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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21일 금요일

진보세력 관찰 60년의 소견 / 남재희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65412.html

등록 : 2014.11.20 18:38수정 : 2014.11.20 21:16





이데올로기를 먼저 설정하고 하향식으로 정책을 세우는 방식보다, 현실에 바탕하여 정책을 먼저 생각하고 필요하다면 그 위에 그 모델로서의 이데올로기를 정립했으면 한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식이 아니라 땅에서 올라가는 식의 사고를 하자는 것이다.

남재희 언론인
학생 때 서울 문리대에는 신진회, 서울 법대에는 신조회라는 동아리가 있었는데 이들은 깊은 연구 없이 당시 지식인 사회에 유행하던 풍조대로 영국의 페이비언 사회주의를 따른다고 했다. 후배 학년에 가서는 영향력이 얼마간 커진 학생운동이다. 그때 해럴드 래스키의 사상이 소개되어 영향을 미쳤다. 6·25 전란 중에 민병태 교수가 소개한 것이다.
학생 때 친구의 안내로 사직동 도정궁에 살던 죽산 조봉암을 찾아가기도 하였으며, 명륜동에 있는 동암 서상일을 만나기도 하였다. 스웨터를 입고 소파에 앉아 있던 죽산과 한복에 수염을 기르고 장판방에 앉아있던 동암이 지금도 상징적 의미가 있는 것처럼 떠오른다.
그 후 죽산과 동암은 끝내 손을 잡지 못하고 각각 진보당과 민혁당으로 나뉘었다. 그런데 박헌영과 결별한 죽산이, 한민당 8총무 가운데 한 사람인 동암과 계속 결속하였더라면, 즉 누군가의 표현대로 죽산이 동암이란 갓을 썼더라면, 혹시라도 비극은 피할 수 있었으며 우리의 정치발전에 기여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아깝게 회상된다.
4·19 후에는 혁신의 바람이 특히 대구를 중심으로 뜨겁게 느껴졌다. 주로 사회대중당을 축으로 선거를 치르고, 통일사회당(서상일, 이동화), 혁신당(장건상), 고수파 사대당(김달호), 사회당(최근우) 등으로 나뉘어서 5·16을 당했는데, 그보다는 통일문제를 놓고 남북협상을 내세운 민자통과 중립화를 주장한 중통련으로 분열한 것이 더 중요했다. 그때 기자로 직접 취재했었다.
국내정책을 놓고는 슬로건 차원에서 머물 뿐 구체적인 정책 제시는 별로 없었고 그만한 세력도 아니었다. 그 당시 사회민주주의란 이데올로기적 주장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예를 들어 죽산의 참모였던 이영근은 도쿄대 정치과 유학생인 이동화가 사회민주주의를 진보당에 입력시켰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민족자주, 민족경제 등 원칙에 따라 현실에 적합하게 정책을 세우면 되었지 이데올로기에 얽매일 필요가 어디 있느냐고 했다. 그는 1950년 청주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했을 때 “1일3식 완전 보장”을 공약으로 내걸었었다.
5·16 후는 김철의 통사당(나중에 사민당이라 개칭)이 간판만 유지하는 정도로 지속되어 오다가, 신군부 등장 이후 고정훈이 어용 혁신정당을 청부맡아 국제무대에서 활약하기도 하였다.
그 후 만들어진 민중당이 좀 주목할 만했다. 그런데 이우재 당수가 여당으로 가더니 이재오, 김문수 등 줄줄이 여당행이고, 장기표 하나가 외톨이로 남았다. 백기완의 등장도 한 ‘현상’으로 빠뜨릴 수가 없다.
죽산의 진보당 이후 그래도 의미 있는 혁신정당(그때부터 ‘진보정당’이라고 호칭이 바뀜)이 된 것은 민주노동당이다. 민노당은 여하간 공업화로 형성된 노동자 계층을 바탕으로 하여 처음으로 현대적 의미의 노동자 기반 정당이 된 것이다. 자유당 정권 때부터 전진한이 자유협동주의를 부르짖으며 노동자·농민당을 내세웠으나 겉돌기만 했다. 민노당은 유권자 10%선 넘게 득표에 성공하여 무언가 되는 듯하더니 분열에,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여 결국 지리멸렬 상태가 되어 버렸다. 내 생각으로는 비례대표가 왕창 생겨 당권을 잡는 측이 그 몫을 차지할 수 있다는 판단으로 당권 경쟁이 과열되어 분열을 거듭한 것 같다. 권영길, 단병호, 문성현, 노회찬, 심상정, 홍세화 등 그때의 정치인들을 가끔 만나보기도 하였는데 참 아깝게 되었다. 요즘 정치적 논란이 되고 있는 통합진보당 사람들은 접촉할 기회가 없어 실감 있는 평가를 하기가 어렵다. 소문난 폐쇄적 파당성, 그리고 여론의 역풍으로 앞날이 밝지는 않아 보인다. 그러나 민주 헌정의 원리상 해산되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독일에서 반사회주의자법이 제정된 게 1878년이었던가.
<싸가지 없는 진보>가 칼럼 정도가 아니고 아예 책으로 나오기도 하는 등 진보 측의 행태가 도마에 오른 것 같다. 김영춘 전 의원이 “옳은 말을 그렇게 싸가지 없이 이야기한다”고 한 것이 단초라는 이야기다. 진보 측 인사들이 비록 새로운 것을 찾는다고 하더라도 우리 사회의 예의를 존중하는 지혜는 가져야 마땅할 것이다.
진보 세력을 말함에 있어서 거기에 대립되는 보수 세력 쪽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보수 세력이 굳건히 자리잡고 있는 상황이 먼저다. 거기에 한국은 6·25라는 처참한 전쟁을 겪었다. 그러니 보수의 벽은 두껍고도 두꺼울 수밖에 없다. 거기에 더하여 그러한 보수성을 선동적으로 이용하려는 측에서는 계속 부채질이다. 결국 보수는 극우가 되기도 하고 종북몰이로 나타났다. 미국의 매카시즘을 뺨친다. 아마 선진 외국의 기준으로 보면 기형적인 정치풍토라 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진보세력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 것인가.
여러 가지 의견이 있고, 처방이 나오고 있지만, 나는 분단 상황의 한국에서는 한마디로,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미국의 민주당 모델을 따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하고 싶다. 미국의 민주당이라고 할 때 거기에는 보수파에서부터 진보파까지 여러 갈래의 분파가 연합하여 있다.
그러나 여하간 공화당에 비해 민주당은 개혁적이다. 공화당이 대체로 ‘컨서버티브’(보수적)라고 한다면 민주당은 ‘리버럴’하다고 할 수 있다. 이 미국의 ‘리버럴’이란 표현은 독특하다. 왼쪽으로는 유럽의 진보정당과 비슷한 경향을 포함하고 있기도 하다.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뉴딜 민주당’은 아주 진보적이었다고 정평이 나 있다. 그 영향은 오래도록 심대했다. 존슨으로부터 클린턴이나 오바마의 민주당도 개혁적 성향이다. 클린턴은 영국의 토니 블레어와 생각이 같아 ‘제3의 길’을 함께 추구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진보노선을 고수하는 세력은 그대로 진보노선을 따라 진보정당의 길을 갈 수 있다. 그러나 일부는 그런대로 비교적 개혁적인 큰 정당에 가담하여 그 안에서 개혁을 추진할 수도 있다. 그러는 것이 오히려 효과적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미 많은 진보계 인사들이 지금의 큰 야당에 참여하고도 있다. 미국 민주당의 진보 블록처럼 한국 야당 안의 진보 블록을 이루어 진보의 미래를 개척해 나가는 길이다.
전날의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교수가 생각난다. 그는 민주당 지지의 개혁파였다. 한때는 ‘민주적 행동을 위한 미국인들’(ADA)의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러면서 미국의 정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우리나라의 백낙청 교수와 대비된다고 할까.
물론 미국에도 진보정당들이 있다. 미국의 진보정치의 역사는 우리가 유진 데브스나 노먼 토머스를 알고 있는 대로 줄기찬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예를 들어 갤브레이스 교수와 같은 민주당 개혁파로서의 참여 방식이 그래도 성과가 있는 것이 아닌가 여긴다.
그러한 참여 방식을 논하는 것과 별도로, 아니 그에 앞서서 선거제도의 개선이 중요하다. 의원내각제로의 개혁은 장래로 미루더라도, 간단히 말하여 대통령 선거에서의 결선투표제의 도입과 국회의원 선거에서의 비례대표의 확대이다. 독일은 2분의 1 의석까지 갔는데 우리는 우선 3분의 1 의석 정도라도 접근하였으면 한다. “다수는 결정의 원리요, 비례는 대표의 원리”라는 명언이 새삼 떠오른다.
끝으로 해두고 싶은 이야기는 이데올로기를 먼저 설정하고 하향식으로 정책을 세우는 방식보다, 현실에 바탕하여 정책을 먼저 생각하고 필요하다면 그 위에 그 모델로서의 이데올로기를 정립했으면 하는 것이다. 우리의 사고방식에는 아직도 독일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일본 사상계의 관념론적이고 연역적인 사고가 남아 있다. 영미의 경험론적 귀납적 사고방식은 그와 다르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늘에서 내려오는 식이 아니라 땅에서 올라가는 식의 사고를 하자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보다 현실을 먼저.
남재희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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