는데 필요한 땅을 나라에서 죄다 사들여서 손발 놀리고, 몸 놀려서 먹을 것, 입을 것, 잠자리를 마련하는 이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어야 한다. ‘공짜’는 아니다. 한 해 거둔 것에서 열에 하나, 아홉에 하나를 내놓게 하면 된다.

나는 요즘 들어 세 살배기도 알아들을 수 있고 까막눈인 시골 어르신들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어야 참세상, 좋은 세상, ‘민주 세상’이 온다고 말하고 다닌다. 내 나이 일흔이 가까워서야 이걸 깨쳤으니 너무 더뎌서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라는 말을 들음직도 하다. 내 말버릇이 얼마나 고약했는지, 그리고 아직도 그 버릇을 개 주지 못하고 있는지를 보기를 들어서 이야기하겠다.
“‘억압’, ‘착취’, ‘탐욕’, ‘전쟁’, ‘증오’, ‘이기심’은 모두 ‘있는 놈’들이 더 많이 가지려고 ‘힘센 나라’에서 들여온 몹쓸 것, 몹쓸 짓, ‘없을 것’들이고 ‘없애야 할 것’들입니다./ 이른바 ‘지배계급’은 ‘언어의 폭력’을 ‘제도화’해서 ‘이데올로기적인 국가 기구들’을 만들어 내는데, 이 일에 부림을 받는 이들은 ‘인문학’을 앞세우는 ‘지식인’들이기 십상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을 ‘식민지 지식인’들이라고 부르는데, 이이들은 열에 아홉이 ‘폭력적인 국가 기구의 앞잡이’들입니다. 말로는 ‘민주화’를 부르짖어도, 이이들이 입 밖에 내는 말들을 들으면 ‘아니올시다’. 세 살배기, 다섯 살배기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참’과 ‘거짓’, ‘좋음’과 ‘나쁨’을 가려낼 수 없는 이들이 어떻게 바른 생각을 일깨울 수 있고, 거짓에 맞서 ‘좋은 앞날’을 가꿀 올곧은 뜻을 세울 수 있겠습니까?”
<철학을 다시 쓴다>의 ‘책머리’에서 옮긴 말이다. 이 책은 ‘2013년 철학·윤리학·심리학 부문 최우수 교양도서’로 뽑혔다.(뽑은 곳은 ‘문화체육관광부’라고 들었다.) 여기에 적힌 말을 어린애들이, 시골 늙은이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까? 없다. 시골에 살면서 열다섯 해가 넘게 마을 어르신들에게서 쉬운 말로 이야기 주고받기를 배웠다는 나도 말버릇이 이 꼴인데, ‘대학’ 물을 먹은 ‘교양’ 있는 사람들만 떼거리로 몰려 있는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 꼴은 오죽하랴.
나는 거의 완벽한 ‘기계치’여서 손글씨로 글을 쓰고, ‘컴맹’이고, ‘에스엔에스’(SNS)에도 담을 쌓고 있다. 게다가 내가 몸담고 있던 ‘변산 공동체’에는 텔레비전도 없고, 컴퓨터도 구석방에 갇혀 있어 꼭 쓸 일이 있을 때 두세 사람만 그 방에 드나들고, 마흔이 넘는 중·고등학생 나이의 아이들에게도 ‘손전화’를 쓰지 못하게 말려서 ‘신문’으로만, 그리고 가끔 들르는 손님들이 물고 온 입소문으로만 바깥소식을 듣는 형편이다. 이러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때에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아무리 외진 두메나 외딴섬이라도 차가 들어오고 배가 닿는 곳이면 오롯이 세상일에서 비켜설 수가 없다.
‘박근혜 정부’가 수렁에 빠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걱정스럽다. 이 ‘정부’는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은 ‘정부’다. 먼저 ‘이명박 정부’와 그에 앞선 ‘정부들’이 어질러 놓은 살림의 뒷설거지를 서둘러야 한다. 그 가운데는 ‘4대강’도 있고, ‘핵발전소’를 둘러싼 문제도 있고, ‘자원 외교’를 빌미로 저질러 놓은 구린 짓도 있고, ‘비정규직’ 문제, ‘대학 등록금’ 문제, 잘못된 ‘정책’으로 멍들어 온 ‘노동자’, ‘농민’ 문제들도 있다. 새 ‘정권’이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손보았어야 할 이런 ‘문제’들이 어떻게 풀려나가는지는 새 대통령이 뽑힌 지 한 해가 넘는 오늘까지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른다. 들려오는 소문이라고는 ‘국정원’, ‘사이버사’, ‘경찰’ 같은 ‘폭력적인 국가 기구’가 앞장서고 ‘종합 편성 채널’, ‘케이비에스’, ‘엠비시’ 같은 ‘이념적인 국가 기구’가 덩달아 나서 ‘대대적’으로 ‘불법’을 저질러서 지난번 대통령 선거에서 어느 한쪽으로 저울추가 기울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뿐이다. 다 지난 이야기이니 그만 덮어두자는 말은 이제 누구도 꺼낼 수 없을 만큼 판은 어질러질 대로 어질러졌다. ‘갈 길은 멀고, 해는 저물고’라는 말이 빈말이 아닌 듯싶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 새 대통령이 ‘생활 정치’를 앞세우는 분이니, 이참에 우리네 삶의 물길을 돌리는 데에 도움이 될 몇 가지를 ‘우선 정책 과제’로 수첩에 적어 주십사 부탁드리고 싶다.
‘농민’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하루 세끼 밥상에 먹을 것이 오르지 않으면 너도나도 죽은 목숨이다. ‘식량 자급’이 없는 ‘자주국방’은 없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식량 자급률’은 25%에 채 못 미친다. 도시의 일자리는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점점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일손이 없는 농어촌과 일자리가 없는 도시’ 문제를 함께 해결하려면, 지금 도시에서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앞으로도 그럴 젊은이들을 시골로 이끌어 낼 물길을 뚫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맨 먼저 해야 할 일이 ‘토지의 국유화’다. 농사짓고, 고기 잡고, 산 살림 하는 데 필요한 땅을 나라에서 죄다 사들여서 손발 놀리고, 몸 놀려서 먹을 것, 입을 것, 잠자리를 마련하는 이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어야 한다. ‘공짜’는 아니다. 한 해 거둔 것에서 열에 하나, 아홉에 하나를 내놓게 하면 된다. 농사짓고 싶어도 땅이 없어서, 땅값이 너무 높아서 엄두를 못 내는 사람들이 땅에 발붙이고 살 길이 달리 없다. 허물어진 마을 공동체를 되살리고 문 닫은 시골 학교들 문을 열고 그 안에서 삶에 기쁨을 주는 문화가 꽃피게 하면 도시에 머물라고 붙들어도 농사짓고 살겠다고 뿌리칠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변산 공동체를 보기로 들면 한 해 농사짓는 일을 견딘 사람 가운데 도시로 되돌아간 어른들은 아직 가뭄에 콩 나기만큼 드물다.) 다음으로 할 일은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보리밥을 먹일 일이다.(10년이 지나도 썩지 않는 외국산 밀가루 음식으로 국민의 건강도 해치고 식량 자급률도 떨어뜨리는 짓은 그만두어야 한다.) 그다음에는 ‘물물교환’을 ‘활성화’하는 쪽으로 ‘경제정책’의 물길을 돌려야 한다. ‘돈벌이’는 되지만 삶에 도움이 안 되는 ‘생산 영역’을 줄이고,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것들을 생산하는 쪽으로 생산의 물길을 돌리면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이 대접받는 세상이 오기 마련이다. 대학교수보다 석탄 캐는 사람이 몇 곱절 더 많은 임금을 받고, 먹을 것, 입을 것, 잠자리를 마련하는 사람들이 앞장서서 세상을 바꾸어 나가야만 이 나라에 살길이 열린다. 박원순이 서울 시장이 되기 전에 꾸렸던 ‘아름다운 가게’와 같은 상설 ‘벼룩시장’ 말고도 삶에 도움이 되는 것들을 서로 주고받으면서 고마움을 느끼는 자리들을 많이 만들고 넓혀서 마침내 시골과 도시가 하나 되는 길만이 ‘지속 가능한 미래’를 여는 길이다. 머리만 굴려도 살 수 있는 세상은 곧 끝난다. 자연 속에서 열심히 손발 놀리고 몸 놀려서 부지런히 일하는 젊은이들이 보이지 않는 세상에는 미래가 없다.
늙은이 한 사람이 일해서 젊은 것들 열 명, 스무 명을 먹여 살리면서도 이 늙은이들에게는 ‘정년’도 없고, ‘휴일과 휴게 시간을 주지 않아도 된다’, ‘주 7일을 모두 일하게 할 수 있다’, ‘주 40시간 하루 8시간 근로시간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 ‘연장 근로와 휴일 근로에 대해 가산 수당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 ‘임산부와 연소자도 휴일에 근로시킬 수 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노동관계 법령’을 ‘고용노동부’가 앞장서서 책으로 묶어 널리 알리는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 농민들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그러나, 잘 들어라. 농민에게 희망이 없다면 이 나라에도 인류에게도 희망이 없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덧붙이자.
“농민은 인류의 생명 창고를 그 손에 잡고 있습니다. 우리 조선이 돌연히 상공업 나라로 변하여 하루아침에 농업이 그 자취를 잃어버렸다 하더라도 이 변치 못할 생명 창고의 열쇠는 의연히 지구상 어느 나라의 농민이 잡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부터 87년 전인 1927년에 윤봉길 의사께서 <농민독본>에 쓰신 글이다.
윤구병 농부철학자

출처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1810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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